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과 도망과 지키기
# 후회와 자책으로 물든 여러 날의 밤
나의 다정함을 미워하고 싶지가 않다. 나의 순수와 나의 사랑과 나의 다정이 합해져 나도 모르게 또 울컥 내 안의 따뜻함이 사랑으로 발현되는 걸 자책하고 싶지가 않다. 속도조절에 실패한 내가 너무 밉고 싫고 가엾다. 그저 사랑이 많을 뿐이었는데 꾀부리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꺼내진 마음이 성급함이 되는 건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다 망쳐버린 것 같아 자꾸만 울고만 싶어 진다. 분명 적당히 천천히 다가가자, 가까이에서 은근한 존재감으로 나를 보여주자 생각했는데, 이런 걸 해본 적 없는 나는 그 서투름에 또 그를 향한 나의 환한 마음의 빛에 내가 나도 모르게 또 불쑥 발을 내디딘 건 아닌지 나를 자꾸만 책망하게 된다.
# 사랑 앞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나와 어떤 순간에도 나를 잃고 싶지 않은 내가 거기 서 있다
그 사람을 잊기로 했다. 그런데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없이 힘들었다. 여행하는 내내 그 사람이 따라다녀서 괴로웠다. 당장 볼 일도, 볼 수도 없는데 눈을 뜨고 있는 내내 어떤 날에는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계속 그 생각이 났다. 길을 걸으면서도, 하루의 여행을 위해 숙소에서 준비하는 그 분주함 속에서도, 마음이 한없이 일렁이는 보고팠던 장면을 마주한 순간에도 그가 계속, 계속 다가왔다. 달과 지구의 인력으로 쉼 없이 서로를 밀고 당겨야 하는 파도의 운명처럼 그를 밀어내고 밀어내도 어떤 때는 거대하게 어떤 때는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며 계속 그는 나에게 밀려왔다. 최선을 다해 썰물이 되어보고자 했지만 나는 이미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 이후였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그를 마음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차갑게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자책과 후회와 숨고 싶은 마음으로 존재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정리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면서 그래도 그가 좋은 그 마음을 나는 이겨내고 대항하고 품으려 하고 있었다. 상대가 아니라면 시작하기 전이니까 내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애끓음과 애달픔의 감정은 그렇게 무 자르듯 딱 알맞게, 꼭 깔끔하게 지워낼 수가 없는 거였다.
나는 계속해서 나에게 침투해 오는 이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밀어내지 않고 내 안에 곱게 담아두기로 했다. 그를 향한 내 감정이 온전히 나를 통과하도록, 이 마음이 잘, 제대로 여과될 수 있기까지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서, 그래서 나에게, 기다림을 선사하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나의 감정이 소중했던 것만큼이나 나에겐 나도 소중하니까. 밀어내지 않고, 대항하지 않고 계속 깊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를, 그 파도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 버릴까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담아내기로 했다. 그가 지워지지 않아서, 그에게 내가 아니란 걸 너무나 확실하게 알았는데도 그가 계속 좋아서, 내 마음이 너무 느껴져서 그 마음이 아프고 또 아프고 쓰라렸다. 안 보는 동안에도 나를 가득 채웠던 그를 그래도 조금은 덜어냈다고 생각했는데 3주 만에 우연히 멀리서 본 그의 모습에 아, 좋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 나는 그만 이후의 매일매일이 종일 그로 가득 찼다. 눈을 뜨면 그 찰나에 그는 출근 준비를 하겠지, 퇴근 시간이 되면 마주치고 싶으면서도 그의 시선에서 사라져 있고 싶어 괜히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그의 점심시간이 되면 괜히 한 번 나가볼까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며 숨 쉬는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거절을 느끼기 전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 그와 함께하는 종일이었다. 그를 떠올리면 좋았고, 보고 싶었고,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어 곁눈질로 시선을 보내는 내가 너무 힘겨웠다. 끊어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고 그렇다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도 않은 이 마음이 그 자체로 버거웠다. 그러면서도 애초에 그를 향한 이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는 내가 있었다.
그런데 끊으려 하지 말고 그가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봐서 좋으면 좋은 마음 그 자체로 내 마음을 바라보기로 했다. 나에게 그가 통과해갈 수 있도록 아주 느리게 통과해 가는 그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기로 했다.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며, 끊어 내려하지 말고 내 마음이 가는 방향을 함께 걸으며 옆에서 때론 뒤에서 든든히 서 있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가 나를 완전히 지나쳐가겠지. 그를 봐도 더 이상 마음이 두둥실 뜨지 않겠지. 그를 본 순간 그를 좋아하는 그 커다란 마음이 내 안에 느껴져서 큰일 났다 싶지 않을 때까지, 그 큰 두 눈을 보고도 내 얼굴이 지금 어떤지 살피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나와 또 내게 끊임없이 침투하는 그와 함께 걷기로 한 것이다. 나는 나의 이 마음을, 이 시기의 나를 너무나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