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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Apr 03. 2024

마음의 크기와 속도

사랑에 알맞은 마음이 있다면 알려줘

 

 좋아하는 상대에게 다가갈 때 알맞은 속도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사랑이 있고, 마음의 크기가 맞지 않아도 시작되는 사랑이 있다. 

그렇다면 혼자 너무 빠르게 키운 내 사랑의 크기와 성급했을 속도를 더 이상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내가 그를 좋아하는 시간이 벌써 5개월을 채워가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사랑의 유효기간이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가 내게서 멀어져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분명 처음부터 그를 열렬히 좋아하지 않았고,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아주 천천히 조금씩 시작한 사랑이었는데 내가 그를 향한 마음이 좋아하는 마음이란 걸 인지한 순간 그가 거침없이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그를 그렇게 마음에 품고 그는 내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존재가 되었다. 20대에 들어 처음으로 먼저 좋아하게 된 이 사람이 너무 귀하고 소중했다. 그래서 놓치기 싫었던 것 같고 그 마음을 끝내는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 생각하고 성급해지는 게 아니라 오래 두고 보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좋아해도 될 사람인지, 사귀어도 좋을 상대인지 찬찬히 보며 신중하게 판단하고 싶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나는 무참히 가벼워지는 사람이었다. 곁에서 오래 지켜보며 눈에 담고,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무얼 하는 걸 좋아하는지, 어떤 때 행복을 느끼는지 혹은 어떤 자세로 자신과 그 주변의 것을 대하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씩 바라보고 싶었다. 그걸 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고, 그걸 알게 되는 속도보다 그가 좋아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뭐든 그보다 내가 더 빠르고 더 컸다. 내 안에 그를 온전히 담아내도 모자랄 만큼 그는 내 안에서 커져갔고 그가 하루종일 흘러 넘칠 만큼 나는 그가 더없이 좋아지고, 아파지고, 내 시선에 담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이 그가 달아졌다. 


 내 마음에 점점 커지는 그를 어쩌지 못해 자꾸만 티가 났다. 함께 있을 때면 그를 숨죽여 바라봤고 들키지 않게 시선을 쏟았다. 그 옆에 서면 그의 공간감을 인지했고 계속 그의 옆에 서 있고 싶어 이대로 하염없이 걷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그와 따로 만날 이유도, 계속 걸을 핑계도 내겐 없었다. 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할 뿐이었고 그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그곳으로 계속 내가 가야 했다.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그가 있을 거란 가능성도 반반이었지만 그 모든 확률을 뚫고 그를 만나게 된다는 답만이 내게 존재했다. 그가 없다는 답안지는 애초에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그가 없을 때면 낙담했고 저 밑으로 꺼진 마음을 느끼며 하염없이 느리게 집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내 세상이 온통 그로 채워지고 그로 물들어가고 그로 맑아졌다 흐려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용기를 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저절로 그 앞에 서는 용기로 채워진 채 그의 생일을 준비하는 내가 있었다. 일이 힘든 줄도 모르고, 매일의 피로도 느끼지 못하며, 싫고 미운 이도 없이 그 생각만으로 행복하고 구름 위를 걷는 매일의 하루 위에서 방글거리는 내가 귀엽게 서 있었다. 매일 편하게 쓸 수 있으면서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선물을 사고 싶어 남자 목도리의 키워드로 검색되는 거의 모든 남자 목도리를 참 많이 보았다. 여러 목도리들의 전체 폭과 길이, 디자인과 매무새, 둘렀을 때와 걸쳤을 때의 느낌을 비교해 가며 가장 실패하지 않는 선물로 마음을 전하고 싶어 일주일을 넘게 선물을 결정하지 못했다. 취향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데 어떤 디자인이 좋은지 직장동료에게 묻기도 하고 그의 선물을 고르면서 날뛰는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해 친한 친구를 붙잡고 이 설렘을 쏟아냈다 틀어막다 결국엔 배시시 웃어버리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선물을 전해주지 못한 나를, 그 앞에서 돌덩이처럼 굳어버리는 나를 실감하며 절대 이 선물은 내 손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나 얼어버리는 내가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너무 어린것만 같아 절망했다. 이런 내 모습에 친구는 'ㅋㅋㅋㅋ'을 연발하며 웃어댔지만 나는 정말이지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기분을 뼈아프게 느낀 날이었다. 목적을 잃어버린 채 남아 있는 선물을 계속 생각했다. 그에게 전달되지 못할 선물은 존재의 이유가 없어진 허무함 같아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를 생각하며 목도리를 고른 시간들과 그 속의 내가 계속 어려서 또, 목도리를 전할 길이 없어 나는 떨어야 했다. 


