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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Mar 27. 2024

첫사랑 연대기 : 우정일까 사랑일까

나의 첫사랑을 찾아서 ③

 

 세 번째 짝사랑 후보는 열일곱 같은 반 친구였던 홍당무이다. 늘 볼이 빨갛고 누가 말이라도 시키면 그 빨갛고 분홍색인 볼이 이보다 더 빨개질 수 없다 할 정도로 점점 달아올라 터질 것 같던 홍당무. 신기하게 이 친구의 이름이 내내 기억나지 않다 거짓말처럼 끝에서부터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떠오른다. 박강빈. 끝의 ‘빈’ 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친구. 이름이 특별히 예쁘고 꼭 그 같다고 생각했던 세 글자. 한 번씩 홍당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작년부터는 이름마저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 글자가 참 예뻤는데 뭐였을까 생각해도 도저히 내 머릿속에 기억나지 않던 그 이름. 이제 이 친구도 나에게서 옅어지는구나 했던 그 세 글자가 이 순간 너무 선명하게 내 안에 떠오른다. 한 번도 강빈 앞에서 강빈의 이름을 불러본 적 없다. 실은 그와 나는 딱 한 번 대화해 봤을 뿐이다. 대화라 하기에도 뭐 한 나의 일방적 화냄이었던 우리 둘의 유일한 마주함. 그때도 역시나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던 홍당무.


 내가 열심을 다해 필기한 요약정리지를 빌려줬는데 옮겨 적지도 않고 한 손에 나풀나풀 든 채 친구들과 종이가 다 구겨지도록 장난을 치던 홍당무에게 나는 화가 났다. 학습지를 빌려준 것도 큰 마음먹고 빌려준 건데 그 종이를 든 손으로 친구를 퍽퍽 때리고 방어하며 마구 접히던 내 학습지를 바라보며 나는 강빈에게 화가 났다. 본인 것도 아니면서 소중히 대하지 않고, 집에 갈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필기는 하지 않고 장난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에 점점 빨개지는 그의 양볼만큼이나 내 마음도 점점 부글부글 끓어갔다. 결국 강빈에게 다가가 학습지를 되찾고는 너는 내가 이걸 빌려줬는데 필기도 하지 않고, 이렇게 종이가 다 구겨질 만큼 함부로 하면 어떡하느냐고 쏘아댔다.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핑계도 대지 않고 또 빨개지는 그 볼을 한 채로 멋쩍게 웃는 강빈이 미웠다. 그걸 핑계로 나랑 좀 친해지든가, 뭐라고 말이라도 하지. 당황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정말로 홍당무가 되는 그 아이가, 내 말을 순순히 다 듣고 있는 이 친구가 좀 답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빈이는 착하고 순수했다. 그 시절 여느 남자아이와는 달랐다. 부끄러움이 많았고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가오지도 다가가는 걸 잡지도 못하는 그 모든 속이 다 보이는 투명한 아이였다. 자꾸만 제 자리에서 내 쪽을 하루에도 몇 번씩 힐끔힐끔 뒤돌아보는 강빈의 모습을, 나를 볼 때면 시선을 피하며 서툴게 지나쳐 걸어가던 강빈이 떠오를 때면 어쩌면 강빈이 나를 좋아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이십 대 초중반의 어느 날이었다. 그런 순수하고 맑고 아무것도 모르던 둘이었으니 그게 친해지고 싶은 마음인 건지, 좋아하는 마음인 건지 역시나 아무것도 모른 채 헤어진 강빈과 나였다.


 강빈은 3 분단 교탁 바로 앞자리였고 나는 2 분단 둘째 줄 왼편 자리였다. 나는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이었고 그래서 교탁 뒤에 선 선생님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늘 교탁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나는 강빈의 자리를 향해 내 몸과 눈을 돌려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되었다. 교탁 바로 앞에 앉은 강빈은 때때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가 고개를 돌리는 것도 모르고, 한참 후에야 그가 자꾸만 이쪽을 바라보는 걸 인지했다. 그러고 나서도 금세 잊어버렸다. 강빈이 왜 자꾸 이쪽을 틈틈이 바라보는지, 뭘 확인하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는 아이 아니 그러는지도 까먹은, 강빈은 내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아마 자기를 바라보는 어떤 시선의 정체를 계속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개를 돌리면 그가 느끼던 시선의 처음에 내가 있었을 테고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함께 확인했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괜히 툭 멋있게 앉아 있는 홍당무가 있었고, 왼쪽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50분을 내리 필기도 않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 옆얼굴을 드리우고 있는, 하염없이 교과서만 바라보고 있는 홍당무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와 우연히 교실에서, 복도에서, 제 자리에서 눈이 마주칠 때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고 또 어색하게 옆을 지나쳐가는 홍당무가 있었다. 홍당무는 나를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자꾸만 제 쪽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에 나를 관심 있게 보게 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게 다 나의 착각 혹은 해석인 걸까.


