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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Apr 08. 2024

서투름과 미숙함 ①

서툴러서 아픈, 미숙해서 곱씹는,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나의 경험의 부재가 나의 아픔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때를 가고 있을 뿐이었는데 모집단에 들어가는 순간 나의 경험의 수와 밀도가 나의 부족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나의 미숙함으로 작용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었다.


 10대 때는 오로지 대입을 위해 공부했고 20대에는 많이 아팠다. 10대 때 20대로 미뤄 둔 것들의 발걸음을 채 떼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내 아픔과 싸워야 했다. 20대에 할 것들이 아주 많았고 당찬 포부와 꿈과 계획들이 있었다. 그걸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도 나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선택하고 도전했다. 마지막 걸음만 남은 시기였다. 이것만 통과하면 더이상 내 인생에 미루고 지연해야 할 것은 없어 보였다. 이 관문만 통과하면 나는 이제야, 드디어, 비로소 자유할 수 있었다. 부모의 압박과 집안의 통제 시스템을 벗어나 내가 내 손으로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가 하고자 염원하던 것들을 실행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파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덮치는 파도 앞에서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힘을 주고 서 있는 것은 그러니까 나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파도의 완력을 버티려고 한 것은 언젠가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순리였음을 깨닫는다. 생 앞에서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생의 흐름을 유연하게 타고 넘어가는 것, 힘을 빼고 그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잠시 삶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는 것이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잠잠해진 뒤 거짓말처럼 고요함이 찾아왔을 때, 그때가 진정 내 방향으로 다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나는 한참을 지나서야 깨닫는다. 생존을 위해, 생을 지속하기 위해, 의도하지 않았지만 생 앞에서 안간힘을 주고 버텨야 했던 나는 그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장난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대체로 악을 쓰며 고된 삶을 살아왔다. 삶을 산다는 표현은 내게 과분할지도 모른다. 나는 늘 생존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고 삶을 살기보다 주어진 생을 살아내는데 더 급한 사람이었다. 시간은 늘 나보다 저만치 앞서 갔고 막상 시간이 나와 함께 발을 맞추고 있을 때는 생각과 계획은 있으나 정작 머릿속에 있던 무형의 언어를 현실로 구현하고 실체화하여 몸으로 체험하는 기회에 닿지 못했다. 이런 단절된 경험이 연속되었고 어느 순간 나는 어떻게든 찾고 행하는 사람에서 어지러이 멀어져 있었다. 그보다 내가 다다를 수 있는 세계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만 한 채 막상 내 주변 영역에서만 서성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늘 내가 속한 세상 너머의 거대한 물결과 세계가 존재함을 알아차리고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열렬한 도전의 시간을 겪고자 했지만 나의 역량과 해낼 수 있는 크기보다 주어진 환경은 작고 비좁았고, 어느덧 나는 꼭 그만큼의 사람이 되었다. 부모는 나를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하고, 걸음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고 나는 늘 나의 크기에 대한 비난과 시험을 당하며 끊임없이 나를 의심해야 했다. 절대 타인의 힐난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의 길을 보란 듯이 갈 거라고 다짐했지만 환경의 영향과 날 선 말들은 어느새 내 몸속 곳곳에 스며들어 나를 장악했으며 내 사고와 신념을 쥐고 흔들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네 능력에 비해 이상이 너무 크다는 말을 습관처럼 듣고 살아야 했다. 나에게 내 능력을 확인하고 시험할 조건이 주어지기는 했었나. 답답한 억울함과 토로를 감당하는 건 여전히 내 몫일 뿐이었다.


