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갓 제대한 민 선생은 빡빡머리로 부임했다. 군인과 국어 선생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머리카락이 짧은 것만 빼고는 어쩐지 문학소년 같은 묘한 멋이 있었다.
집에 가는 길 내내 연욱은 그에 대해 얘기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40분. 버스로 네 정류장 거리였다. 무거운 가방이 고역스러웠지만, 매일 버스를 타기는 어려웠다. 회수권은 한 장에 100원. 열 장에 900원. 열 장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해서, 몸이 안 좋거나 비가 오는 날을 대비해 평소에는 걸었다.
연욱은 동네가 비슷해서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하교했다. 어느 날부터 내가 걸어가는 날이면 자동으로 연욱이 따라왔다. 연욱의 집은 우리 집보다도 더 멀어서 만만찮은 거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때 그녀에게 버스보다 더 긴요했던 것은 제 말을 들어줄 누군가의 귀였다. 당장 뚜껑을 열지 않으면 끓어넘칠 찌개냄비처럼, 연욱의 속에는 짝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말들이 개봉의 찰나를 노리고 있었다. 40분이면 얼추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우리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날의 브리핑이 끝났고, 연욱은 한층 홀가분해진 표정이 되어 날름 버스를 집어탔다. 이제는 집이 코앞인데, 돈이 너무 아까웠다.
연욱은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민’ 또는 ‘그’라 불렀다. 5년 후 어른이 되면 그에게 고백할 거라고 했다. 가장 큰 소원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
브렌따노나 언더우드를 즐겨 입던 연욱이, 엄마 옷을 줄인 것 같은 블라우스나 정장 기지 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도 민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던 그즈음이었다. 신발 코가 뾰족해서 촉새같이 생긴 에나멜 구두도 구색을 맞췄다. 굽 높이 때문에 갑자기 키가 5cm는 커버린 연욱이 국어 선생을 ‘그’라고 부르면, 발랄하던 우리의 수다는 돌연 성숙하고 비밀스러운 밀담으로 변신했다.
- 어제 그를 봤어. 별관 자판기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더라구. 손에는 생리대를 들고 말야. 휴지인 줄 알고 잘 못 뽑았나 봐. 지나가던 애들이 키득거리니까, 귀까지 새빨개지더라. 하아~ 내가 얼른 가서 구해줬잖아. 멀리서 내가 오는 거 보고, 일부러 관심 끌려고 그러는 것 같아.
연욱은 민의 생리대 자판기 사건을 얘기하며 한껏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에 대한 모든 일은 ‘전지적 연욱시점’으로 각색되었다. 마무리는 내용에 관련 없이, 저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한숨이었다. 바보 아니야? 까막눈이냐? 기계치야? 요거요거 변태 냄새가 나는데? 하마터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던 이런 말들이 연욱의 한숨에 도로 들어갔다.
성격이 정반대인 쌍둥이처럼 짝사랑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모습을 지녔다. 내가 보아온 여중생의 짝사랑이란 신나는 이벤트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호쾌한 빵빠레로 출발한다. 그가 너무 좋다고, 내가 찜했으니 그런 줄 알라고, ‘이제부터 우리 1일이야’를 아쉬운 대로 일단 저 혼자 선언하고는, 매일매일이 소풍 전야처럼 들뜨는, 마음속에 노랑풍선을 열 개쯤 매달아 놓은, 그런 것이었다.
대상은 성룡, 장국영, 전영록처럼 먼 곳에서 빛나는 오빠들이나, 국영수사과한도음미체 중 하나를 담당하는 지척의 남자 선생님들이었다. 선언이 끝나면 선전선동이 이어진다. 진짜 캡숑 멋지지 않냐? 제눈에 씐 콩깍지의 객관성을 입증하고자, 그들은 기회만 되면 주변인을 들들 볶으며 동의를 구했다. 황금보다 우정이 소중했던 때라 대부분 성심성의껏 끄덕여주었다. 그래 놓고 이번에는 기껏 맞장구를 쳐준 자에게 정반대의 협박을 일삼았다. 행여 눈길도 주지 마라!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아무 장단이나 풍악이 울리기만 하면 우리는 매일 들썩이며 깔깔거렸다.
