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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Mar 25. 2024

첫사랑 연대기 : 성실한 일진

나의 첫사랑을 찾아서 ②


 두 번째 첫사랑 후보는 열다섯 이제는 내가 전학생이 되어 생전 처음 마주한 건물, 선생님, 친구들 속으로 들어가 적응해야 했던, 한창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모인,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매섭고 날 선 중학교 현장에서였다. 일 년을 꼬박 좋아했던, 그와 내 반이 함께 있던 2층 복도에서 우측 방향 끝과 끝에 위치한 나와 그의 반 덕에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갈 때면 이편에서 저편까지 그를 바라보며 갈 수 있던 나의 진하고 절절했던 일 년간의 짝사랑. 이 친구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건 학교에서 너무 유명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려 ‘일진’이었기 때문. 그것도 ‘공부 잘하는’ 일진.

 키는 188센티미터에 머리는 소멸하기 직전. 어깨는 또 태평양같이 넓어서 뭇 여학생들의 마음을 여럿 훔쳤던 윤 모씨. 본인도 잘생기고 인기 많은 걸 알아 언제 어디에서나 꼭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서 있던 윤 모씨. 교복 와이셔츠 주머니에 이어폰을 넣어두고 그것마저 한쪽 귀에만 끼고 그 시선을 즐겼던 잘난 윤 모씨. 그 아이가 왜 좋았는지, 어째서 그렇게 오래오래 절절하게 좋아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이유가 없다. 정말 그냥 좋았다. 작은 머리와 넓은 어깨, 큰 키. 그런 것들이 내가 그에게 끌릴만한 요소는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 친구와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는데 그냥 어느 날부터 그 친구가 좋아졌다. 그렇게 이유 없이 좋아지는 게 사랑인 것 같다. 내가 그를 왜 좋아하는지 대답할 수 없고, 아무리 생각을 곱씹어봐도 그가 좋은 이유를 ‘그냥’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내 안에 피어나는 무한한 시선과 애정 그게 진짜 사랑인 것 같다. 목적 없는, 이유 없는 문득 그렇게 피어난 사랑이 진짜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학원가에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 서 있는 윤 모씨를 우연히 봤을 때,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놀이터에서 신나게 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윤 모씨를 보고 그 옆을 서둘러 지나쳐야 했을 때, 마침 그의 반 앞에 공사를 해서 아주 좁은 틈으로 지나가야 하는데 그와 내가 동시에 껴 있을 때,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긴장과 떨림, 나를 아주 세차게 흔드는 지점들을 견디며 나는 길고 긴 외사랑의 시간을 통과해 왔다. 그 친구가 나를 알아봐 주면 좋겠고, 그와 공유할 수 있는 경험들이 있으면 좋겠고, 내 마음이 전해져 무언가 우리 사이에 피어나면 좋겠는 그런 바람들이 열다섯, 내게는 없었다. 열세 살 좋아한다는 게 뭔지 몰라 어영부영 그 시기를 지났다면 열다섯 나는 고백하여 내 마음을 전하고, 사귄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때 사귀는 것은 일진들 사이에서 돌아가며 하는 그들의 문화였고, 그 밖에 정말 소수의 몇 명들이 하는 것이라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건 그 자체로 핫이슈,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연애라는 표현도 쓰지 않았다. 누구랑 누구랑 사귄대, 헤어졌대 하던 그 멋쩍고 밋밋하던 관계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고백을 받아주고 어색하게 만나다 헤어져 다시 서툴게 서로를 외면하던 그 몇몇의 관계들을 나는 옆에서 목도할 뿐이었다. 정말 진하게 윤 모씨를 좋아해서 나에게 사랑은 그렇게나 깊고 진심이며 오래도록 계속될, 인력과 자력으로 끊어지지 않는 순도의 감정인 것이다. 늘 모든 일에 진심인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내 사랑의 깊이가 애초에 깊어서 그게 내게는 사랑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장 오래 가장 처음으로 좋아함의 물성을 경험한 그 첫 순간이 이 사랑이라서, 내게 사랑은 깊고 그래서 쉽게 오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내 첫 사랑고백은 윤 모씨였다. 그에게 직접 내가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얼굴을 바라보며 전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방영하던 음악프로그램의 시청자 문자를 빌려 강력하게 내 마음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하교 시간에 맞춰 방영하던 그 음악 프로는 10대 중고등학생을 타깃층으로 하여 그 당시 활동하는 아이돌들의 무대를 문자로 신청받아 순서대로 방송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청자가 보낸 문자가 방송에 직접 송출돼서 그걸 보는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마음을 띄우기도 하고, 사귀는 친구에게 오래 사이좋게 지내자고 가볍고도 전부인 고백을 흘려보내기도 하며 꽤나 자주 자기가 좋아하고 있는 친구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들을 직접 혹은 친구가 대신해서 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그 방송은 사랑의 메신저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그 방송을 보고 있는데, 여느 때처럼 그런 고백 문자들이 간간이 올라왔고 대뜸 용기가 생긴 나는 사랑 앞에 처음으로 무적이 되어 그 아이를 향한 나의 마음을 단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고, 꽉꽉 눌러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직접 얼굴 보고는 절대 못 할 것 같으니 그 아이가 이 방송을 보고 있었으면 좋겠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 마음을 이렇게나 똑바로 아는 건 또 싫어 안 봤으면 좋겠는 지킬 앤 하이드 같은 마음을 안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길게 보냈으니 방송에는 당연히 내용이 중간에 잘렸지만 나 무슨 중학교 몇 학년 몇 반 누구인데 윤 모씨야 내가 널 진짜 진짜 좋아해!!!라는 문장만큼은 화려한 무대 옆 오른쪽 아래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내 마음이 이렇다는 걸 이 세상 어딘가에라도 밝히는 쾌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음속에만 들어차 있던 고백을 어떤 식으로든 입 밖으로 꺼내 표현하는 기쁨을 나는 안다. 그 어느 때보다 무적해지는 감각, 녹아내릴 것 같은 떨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기는 단단한 벅참.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랑 앞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주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내 안에 '사랑 앞에서 나는 용기 있을까' 하던 의문은 그저 오래도록 사랑과 멀어져 있어서, 진심으로 향하는 사랑이 없어서, 그저 내 안의 사랑의 무적함을 잊고 지내던 것에서 비롯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사랑 앞에서 당당하고, 무척이나 진심이고, 용기 있게 표현하는 멋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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