 부모의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아빠는 엄마에게 가혹했고 엄마는 아빠에게 가시였다. 서로를 내내 찌르며 상처 주는 이들을 보며 나는 사랑에 대해, 부부란 관계에 대해 더 궁극적으로는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믿지 않게 되었다. 서로를 꼬집고 비틀고 헤집는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견디며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 책임을 함께 감당한 채 20여 년을 자라야 했다. 나의 말과 행동과 정서 그 모든 것이 형성되고 자리를 잡고 내가 나의 지지 토양이 되도록 기반을 닦아 갈 그 시기 나는 무참히 내버려져 있었다. 내가 이만큼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나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버티고 나의 숨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줄곧 남녀공학을 다녔지만 내게 남자아이란 그저 미숙하고 상처 주기 좋아하며 이상한 사상으로 사물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어떤 대상일 뿐이었고 스무살이 되어서도 주변에서 다들 남자친구 사귀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도 나는 관심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를 보고 설레고 좋아지는 감정은 우연히 찾아오는 순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촉발인데, 성인이 되었으니까, 스무살이니까 연애를 하고 싶어서 연인을 찾고 그래서 정말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서가 너무 이상했던 것이다. 그 좋아짐이 진짜 좋아함이었을까. 그들의 사랑에서 사랑을 하게 되는 첫 시작의 감정과 마음은 내게는 너무나 인위적인 것이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해지면서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어서, 사랑에 빠지기 위해, 미팅을 하고 소개팅을 요청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음을 예상하며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어! 라고 외치며 나간 자리에서 외모도, 생각도, 대화도 잘 통해 ‘사랑’할 수 있다는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만반으로 준비되고 분위기가 형성된 환경 안에서 그 좋은 첫 느낌과 호감이 쌓여서 사랑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그건 내게는 조금 기이한 현상이었다.


 나는 뭐든 자연스러운 사람이고 뭐든 필요가 있어야, 내게 납득할 만한 이유와 행할 사유가 충분해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 그 당시 또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고 감정싸움과 소모적인 입씨름이었다. 진실한 감정이 아닌 스무살이 됐으니 연애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되어줘야 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서로를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 끝이 정해져 있는 시작을 하는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남자친구가, 이성과 하는 사랑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보고 좋고 떨리는 그런 간지러움이 없었을 뿐더러 당시 나는 혼자서도 내 삶이 재미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해야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고 혼자서도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온통 시선과 집중이 나에게로 향해져 있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것을 그리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고 바빴다. 그보다는 가족 안의 보살핌과 사랑이 먼저 채워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종종 친구들을 만났지만 나와 비슷한 결로 대화의 흐름 안에서 유영할 수 있는 친구가 없어서 늘 그들과 나 사이에 평생을 걸어도 좁혀지지 않을 거리가 느껴졌고, 만날 친구가 없어 자주 외로웠다. 그 시기에 주변의 비슷한 나이대의 이들이 하는 모임과 여행과 만남을 끊임없이 부러워했으면서 나는 결코 그 대체제로 남자를 찾지 않았다. 그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혼자인 것을 택했고 혼자서도 굳게 잘 서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다. 그 편이 나에게는 훨씬 멋있고 아름다웠고 건강했으니까.


 그 시기에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나의 미숙함이 빚어낸 짝사랑 실패기에도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혼자서도 잘 하는 사람이, 함께하지 않을 때 무엇이든 잘 해내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자아이자 내가 추구하는 삶의 코어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잘 서서 삶을 알알이 메꿀 수 있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 어느 때에 누군가와 함께했을 때 그 모든 관계에서, 그 모든 여러 갈래의 자아 앞에서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혼밥, 혼술'이란 말이 생겨나기 전부터 혼자 밥을 먹으러 다녔고, 혼자 전시와 공연을 보러 다녔으며 카페에서 나와 내밀한 대화를 하고 혼자 여행을 다녔다. 그 시간은 행복하기도 했고, 철저하게 혼자라는 감각에 몸서리치기도 한 순간이었으며 기쁨과 슬픔과 우울과 환희가 한 데 섞여 있는 다양한 굴곡의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지독한 외로움과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나는 혼자서도 굳건히 서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안의 결핍과 상처, 아픔이 너무 크지만 그마저도 너무 익숙해져 늘 내 안에는 깊고도 아득한 웅덩이가 있음을 감각하며, 호흡하고 햇빛을 받고, 걷고, 거울을 보고, 사람을 마주하고, 웃고 울었다. 그렇게 무뎌졌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혼자라는 감각과 그 어떤 종류의 외로움 앞에 처연해진 내가 마지막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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