짝사랑을 선언한 자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앞머리를 둥글게 말아 이마를 우산처럼 덮는 일에 영혼을 갈아 넣었고, 쉬는 시간마다 종이접기의 달인이 되어 빠른 손놀림으로 학을 접었다. 교탁에 포도봉봉을 올려놓고 좋아하는 선생님의 기색을 살피기도 했다. ‘쌤, 지영이가 선생님 좋아한대요~~’ 누군가 난데없이 폭로라도 하면 60명이 동시에 책상을 드럼처럼 두들기며 놀란 갈매기의 소리를 냈다. 짝사랑은 그렇게 모두의 축제였다.
가난한 집에 입양된 쌍둥이 자매처럼, 똑같은 외사랑이었지만 연욱은 훨씬 차분했다. 민에게 마음을 뺏긴 이후, 연욱은 웃음을 잃었다. 재밌는 일이 있어도 입을 꽉 다물었다. 그때 우리는 가랑잎이 떨어져도 웃었고, 안 떨어지고 버텨도 웃었으며, 마침내 버티다 떨어진 가랑잎이 굴러가기라도 하면, 너무 웃다가 대부분 배가 찢어졌다. 심지어 도덕 선생님은 진지한 말투로 묻기까지 했다. 제발 이유나 알자. 도대체 너희들, 왜 웃는 거니? 그 말에 몇 명은 겨우 잠재웠던 웃음보가 다시 터져 결국 숨도 못 쉬고 사망했다나 뭐라나.
저 경박한 어린것들이 사랑의 쓸쓸함을 알까. 시도 때도 없이 꺄르르꺄르르 뒤로 넘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연욱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꺼냈다.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일기장에 홀로 뭔가를 끄적이며, 이탈한 유체를 자기만의 섬으로 유배하는 것이다.
연욱의 사랑법은 정반대였다. 연욱은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채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이 민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싫어했다. 자신의 짝사랑이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 떨어져 소문으로 발아하는 것도 경계했다. 심지어 짝사랑인 주제에 자존심도 내세웠다. 일부러 국어 숙제를 안 해와서 민의 눈길을 끌더니, 불손한 태도로 일관하여 마침내 교무실에 불려 가기까지 했다. 연욱은 홀로 밀당도 하고, 미래도 설계하며, 진지하게 비밀연애 중이었다.
연욱은 어떤 운명적인 계기로 인해 자신과 민이 각별한 사이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굣길의 브리핑에서 연욱은 그 야심찬 로드맵을 내게 최초로 공개했다. 연욱의 다이어리가 민의 심장을 겨누는 최종병기 활이었다. 민 선생은 대학교 때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는데, 연욱은 다이어리에 습작한 자작시가 집대성되는 대로 그걸 들고 그를 찾아갈 생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고개를 360°로 둘러봐도, 주변에 시라는 것을 쓸 것으로 추정되는 고등생명체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연욱의 기대는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낭중지추에 반하지 않을 시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둘이 마주 앉아 도란도란 시를 논하다 보면, 더 이상 자신을 야생 원숭이에 가까운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취급하기는 어려울 거라며 연욱은 야비한 썩소까지 날렸다.
사실 민은 그다지 인기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26살. 총각. 국어 선생님.
민에게는 이 막강한 베네핏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지나치게 구렸다. 그는 아무거나 입고 왔다. 우리 집 옷장 한 구석에 오래 전부터 걸려 있던 아빠의 셔츠들. 낭비를 죄악시하는 가풍 때문에 차마 버리지는 못하지만, 헤지고 바래고 촌스러워서 다시 의복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물 건너간 그 옷들. 민의 셔츠는 그것들과 닮았다.
나중에 국문과에서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設을 배웠을 때, 나는 민을 떠올렸다. 플로베르는 주장했다. 이 세상에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어휘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민의 셔츠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딱 하나였다.
뉘리끼리.
그는 그 싯누런 셔츠 두세 벌을, ‘때 색’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컬러의 면바지와 매칭 해서 입었다. 통 좁은 바지조차 깃발처럼 앞뒤로 펄럭이게 만드는 마른 다리에, 이제는 덥수룩해진 장발과 두꺼운 뿔테 안경까지.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는 식민지 지식인의 역할을 구하는 영화감독이 있다면, 그는 보자마자 캐스팅되어 분장도 없이 촬영장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쓰레빠에 구멍 난 양말을 뚫고 진격하는 엄지발가락은 덤이었다.
