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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Jan 06. 2022

東京明期月良

처용 같은 남편이 시골에 있다.

東京明期月良       ᄉᆡᄫᆞᆯ ᄇᆞᆯ긔 ᄃᆞ래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니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ᅀᅡ 자리 보곤
脚烏伊四是良羅   가ᄅᆞ리 네히어라
二兮隐吾下於叱古  둘흔 내 해엇고
二兮隐誰支下焉古  둘흔 뉘 해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隐 本 ᄃᆡ 내 해다마ᄅᆞᆫ
奪叱良乙何如為理古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동경 밝은 달에/밤드리 노닐다가/들어와 자리 보니/다리가 넷이어라/둘은 내 것이런만/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빼앗긴 걸 어찌하릿고.


 아내와 역신의 동침 장면을 '다리 넷'으로 표현한 것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제유적 표현 방식이라는 말이고, 풍자는 어리석음의 폭로, 사악함에 대한 징벌을 주축으로 하는 기지(機智, wit)·조롱(嘲弄, ridicule)·반어(反語, irony)·비꼼(sarcasm)·냉소(冷笑, cynicism)·조소(嘲笑, sardonic)·욕설(辱說, invective) 등의 어조를 포괄한다. 그런 점에서 역신에 대한 처용의 태도에서 풍자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행에서 처용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아내나 그 사내를 비난하지 않고 관용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때 처용의 심리는 슬픔과 체념, 그것을 극복하는 달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처용은 아내의 간음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부정과 공격을 통한 해결 방식이 아니라, 자기 절제와 초극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러한 절제와 초극은 아내와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윤리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역신이 처용에게 감복한 이유도 이러한 윤리적 우월성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진과 해석 출처 : Daum백과사전]



 

 "써글 놈의 영감탱이, 아침 먹으면서 마늘밭에 비닐 씌워야 하니까 밥 먹고 어디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그새 나가고 없더라고. 그래서 어디 갔나 찾아봤더니 겨우 앞집 OO네 마늘밭에서 OO엄마랑 같이 비닐 씌우고 있더라고. 지 계집은 허구한 날 혼자 '긍매는데' 겨우 그래 하는 짓이 남의 마늘밭 비닐 붙들어 주고 있으니 그런 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계란 한 판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쓴 H님은 얼굴에 말라붙어 코팅이 된 계란 흰자 탓에 랩을 씌운 듯 번들거리는 얼굴이 화가 가득 차 터질 듯했다. 나는 일단 보일러를 온수전용으로 틀고 진료소 화장실로 H님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겨울방학 중인 H님의 딸에게 엄마 속옷과 갈아입을 옷들을 챙겨 오라고 시켰다. 분노로 가득 차 나쁜 마음에 사로잡힌 H님의 열기를 식혀야 했다. 그냥 두면 큰일 날 것 같은 H님이 샤워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엇이 이 시골 부부를 매번 어긋나게 만들었을까. 


 "글쎄, 저 덜 떨어진 영감이 OO엄마는 과부라서 그런 걸 붙들어 줄 사람이 없다고, 기껏 가서 그걸 붙들고 서 있더라고...."

H님은 내가 타 준 커피를 마시고 조금은 가라앉은 말투였지만 여전히 분이 남아 있었다. 

"소장님도 생각을 해봐요, OO엄마는 과부기만 했지 마늘밭에 비닐 씌운다고 말만 하면 붙들어 줄 사람이 더 많아. 나는 남편 아니면 누가 그걸 붙들어 줄 거냐고... 내가 치사해서 혼자 하고 말지, 그래서 혼자 마늘밭 비닐을 씌우는데 어찌나 억울하고 분하던지...."

"그런데 계란은 왜 던졌대요?"

"아니, 점심에 고등어를 지져달라고 하지 뭐야. 꼴 보기 싫어도 어떻게 하겠어? 고등어를 그냥 물 붓고 양념도 치지 말고 지져야 잘 먹거든. 고양이 새끼도 아니고... 그걸 먹고 나니 집에서 얼마나 비린내가 나? 딸이 방학이라 집에 있으니 비린내 난다고 난리를 쳤지. 당연히 비린내가 나지.... 그런다고 애한테 욕을 하고 애를 윽박지르지 뭐야, 나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되는데 다 큰 딸한테 막말을 하니 그런 무식한 놈이 어딨어? 그래서 거기다 대고 '작작 좀 하라고, 여기가 니 혼자 사는 집이냐고, 그럴 거면 나가서 혼자 살라'라고 악을 썼더니 장 보아온 놓은 계란 한 판을 집어 들어서 나한테 냅다 던지지 뭐야.... 저런 미**....."

할 말이 없는 나는 그저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에그머니......"(에그는 계란이고 계란값이 아깝다는 뜻이다.)


