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안다성을 좋아했다.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 두 노래는 아빠의 페이버릿 레퍼토리였다. 아빠는 종종 셋째 고모의 풍금 반주에 맞추어 안다성의 노래를 불렀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던 아빠가 이렇게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면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었다. 풍금 페달을 밟느라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드는 고모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 아빠의 옆모습은 르누아르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빠는 깜짝 놀랄 만큼 노래를 잘했다. 아빠가 노래를 시작하면, 마루에서 놀던 나도 꼼지락거리던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익숙한 전주가 울리고 노래의 첫 소절이 들려오면, 태어나 몇 번 가본 적 없는 바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겨울 백사장에 흰 파도가 밀려오는 풍경. 그 노래 때문에 그때 바다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장소였다.
나는 ‘사랑이 메아리칠 때’를 더 좋아했다.
- 바람이 불면 언덕에 올라 노래를 띄우리라, 그대 창까지. 달 밝은 밤은 호수에 나가 가만히 말하리라. 못 잊는다고. 못 잊는다고. 아아아 아아아아 진정 이토록 못 잊을 줄은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친다.
꽃피는 봄엔 강변에 나가 꽃잎을 띄우리라. 그대 집까지. 가을밤에는 기러기 편에 소식을 보내리라. 사무친 사연, 사무친 사연, 아아아 아아아아 진정 이토록 사무칠 줄은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친다
노래에 빠져들면 어느새 내 마음은 밤의 산기슭에 서있다. 바람 소리를 닮은 외로움이 달빛 은근한 골짜기를 휑한 메아리처럼 떠돌았다, 사무친다,는 어휘는 사무치게도 아름다워 노래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괜히 울고 싶었다. 노랫말 속의 사내는 당연히 아빠가 아니겠지만, 가슴 저 아래에서 탄식처럼 터져나오는 아아아아아 때문에 아빠의 모습은 진심으로 고독해 보였다. 아빠의 목소리는 안다성만큼이나 슬프고 감미로웠다. 슬픔이 달콤할 수 있다는 역설적 감정은 어린 나이에 수긍하기 난해한 것이었지만, 아빠와 고모가 풍금 앞에 서면 내 마음은 미리 산마루 어디로 마중을 나가 손님처럼 찾아올 슬픔을 기다렸다.
성장은 밤의 언덕을 더듬으며 홀로 산등성이에 오르는 과정이다. 다리는 팍팍하고, 손은 상처투성이다. 겨우 익숙해지면 어느새 낯선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느 길이나 함정을 숨긴 듯 수상했지만 돌아가거나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도, 사람도, 공부도 다 벽이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나는 남들이 알고 있는 것을 혼자 몰라 허둥댈 때가 많았다.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니지만, 모르면 손발이 피곤해지는 백만 개의 요령들이 나에게는 전무했다. 수시로 성난 파도가 몰아치고, 미친 바람이 메아리치는 내 마음도 문제였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어쩌자고 나를 맏이로 낳아 주었을까. 이국의 산속에 버려진 것처럼, 암중의 모색은 늘 두렵고 불안했다.
친한 친구들 중 맏이는 없었다. 내게는 하등 도움될 것 없는 여동생만 하나 혹처럼 딸려 있을 뿐이다. 민정은 4남매 중 막내, 진아는 오빠가 하나, 경희는 다섯 자매 중 셋째 딸, 심지어 재숙은 위로 언니가 여섯 명이나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늘 설명할 수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덩치들 앞에서도 큰 소리를 땅땅 치는 꼬맹이들의 호기로움. 누구랑 싸움이 붙어도 여차하면 달려가 억울함을 일러바칠 뒷배를 품고 살아온 자들. 뭐든 기댈 사람을 끼고 산다는 것은 대체 얼마나 편리한 삶일까.
정보가 호흡기 질환처럼 오로지 입에서 입으로만 전파되던 시절이었다. 정보는 힘이었고, 힘은 아이들 사이에서 인력으로 작동해 그들을 중심으로 무리가 생겨났다. 정보력은 특히 유행이나 유희, 유흥의 영역에서 더 독보적 권력을 휘둘렀다. 정보가 부족한 자는 반에서 주로 얼빵이의 포지션을 담당했다. 자비로운 구원자가 먼저 그 얼빵이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한, 촌닭 신분에서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유행이나 트렌드가 양궁의 과녁과 같다면, 나는 그 동심원의 중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거주했다. 변방의 촌닭을 다운타운가로 이끈 구원자는 진아였다. 당시 용산구 소재 여고생들에게 최대의 핫플레이스는 숙대 앞이었다. 시험이 끝난 날이나, 토요일 오후만 되면 인근 학교의 중고생들이 죄다 거기로 바글바글 몰렸다. 고작해야 큰길에서 숙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작은 언덕길이 전부였지만, 거기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모든 것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진아는 짝다리를 짚고 껌을 쫙쫙 씹으며 내게 따라오라고 했다. 숙대 앞으로 출동. 진아는 그냥 숨만 쉬어도 깡다구가 넘치고 날티가 좔좔 흐르는 인상인데, 정작 마음은 무지하게 여리고 착했다. 그날 나는 와플이라는 유럽풍의 이름을 지닌 그것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팥빙수와 와플이 주메뉴인 숙대 앞의 명소 와플하우스. 그 정직한 이름과 걸맞게 와플이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다. 가게 한쪽에서는 누가 보아도 부녀지간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이 생긴 아저씨와 언니가 달인의 속도로 와플을 구워댔다. 언니의 엄마이자 아저씨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아주머니는 번개맨처럼 날쌔게 얼음을 갈면서 동시에 한손으로는 음식을 서빙했다. 실로 놀라운 가게였다. 사과잼과 버터를 듬뿍 바른 와플과, 토핑을 아끼지 않는 팥빙수, 딸기빙수는 (경양식집에서 먹어본 파르페와 더불어) 빈곤했던 그 당시 내가 경험한 가장 현란한 별식이었다.
