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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Apr 01. 2024

짝사랑 연대기 - 스물일곱의 짝사랑

그를 사랑하는 동안에

· 그를 처음 본 순간


#처음으로 그를 내 눈에 담았던 날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였다. 운동회 날이었고 우리는 모두 파란색 혹은 빨간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는 흰 반팔 티셔츠에 파란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빨간색 조끼를 입고 있었고 내가 속한 조의 지정구역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 앞을 사뿐히 뛰어가는 그를 그때 처음 보았고 그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 만남이자 그의 존재가 내게 각인된 순간이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가 잘생겼다고 생각했고,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어디 있었지 3초간 궁금해했다.     

 그리고는 그를 잊었다. 잘생긴 사람일 뿐이었던 그는 내 기억 어딘가로 숨겨졌다. 다시 그가 떠오른 건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매미가 지겹도록 울어대던 한여름의 오후 4시였다. 이날은 그의 얼굴과 전신만 기억나서 옷차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청바지는 확실히 아니었는데 검은색 바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가 매일 입고 다니는 체육복 바지도 아니다. 흰 티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날은 문 앞에 서서 친구와 함께 한참 소개팅 주선해 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와 내가 중간에 동시에 껴 있는 소개팅이었는데 그만 친구의 지인인 남자분이 사진과 프로필을 받고 마음에 들어 연락처까지 넘겨받고는, 연락 한 번 하고 만남조차 가지지 않은, 그야말로 주선자들이 아주 곤란해진 소개팅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우연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의 그 사뿐한 걸음걸이로 뛰어가는 그가 있었다. 보폭이 커서인지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잘 모르겠는, 가뿐해서 조금 빠르게 걸어도 뛰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나와 눈이 또 마주쳤다. 여전히 그는 잘생겼고 그때는 조금 그의 용모에 설레었던 것도 같다. 단순히 잘생겨서라기보다 두 번째 본 그여서 감정이 개입되고 내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게 되었다고 할까. 그래도 또다시 그를 잊었다. 그런 사람이 있지, 하는 생각조차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지도, 잊었어도 종종 떠올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게 있으면서 없는 존재였다.     


 그러다 가을이 되어 어떤 프로그램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그가 거기에 있었다. 수업 전에 만들어진 단체채팅방에서 유독 눈에 들어온 이름이 있었는데 그 이름의 주인공이 그 무덥던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도 빛나던 그였다. 혼자만 첫 수업을 못 들어서 더 떨리는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연 문 뒤로 처음 마주한 얼굴이 그였다. 열리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뒤로 비스듬히 앉는 그의 모습이 내 마음을 첫 수업의 긴장만큼 더 떨리게 했다. 한참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그 두려운 마음을 이겨내고 신청한 수업이었다. 이겨내야 하는 낯섦과 두려움에 떨림과 긴장을 가득 품고 연 강의실 문 너머에 그가 있었다. 설렘에서 오는 떨림보다 내가 마주해야 할 새로운 사람들의 존재가 확 실감되던, 그래서 어떤 중압감, 무서움, 긴장이 합쳐진 떨림이었다. 막상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약 3개월의 시간 동안 그와 나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긴장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매번 녹초가 되어, 온 신경이 나의 그 긴장 상태로 향해서 그를 생각하지도, 그와의 정기적인 만남에 기대를 품지도, 그를 본다는 생각에 어떤 들뜸이 일지도 않았다. 가끔 첫날처럼 강의실 문을 열면 늘 고개를 돌리는 그를 마주할 때, 수업이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 그를 볼 때,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가 말을 할 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가 느껴질 때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그런 게 조금 궁금했을 뿐이었다.


 진짜 사람으로서,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궁금함이었는지, 아니면 호감이 이미 내게 있어서 그 사람이 궁금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계속 그를 관찰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무 말 없이 책상과 의자를 가장 늦게까지 치우고, 뒤돌아 남아 있는 책상으로 부지런히 시선을 돌리며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묵묵히 챙겨 들고 가는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숙제가 있던 수업이라 매일 하루치의 과제를 올리며 서로의 문장을 읽을 수 있었는데 나는 바쁜 하루 속에서도 매일 밤 꼭 하루치의 기대감으로 그의 글을 읽었다. 숙제를 열심히 하는 수강생이 몇몇 있었고 그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같은 문장을 읽고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삶에 적용해 보며 자신을 통과해 간 문장들에 대한 결과물을 공유했다. 매일 밤 비슷한 시간대에 올라오는 그의 문장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써 내려간 글자들의 의미와 그 시간들을 매일 가늠해 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궁금해졌던 것 같다. 이 사람이 걸어온 길과 그 모든 것이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이고 존재였을지 궁금했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아직 좋아하기 전이라 이때의 용기는 한 번도 대화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거는 용기였다. 나는 이 사람이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이 문장을 쓰면서 방금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섣불리 좋아하지 않았다. 첫눈에 반하지도 않았고 막무가내로 마음을 키우지도 않았다. 나는 열심히 그를 지켜보았고, 건너도 될 돌다리인지 쪼그리고 앉아 여러 번 두드려 보았다. 아니 건너고 싶은 돌다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그 역사를 가늠해 보며 궁금해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궁금했으니까 가까워져 보고 싶었다. 묻고 싶었던 게 있어서 우연히 함께 서 있게 된 순간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나는 점점 이 사람이 좋아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인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인지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이미 그에 대한 마음이 시작되었던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를 궁금해했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내가 먼저 다가갔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이후로 우연히 계속 그와 만나는 자리가 생겼다. 계속 눈길이 갔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몰랐고 가까이에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내가 자꾸만 둘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을 지켜보다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문을 두드렸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단순히 궁금한 마음에 친해지려 했던 것이 아님을, 처음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예의로 대화를 이어가려는 노력만이 아니었음을 자꾸만 느낀다. 처음 말을 건 것도, 그와 나의 공감대에서 비롯된 여러 질문을 한 것도, 한 번이라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어떤 지점들을 만들려 한 것도 다 나였다. 무엇보다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엿보고 내 두 발로 만들며. 또, 비집고 들어간 내가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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