 H님은 자신의 남편을 '이중인격자'라 부른다. 그도 그럴 듯이 시골 남편이라고 특정 지어 말하긴 어렵지만 내가 보는 한 시골의 남편들은 밖에선 달관자 처용이요, 안에서는 세상 나밖에 모르는 '매정남'이 많다. H님의 남편 역시 집에서는 아내를 종종 '등신, 무식한 여편네' 등으로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데, 밖에 나가면 '법 없이도 살 사람' 소릴 듣는다. 언젠가 H님의 남편에게 '왜 아내를 그리 무시하냐'라고 물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팔불출' 소리 듣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긴다. 때문에 남이 함께 있으면 일부러 아내에게 남처럼 대한다고 했다. H님 부부만 아니라 가끔 함께 진료소에 와도 시간 차이를 두고 들어와서는 마치 남남처럼 행동해서 남들에게는 부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어떤 남편들은 몸살이 나 누워있는 아내에게 밥 차리라고 하는 바람에 또 대판 싸우기도 한다. H님도 그렇게 말한다. '남편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신혼 초 땔감을 아궁이 옆으로 들어다 주는 모습을 본 시어머니의 '버릇된다'는 한 마디에 그날 이후 일절 아내를 위해 손을 보태지 않은 채 긴 세월을 함께 살았다고. 


 시골에선 도시에서 데려온 새색시가 버스에서 내릴 때 손을 잡아 준 새신랑이 '못난 놈'이라며 두고두고 마을의 우스갯거리가 되었었다. 한밤 중 맵게 추운 날씨에 과음해서 속이 아프다는 남편을 대신하여 플래시로 길을 비추며 약을 지으러 오는 아내들과 논에서 일하고 들어온 남편의 점심 밥상이 십 분이라도 늦으면 밥상을 엎는 남편들이 시골에 있었다. 추곡 수매하여 받은 몇 백만 원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읍내 방석집에 가서 이틀 사흘씩 탕진을 하며 놀고 와도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남편들이 시골에 있다. 내가 근무하는 진료소에서 어쩌다가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 하면 나를 도우러 달려 나오는 이는 남편이 아니라 그의 아내다.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은 신과 같은 달관의 경지에 이른 남편인지 모르겠다. 달관의 정확한 뜻이 그것과 다르긴 하지만 간혹 처용 같은 달관자 같은 남편들이 어쩌다 한 명씩 시골에 있다. 남편은 일 년에 오백만 원도 안 되는 농사를 지으면서 세상 중노동 혼자 하는 듯 생색을 내고, 그의 아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덥거나 춥거나 공장으로 출근을 한다. 아내가 야근을 하는 날이면 잠을 자는 아내를 위해 일찌감치 집을 비워준다. 밤늦게 돌아오는 아내를 위해 사거리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배웅을 나가 태워 온다. 혹시 그의 아내가 출근을 핑계로 공장 남자 동료와 다른 어떤 짓을 해도 애써 모른 척한다. 심지어 옆에서 경고해주는 이웃에게 시비를 붙고 완강하게 참견을 거절하기도 한다.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인지, 고생하는 그녀가 딱해서인지, 그녀가 받아오는 월급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처용 같은 남편들이 내가 겪은 시골에 더러 있다. 처용이 절제와 초극으로 윤리의 우월성을 보여주어 역신을 감복시켰다면, 내가 겪은 시골 남편들은 남의 이목이고 남의 생각 때문에 보는 앞에서는 절제와 초극을 발휘한다. 자신은 동경 밝은 달 아래 밤새 화투 치고 술 마시고 놀다 들어왔어도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하고 들어온 양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폭력과 폭언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휘두른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마치 배운 사람처럼 점잖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아내를 위한 그 어떤 것도 버릇될까 봐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시골의 아내들은 그래도 가정을 지켜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일을 한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늙어간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 한창나이 50대와 60대였던 시골 사람들이, 이제는 70대와 80대가 되었다. 진작에 금슬이 좋았던 부부들은 더욱 애틋하고 의가 좋지만, 한창나이였던 그 시절에는 큰소리를 치고 눈을 부라리며 서슬이 시퍼렇던 시골의 '상남자' 남편들은, 지금에 와서는 아내의 한 마디에 얼른 입을 다문다. 세월과 함께 진짜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일지 모른다. 세월과 함께 역전된 처지가 보는 내겐 씁쓸하다. 이제 그들은 밥상을 엎지 못한다. 지금은 무거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 때문이다. 어딜 가도 호기롭게 지갑을 열지 못한다. 노령연금과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가지고 그렇게 흥청대긴 어렵기 때문이다. 아내가 밥을 지어주지 않으면 라면 한 개도 끓이지 못하는 처용인 척하는 남편들이 할아버지 반열에 들어 아직 여기 시골에 있다. H님 세대가 그런 처용같은 남편을 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이 되는 날이다. 그 어떤 종류, 크기, 형태의 모든 가정 폭력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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