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가기
# 사랑을 지워가는 시간 한가운데에서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처음으로 그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출근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여행하는 내내 그의 아침, 점심, 저녁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사진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살 것 같았다. 아직 그가 따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집을 나설 때, 길을 걸을 때, 그의 회사 앞을 지날 때 그가 격렬하게 내 안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와 마주치길 강렬하게 바라지 않았다. 다시 내 삶의 중심을 나로 되찾았다는 사실이, 그 감각이 너무 기뻤다. 편안했다.
여수에서 내가 그를 떠올리며 쓴 글 하나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글을 읽는데 내가 그를 이렇게나 좋아했구나, 여전히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게 느끼면서도 전만큼 그 글을 읽으며 또 그 글에서 느껴지는 내 마음에 요동치지 않는 새로운 마음이 느껴져서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내 사랑이 저물어가는구나 싶어 마음 한쪽에서는 아팠다. 내 글을 듣고 친구 G는 한참 조용하더니 ‘언니 글을 들으니 내가 누군가에게 저렇게나 사랑받는 존재였던 적이 있었을까 싶어’라고 말했다.
그런 깊고 진하고 진심인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생에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그 물음에 나 또한 누군가의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이렇게나 순도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나 진심으로, 깊이 있게 사랑이 향하고 마음이 쏟아지는 감정이 내 안에서 샘솟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히 차오르고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서 무엇보다 좋았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사랑이 넘쳐흐르는 사람이기에 나의 상대도 내게 깊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욕심처럼 자꾸만 내 안에 불쑥불쑥 올라온다. 그래서 때로는 내 안에 사랑이 깊고 진하고 풍부한 게 아프지만 그래도 그런 내 성질을 미워하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무래도 이런 내가 좋기 때문이다. 거절을 시리게 마주해도, 나를 외면하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도 그럼에도 계속 좋아지는 그 마음이 밉지가 않은 것이다.
절대 마주칠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거기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인사하지 못했다. 그 앞에서 한 번도 내 마음을 표현한 적 없다고, 들킨 적 없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러워지기로 결심했으면서 나는 나의 얼어버린 부자연스러운 모습과 이미 자연스럽지 않을 그 모든 순간의 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먼저 아는 척하지 않은 그의 모습도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한 이유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의 차가움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냉랭함, 어떻게 해도 너는 아니다,라는 인상이 내게는 너무 매서웠으니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고 여전히 나는 그 여과의 시간을 통과해가고 있으니까, 고개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안녕을 말할 순간 예상할 수 없는 그의 표정과 눈빛이 나는 너무 무서웠다. 어쩌면 예상할 수 있는 그의 모습에 더 몸서리쳐져서 나는 도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도망한 나의 시선이 거기 멍하니 남아 있었다.
이것이 편안해질 수 있는 관계의 기회를 없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결국 그도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차분케 한다.
짜증이 난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짜증 말고 답답한 짜증.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이제는 마주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 내 눈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멍해진 것이 짜증 난다. 고장 난 것처럼 쓰던 문장이 멈추고 사고회로가 작동되지 않고, 몸이 굳어버린 내가 짜증 난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만 달콤해진 것이 화가 난다. 그가 갔는지 안 갔는지 계속 거기 있는지 그래서 우리가 한 공간에 있는지 계속 기대하게 되는 마음이 아직 내 안에서 느껴져서 속이 상했다. 가깝고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나를 설레게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그가 나를 통과해 나갈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기로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면 나는 나의 이 사랑이 참으로 아리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가 나를 흔든다.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나는 그가 있는 모든 순간 앞에서 하염없이 무력해진다.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이 계속 거기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나를 무너지게 하고 동시에 무너지지 않으려는 내가 함께 서 있다.
그를 마주치고 싶었고, 마주치는 상상을 수없이 했는데 그렇게 바라던 그 마주침의 순간에 또 얼어버린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공연히 그 시간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나의 어설픔과 바보 같음이 애처롭다. 한참을 더 있으려 한 카페에서 가방을 챙겨 나와 내 짝사랑만큼이나 시린 찬 바람을 맞는다.
어떻게 해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친구 M의 말이 위로와 평안함이 되었다. 내가 그가 다시 편안해질 때까지 자리를 비켜주고 있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나의 낯부끄러움과 성급함이 빚어낸 어색함과 부담스러움의 대참사에 나는 계속 당당해지자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 앞에 마주 서자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그가, 나를 부담스럽게 보는 그가 너무 선명히 내 앞에 존재해서 나는 그만 아득해져 버리고 말았다. 내내 아득함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이 계속되었다. 개인적 일정으로 그 앞에서 사라져 있을 3주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마주해야 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그의 존재함이 이상한 공간에 그가 서 있었다. 나는 그만 벽으로 붙어 버렸다. 다시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의 눈빛에서 단숨에 읽어지는 차가움과 섬칫함에 나는 좌절하고야 말았다. 그전에 멀리서 그를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그래도 그가 좋은 내 마음이 너무 느껴져서 아연해지고 말았는데 나에게 그를 정리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히 엇갈리는 만남이 있었고 꼭 마주해야 하는 만남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었고 이만하면 나도 그에게 시간을 많이 준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감정은 그가 감당해야 하는 그의 몫이었다. 잘난 그의 몫,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게 존재하는 그의 몫. 그런데 그가 이상했다. 내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고 내게 말을 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딘가 평소와 다르게 신나 보였다. 물론 내게 특별한 액션은 없었지만 그가 편안해 보인다는, 그가 괜찮은 것 같다는, 그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그 앞에서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게 아니었다고 표현하는 건 어쩐지 내 마음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최대한 그가 내가 당신을 넘치도록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느끼지 않도록,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생각이 전복되도록 나는 최대한 그에게 시선도, 말도, 자세도 향하지 않은 채 이 시간에 집중했다. 하필 그가 머리를 자르고 와 다행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평소와 다른 이미지에 나에게도 그가 조금 다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그러나 조금의 안도함을 수확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와 두 번째로 대면한 날이 있었고 나는 기뻤다. 둘이 이야기할 수 있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편안하게, 이전처럼, 어쩌면 이전보다 조금 더 친밀해진 느낌으로 대화할 수 있어서였다. 늘 그와 대화하는 시간은 나에게 정신이 없어서 이번에도 역시나 말이 술술 나오지 않았고 전보다 조심하고 검열하는 순간이 더 많았고 내 마음이 커지지 않도록, 또 그가 울컥 좋아져 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느라, 결국엔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나를 경계하느라 이미 반만 존재한 채로 그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그와 때때로 마주치는 시선이 좋았고, 그가 이야기할 때 혹은 내가 이야기하며 우연히 바라보게 되는 그의 옆모습은 잘생겼고 내게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가 나를 통과해 가는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으면서 나는 이전만큼 그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어쩌자고 여전히 좋은 건지 아득해질 뻔하다가도 이 관계를 다시 설정하기로 지향점을 바꾸며 나는 오히려 어제의 이 만남이 좋아졌다. 나는 그와 친해질 거다. 그와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편안하고 가깝고 친밀한 사이가 될 거다. 차분하게, 시간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그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