 홍당무는 분홍색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이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남자아이였다. 더 정확히는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유일하게 얼굴이 빨개지지 않고 그가 자신의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자전거 바큇살은 핑크색이었고 매일 아침 홍당무는 그 핑크색 바큇살의 흔적을 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해서인지 꽤 아침 일찍 등교하던 홍당무와 내가 연속적으로 만나던 날들이 있었다. 사거리 한 모퉁이에 위치한 교문을 향해 홍당무는 직진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서 걸어와야 했는데 그렇게 내가 우회전을 하며 내 주변시에 빨갛고 분홍색인 홍당무가 들어올 때가 있었고 이미 내 앞을 지나쳐 교문을 통과하고 있는 홍당무가 있을 때가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교문을 통과해 이미 학교 건물 앞을 지나치고 있을 때 그 옆을 사르륵 부드럽게 지나치는 홍당무도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조금 긴장이 되었는데 그냥 같은 반인데 말 몇 마디 안 해봐서 그 지나침의 순간이 어색해서였는지, 아니면 나도 홍당무가 싫지는 않아서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홍당무가 좋았던 이유는 딱 하나,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였다. 어릴 때부터 공주 콘셉트의 의상과 장난감을 극도로 싫어하고 성별로 나누는 그 모든 잣대를 거부하던 나는 치마는 절대 입지 않고 분홍색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늘색을 좋아했고, 그 하늘색마저도 중성적인 색, 그냥 그 자체의 고유의 색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 속에서 성별로 규정짓는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마음을 따라 분홍색을 좋아하고 또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홍당무의 그 지점이 정말 좋았다. 홍당무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 처음으로 홍당무를 제대로 바라봤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진짜라고 생각하던 내게 홍당무의 그 말은 충분히 멋있고 괜찮아 보였다. 홍당무가 남자는 핑크지,라는 실없는 소리를 했던 것도 같긴 한데 어쨌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 핑크색이고, 늘 수줍어 얼굴이 빨개지던 그가 처음으로 당당해진 순간이 자신의 취향 그것도 핑크임을 말할 때여서 나는 괜히 홍당무가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이상 증상으로 살이 쪘고 고3 여름을 지날 때 정말 많이 부어 있었다. 보충수업까지 끝나고 남은 아이들은 모두 석식을 먹으러 갔을 시간, 교실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해가 저무는 그 시간, 복도에서 마주 걸어오던 강빈과 내가 있다. 가뜩이나 부은 몸에 20킬로그램에 가까운 가방을 이고 그래서 옷이 자꾸만 말려 서둘러 내리며 걷던 나와 강빈이 눈을 마주쳤고 나는 그때의 강빈의 차가운 눈을 기억한다. 그게 나에게는 아픔이자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여러 사건들로 많이 힘들었던 나는 20대를 지나오며 가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의 눈이 무심코 떠올랐다. 그리고 나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내 10대를 기억한다. 그 모든 게 나의 상처이자 아픔이었음을 식어버린 그의 눈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해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관계의 냉혹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우리는 어떤 교류도, 아는 척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강빈이 군대를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와 관련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와 나의 접점이 없기에 어떤 소식을 듣는다는 게 더 이상하지만 군대 가기 전 이발한 모습을 보고 진짜 무 같아서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강빈은 내게 사랑보다는 귀엽고 아쉬운 친구인 것 같다. 친해질 수 있었으나 친해지지 못한 친구. 모쪼록 강빈이 그때의 해맑음으로 지금도 여전히 제 자리에서 잘 살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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