아이들은 민을 소 닭 보듯 했고, 그런 이유로 연욱은 자신의 사랑이 더 특별하다고 자부했다. 깔끔하고 잘 생긴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그건 너무 흔해 빠졌다.
고급 브랜드의 맨투맨 셔츠를 날렵한 청바지에 넣어 입고 다니는 물상 선생님은 최고의 스타였다. 지루한 과학원리를 재미있게 설명하는 유머감각은 기본이요, 수시로 눈웃음을 발사하는 귀여운 외모에, 차별 없이 모두에게 자상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에게서는 남자 선생님들한테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청량한 인공의 향기가 났다.
연욱은 주장했다. 물상을 좋아하는 일은 아이스크림이나 떡볶이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나도 갖고 있지만,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 보편적 국민정서 같은 것? 물상을 향한 아이들의 마음은 아이돌을 향한 팬덤과 비슷한 거라서, 거기에는 맹목적 환호만 넘실거릴 뿐, 사랑의 다른 이름인 슬픔이나 쓸쓸함은 찾을 길 없다. 코흘리개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찐 사랑의 대상으로는 아무래도 민의 남루함이 제격이었다.
물상의 교무실 책상 위에는 누군가의 몇 달치 노동력을 착취한 종이학, 학알의 유리병이 즐비했다. 책꽂이 윗단에는 꽃편지를 보관하는 전용 바구니도 보란듯이 자리했다. 아이돌답게 스캔들도 터졌다. 영어 선생님과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처음에는 질투심에 콧김을 내뿜던 아이들도, 경쟁자가 영어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장동건의 연인이 고소영이고, 원빈의 애인이 이나영이라는 사실만큼이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뉴스였다.
영어 선생님은 올해 부임한 젊은 선생님들 중 최고의 에이스였다. 학기 초 새로 부임한 선생님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교장은 영어 선생이 서울대를 과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라며 그런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고 자기가 괜히 공치사였다. 그녀는 공평성을 상실한 날의 삼신할매가,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미모와 재능을 한 군데 몰빵 해서 점지한 것 같은 인물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수업을 마친 영어와 물상이 나란히 웃으며 교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퇴근길에 단둘이 교문을 나서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들도 속출했다. 분명 데이트 중인 연인의 분위기였다면서, 파파라치들은 현장의 생생한 느낌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문 시간에 선남선녀라는 고사성어를 배웠을 때, 나는 자동으로 물상과 영어를 떠올렸다.
민 선생은 몇 분 뒤에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수업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교실에 들어와서는 마치 자기 몸이 출석부라도 되는 것처럼, 상체를 절반으로 접어 교탁에 붙였다. 한참을 꼼짝도 안 해서 혹시 죽은 거 아니냐며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할 때쯤, 익살맞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아아아 죽을 것 같아. 도시락으로 콩나물국 싸온 놈 없냐?
여학생들에게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 선생은 한 명도 없었기에 아이들은 다 같이 빵 터졌다. 뭐야, 은근 재밌잖아.
교실에서 해장국을 찾다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냐며, 선미는 호들갑이었다. (선미는 낭만의 뜻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민 선생의 색다른 매력을 인정하는 무리가 조금씩 늘어났고 그럴수록 연욱은 초조해졌다. 호사가의 오타쿠적 취향이 대중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민은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없는 시를 한편씩 가르쳐주기도 하고, 칠판 가득 낯선 노랫말을 적고는 직접 노래를 불러줄 때도 있었다. 김수영, 백기완, 노찾사, 김민기... 그가 적은 언어들은 난해했고 노랫말은 온통 수상했지만,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만큼은 일품이었다. 술이 안 깬다면서 낄낄거릴 때와는 달리, 노래를 불러줄 때의 그는 어쩐지 비장하고 서글펐다.
잘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이 함부로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가사에 정성을 담았다. 정성스러움은 그의 필살기였다. 그는 한순간 번뜩이며 품 속에서 그것을 꺼냈다. 정성스러움. 그 칼날을 휘두르는 순간, 키득거리고 퍼득거리던 깃털 같은 웃음들이 허공에서 낙하했고, 시간은 일 초 일 초 악센트를 찍으며 단호하게 흘렀다.
