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마지막
# 사랑의 끝에서
그를 내게서 지웠다고 생각했으나 지워지지 않았음을, 덜어지지 않았음을, 여전히 꽉 들어차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를 보면 자꾸만 피어오르는 내 안의 사랑의 감정과 매듭지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한없이 풀어헤쳐져 나를 흔드는 감각이 몇 주간 계속되었다. 지쳤다. 아니 지치지 않았다. 아니 지쳤다. 어지럽고 가라앉아 정리되지 않은 내 마음에 힘들었다가도 그를 보면 한순간에 기쁜,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내 마음이 싫었다. 이젠 정말 끝이 났다 안심한 순간 아직 끝나지 않은 내 마음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다시 그 앞으로 질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가 나를 통과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로, 그를 온전히 여과하기로 마음먹고는 이런 널뛰기하는 마음마저도 괜찮았다. 슬프고 아프다가 일순간에 환해지는 사랑의 마음을 감당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그를 보면 즐거워지는 내 마음이 조금 웃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이제는 그를 봐도 휘영청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에 이르렀다. 우연한 마주침을 기대하던 순간에 정말 그가 내 앞에 있어도 내 마음이 붕 뜨지 않았다. 하루에 그를 생각하는 횟수가 줄고 내 동선에 그가 끼어들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내 사랑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와의 우연을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그를 우연히 만나도 덜컹거리지 않고 멍해지지 않고 걸음을 제 속도로 걸어 나가게 되면, 그러니까 하던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해나가게 되면, 그때는 정말 그가, 그를 향한 나의 진실되었던 사랑이 깨끗하게 잘 비워진 거겠지. 그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 짝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에 그에 대한 글을 쓰고 나오는 길 저 창문 너머 보이는 그를 닮은 누군가의 얼굴에 나는 잠시 멍해지고, 잠시 내 걸음의 계획을 고려하고, 그와의 마주침을 상상한다. 그런데 그뿐이다. 그를 향해 이는 감정과 마음들은 없다. 이제 정말 그를 지워가는 길 끝에 서 있는 것 같다. 조금씩 흔들리며 정리하고 비워내는 것이 내가 그를 잊는 방법인가 보다. 그를 좋아하는 나의 무수한 방식들 가운데 가장 겉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는 것이 내가 그를 정리하는 방식인가 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건강하게 저물어가는 것 같아 필연적 서글픔 속에서도 어쩐지 나는 기쁘다.
# 사랑을 끝내는 데는 시작할 때보다 더 큰 용기와 첫걸음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있던 사탕을 꺼내 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그 단맛을 느끼며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준 사탕이 무엇인지 몰라 어느 것도 까 먹지 못하고 컴퓨터 모니터 아래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둔 사탕인데 오늘 나는 그중 하나를 까 먹었다. 이제 그를 봐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줄곧 사탕에 손이 가다가도 이내 손길을 거두었다. 차마, 도저히 사탕을 먹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아깝고 남겨두고 싶고 그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이것을 거둘 수가 없었다.
며칠 전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슴 어디서도 울리는 데가 없었는데 왜인지 그만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아직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내 마음을 여전히 확인하고 몇 일을 살다 나는 꽤나 힘든 마음으로 의지를 가지고 사탕을 먹는다. 사탕일 뿐인데 어쩐지 나는 이 사탕을 봉지를 뜯어 입 안으로 넣어 더 이상 무의 존재가 되게 하는 게 무겁다. 심장이 조금, 아니 좀 많이 아프다.
이건 동시에 나의 의지이다. 힘겨운 마음을 이겨내고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 채로 너를 끊고 나아갈 거라는 다짐이자 외침이다. 이제 네가 좀 끝났으면 좋겠다 정말.
# 사랑이 사랑이라서 그래도 행복하고 기쁜
나는 그의 연애소식을 들었고 처음에는 좀 놀랐고 그러다 사랑은 정말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님을 느끼며 오히려 편안해졌다. 실은 그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그 사실에 속이 상하거나 아쉽다거나 슬프고 아린 마음이 들지 않아서 기쁘고 다행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라 놀라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또 누군가의 사랑은 그렇게 쉽고도 재빨리 시작될 수 있음에, 한순간에 통하는 사랑의 축복이 그와 그녀에게는 손쉽게 허락되는 일임에 조금 슬펐을 뿐이다. 거기에 아픈 마음은 없었다. 눈물 흘리는 나도 없었다. 정말 그의 새로운 연애를 축하하고 응원할 수 있었고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요동치지 않고 허둥대지 않는 내가 있어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짝사랑을 온전히 겪어내며 나는 성장했다. 그 성장이 나를 충만케 한다. 성장을 예감하는 신호와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흠뻑 젖어 통과하던 애틋, 설렘, 긴장, 두려움, 민망, 절망, 간질함, 웃음, 기쁨, 사랑, 호의, 떨림, 애달픔, 끓음, 서운, 감사, 미움, 좋아함 그 모든 감정의 양극단을 오가며 때론 누구보다 침체되고 때론 그 어느 때보다 요동치고 폭발하던 그 모든 순간에 그 한가운데에서 오롯이 나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나를 아주 기쁘게 살게 한다. 작년에 그를 처음 보고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 열 달을 거치며 나는, 엄마가 아이를 배 속에 품으며 키워내는 동안 잉태의 기쁨과 슬픔, 고통, 환희를 경험하며 아이를 향한 끊을 수 없는 본질적인 사랑의 감정 또한 함께 키워가듯 그래서 그 이후의 아이를 키우며 감당하고 감내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용기로 헤쳐 나가듯 나 또한 그를 마음에 품었던 열 달 동안 그 모든 사랑의 순간과 감정을 견디고 체감하며 사랑 앞에서, 사랑에 대해서 성장했다. 사랑이란 무형의 감정이 무용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마음으로 온전히 감각할 수 있고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 그리고 용기 있게 사랑에게 말을 건네고 행할 수 있는 나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너무나 서툴러서 숨어 버리고 싶은 기억이 문득 나를 덮쳐와도, 너무 순수해서 어딘가로 도망가 영영 나타나지 않고 싶은 순간으로 빨려 들어가도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사랑이 사랑이라서 행복하고 기쁘다. 감사하다. 그 모든 처음을 이토록 무참히 흔들리며 겪어서 감사하고,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 감사하고, 내가 사랑에 진심일 수 있는 사람이라서, 사랑으로 무력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서,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감사하다. 나를 더없이 무참하게 했고 아프게 했고 절망하게 했고 동시에 기뻐 날뛰게 하고 행복과 충만으로 저 멀리 우주까지 단숨에 보내버리던 이 사랑에게 마지막으로 내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이십 대 첫 사랑아, 아주 많이 고마워. 고마웠고 여전히 고맙고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고마워할 거야. 사랑했어, 아주 많이, 아주 끈질기게, 아주 깊이. 아마 너를 영영 잊지 못할 테야.
그리고, 이제 그로 인해 쓰게 되는 글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