친구들은 이미 산 거 버릴 거냐며 그냥 주라고 했다. 그냥 생일선물 챙겨주는 건데 뭐 어떠냐고 하면서. 그런데 나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그 마음이 너무 느껴지니까. 이 속마음이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건가 싶게 아는 내 마음이 있으니까. 나는 자꾸만 선물을 건네야 하는 순간으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쳤다. 내가 아는 내 마음이 사랑하게 된 사람 앞에 서는 순간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긴장임을 나는 이 일을 통해 깨달았다. 


 언니가 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친한 동생의 말에,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며 계속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귀여운 언니가 이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동생들의 응원에, 나는 덜컥 ‘아 몰라 그냥 줄래! 진짜 이걸 버릴 수도 없고 내가 쓸 수도 없으니까! 어쩌겠어! 주는 수밖에 없지’ 하며 선물을 챙겨 그 앞으로 전진했다.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수없이 상상하고 마주친 순간이었는데 내가 예상한 타이밍을 놓치고 저 멀리 앉아있는 그를 향해 걸어가며 나는 이미 혼이 나갔다. 그의 이름을 떨림을 감추며 나직이 부르고 무슨 일 있냐며 뒤따라오는 그와 마주 섰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치마를 입었고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그 앞에 서야지 했는데 떨려서 이미 잃은 정신으로 나는 그 모습을 검은색 코트 속에 꽁꽁 감춘 채 내가 선물을 주는 이유들을 핑계처럼 한가득 늘어놓고 선물을 건넸다. 


 그와 마주 선 것 자체가, 내가 그의 눈을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가 그에게 그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어 기쁜 마음으로 아주 소중하게 선물을 건넬 수 있어서 나는 이미 계속 행복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해했지만 결국엔 환하게 웃으며 내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 그와 내가 눈을 마주치고 있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다웠다. 찰나의 순간이 정말 길게 느껴지는 숨 막히게 빛나던 순간이었다. 그 한순간 한 순간이 너무 또렷하게 분절처럼 기억나는데 그 모든 게 숨 쉴 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그대로 집에 갔다면 나는 몇 밤을 새워서 녹초가 되었는데 레드불을 쏟아부어 각성상태가 된,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사람. 그래서 녹진하게 거실 바닥에 들러붙어 한참을 있었을 사람일 거다.


 이후로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자리에 너도 꼭 오라고, 와서 같이 영화 보자고 한 내가 있었고, 그 말을 한 게 내 마음을 다 보여준 것 같아 숨고만 싶어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지르는 내가 있었고, 검열했어도 숨겨지지 않은 나의 다정함이 새워나와 그와 어색해진 여러 날이 있었다. 

그렇게 나의 다정함이 미워진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사라져 있기로 했다. 

나의 다정함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만 지킨 채로.

내가 성급해서 이 모든 걸 망쳐버린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곱씹으며. 

내 안의 큰 사랑을 계속 미워하고 원망하며.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나의 따스함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아픈 마음으로, 

나는 묵묵히 하루하루를 감당했다. 

나의 후회와 자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여전한 내 삶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기 위해 애써 노력하며 계속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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