그는 종종 그런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학생이 그를 부르면, 75도 각도로 기울어진 주전자에서 물이 쏟아지듯, 부른 자의 얼굴에 그의 온전한 관심이 와르르 쏠렸다. 몸의 모든 촉수를 열고 전격적으로 몰입한 표정. 어떤 선생도, 고작 학생 나부랭이의 호출에 그런 정성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감수성 예민한 연욱도 언젠가 그 시선에 피폭된 이후 한 순간에 저 지경이 된 것이다.
연욱의 브리핑은 불현듯 끝났다. 가을 시화전 다음 주. 갑자기 민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연욱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은 내가 더 컸다. 나는 그와 통성명을 한 적이 없는 800명 익명의 전교생 중 하나였다. 그런데 왜?
민은 내가 제출한 시를 보고 있었다.
- 이거 니가 썼니?
- (질문의 의도를 몰라 우물쭈물) 네...
- 잘 썼다... 슬프네...
가슴에 사과가 툭 떨어졌다. 내 슬픔을 알아준 첫 번째 어른이었다. 시화전 주제는 '가을'이었다. 수억 배 밝은 빛을 발산하지만 곧이어 소멸이 찾아오는 초신성처럼, 가장 풍요로운 계절인 가을이 지나면, 모든 사물이 예정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하룻강아지의 허세 넘치는 비관이 흥건한 시였다. 할머니와 다섯째 고모가 별것도 아닌 일로 합세해서 어린 동생을 때렸던 날, 방에 숨어서 아무렇게나 써 내려간 글이었다.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막내 고모는 할머니의 영원한 막둥이였고, 할머니에게 우리 자매는 그저 탐탁지 않은 며느리의 딸들이었다. 막내 고모만 먹을 수 있는 간식에 손을 댄 죄로, 그날 열 살 동생은 할머니에게 매를 맞았다. 무언가 꾸역꾸역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애꿎은 원고지만 연필로 난자하는 중이었다. 학교에서 내일까지 시 한편씩 제출하라는 숙제를 주었지만, 그럴 정신상태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시라고는 써본 적도 없었다. 입으로, 머리로는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뱉었는데, 진화된 번역 앱처럼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다른 글을 적었다.
민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내 눈을 곰곰이 바라보았다. 내 손이 적은 글을 거슬러 올라, 내 입에, 내 머릿속에 고였던 그 슬픔을 가늠하려는 듯이.
연욱이 피폭되었던 그것이 나에게 오고 있었다. 이건 곤란한데. 심장이 이렇게 나대면 안 되는데, 상대가 민이라면 더더욱 곤란한데.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정신이 나간 채 휘청이며 교실로 돌아왔다. 연욱의 호기심이 복도까지 마중을 나왔다. 뭐래? 태연함을 가장하는 연욱의 목소리에 어색함이 가득했다. 그냥, 시 잘 썼다고... 태연함을 가장하는 내 목소리가,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흔들렸다.
연욱은 혼자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 시작했다. 나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 민은 복도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화장실 가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 불러 달려가면, 고작 어디 가느냐는 뻔한 질문을 하곤 했다. 시 쓴 거 또 없냐고도 물었다. 그럴 때마다 그 관심의 시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연욱의 눈치가 보여서 주변을 살피면서도, 내 안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겨났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연욱의 병은 나에게 옮아왔다. 민의 모든 말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가 숙취에 찌든 얼굴로 수업에 들어오면, 시인의 고뇌라는 것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 감동했다.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잘 되고 있냐고 묻는 것도, 어쩌면 시는 핑계일 뿐 사실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라고 해석했다. 민은 수업시간에 나의 시를 아이들에게 낭송하고, 한용운이나 김소월의 시처럼 해석까지 해주었다. 오올~~ 색다른 사건에 신이 난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내 등에 인디안밥을 먹였다. 이제부터 나를 만해 김용운이라 부르겠다고 설레발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연욱은 자물쇠가 달린 다이어리를 꺼내어 잠자코 낙서만 했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 나눌 얘기가 없었다.
연욱과 나는 어이없는 일로 다시 친해졌다. 겨울방학을 얼마 앞두고 학교에서 두 명의 선생님이 동시에 깜짝 발표를 했다. 방학 동안 둘이 결혼식을 한다는 것이다. 민과 영어였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버리고 걷기 시작했다. 40분도 부족할 만큼 쌓인 얘기가 많았다.
-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얏!!
영화 속에서 김하늘이 권상우에게 깔끔하게 선을 긋는 이 유명한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아직도 가끔 헛웃음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