와플하우스 옆에는 삼강하우스, 거기서 길을 건너면 까치네. 삼강하우스와 까치네는 분식집이다. 이 세 가게는 삼각구도를 이루며,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을 버뮤다의 트라이앵글처럼 모조리 빨아들였다. 진아는 까치네의 단골이었다. 우리는 주로 짬뽕 라면을 주문했다. 이 세상에 라면은 신라면과 안성탕면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내게, 가늘게 채 썬 물오징어가 송송 들어간 그 라면은, 이름만 라면일 뿐 다른 세상에서 만들어진 천상의 요리였다.
까치네는 이솝우화 풍의 깜찍한 상호와 달리 웨스턴바처럼 조명이 어두웠다. 나무 테이블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탁자 위에는 빈자리 없이 낙서가 빼곡해서 어쩐지 세기말적 퇴폐미까지 물씬 풍겼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그 테이블에 가방을 툭 던지면,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며 라면을 집어 든 젓가락에 허세가 들어찼다.
먹고 나면 다음 순서는 옷 구경. 진아는 부잣집 딸도 아니었는데 늘 돈이 많았다. 내게 먹을 것도 잘 사주고, 유행하는 옷도 척척 샀다. 진아에게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그토록 찾기 어렵다는) 여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오빠가 있었다. 진아의 물주는 오빠였다. 진아의 오빠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지는 않지만, 왠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것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가죽잠바와 찡이 박힌 구두에서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가 뿜어 나왔는데, 여동생한테만은 어이없게도 살뜰했다. 우리가 진아 방에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는 날이면, 집에 돌아온 오빠가 ‘오다 주웠다’ 식의 멘트를 날리고는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어디 오빠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며 농담처럼 진아에게 눈을 흘겼지만, 오빠 없는 서러움만은 진심이었다.
민정의 오빠는 더 가관이었다. 민정은 4남매의 막내였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 둘은 민정을 딸처럼 보살폈고, 오빠는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민정을 애지중지했다. 살성이 단단하고 태생이 근육질인 민정은 걸핏하면 제 떡대를 과시했다. 내 알통 좀 눌러보라고, 정말 돌덩이 같지 않냐고, 민정이 우람한 팔뚝에 힘을 주면, 우리는 낄낄거리며 '소도 때려잡겠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런 민정도 자기 오빠에게만은 완벽한 엄지공주였다. 수학여행이라도 가면 부모님 효자손은 안 사 와도 민정의 열쇠고리는 꼭 챙겨 올 정도로 엄지공주에 대한 오빠의 사랑은 유별났다.
김동화 만화를 볼 때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완벽한 남주의 설정에 코웃음을 치곤 했는데, 민정의 오빠를 알고 나서는 그런 만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길 지경이었다. 여동생을 대한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비현실인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치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것처럼 당연하게 연세대 기계공학과로 진학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하향지원이어서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민정이 전하는 오빠의 합격후기였다. 끝이 아니다. 민정의 오빠는 당시 내가 아는 민간인 중 가장 미남이었다. 키도 크고, 피부에는 여드름이 다녀간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금쪽처럼 아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와 매일 붙어 다니던 민정이었다.
우라지게도, 똑똑한 형제자매를 둔 친구들은 주변에 많았다. 진에게는 학창 시절 내내 명성을 흩뿌리다가, 결국 명성에 걸맞게 서울대에 진학한 (응팔의 성보라와 캐릭터가 겹치는) 언니가 있었다. 아무거나 물어봐도 그 자리에서 대답해줄 수 있는 입주과외 선생이 곁에 있으면 공부가 얼마나 쉬울까. 몰라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기에, 내 지식의 산에는 미제사건과도 같은 의혹들이 처박아둔 빨래처럼 구석구석 쌓여 있었다. 똑같은 교과서를 여러 번 읽는다고 새로운 단서가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얼기설기 꿰어 맞춘 내 지식들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젠가와 비슷했다. 서울대생과 동거하는 일상은 얼마나 기능적인가. 정석의 연습문제에서 번번이 막힐 때마다 내 부러움도 폭발 직전으로 부풀어 올랐다.
류의 언니는 디자이너를 꿈꾸는 의류학도였는데, 류를 실습대상으로 예쁜 옷을 많이 만들었다. 7 공주 집 막내였던 채는 6명이나 되는 언니들로부터 전공과 성격에 따라 다양한 복지를 골라 누렸다. 뭐든 처음으로 겪는 일이라 당황하는 것조차 버릇이 될 지경인 나와 달리, 그들은 표정은 어쩐지 늘 평화로웠다.
스마트폰이 없던 일상에는 미세한 자포자기가 오래된 반려처럼 동행했다. 크고 작은 물음표가 불쑥 머리를 내밀곤 했지만, 어차피 해소할 길은 없었기에 대부분 알아서 소멸했다. 집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모든 말을 화난 목소리로 내뱉는 실향의 할머니와 일하러 나간 엄마 대신 종일 내 뒤만 쫓아다니던 다섯 살 어린 동생.
아침마다 엄마는 당부했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엄마가 올 때까지 동생 좀 잘 보살피라고. 그럼 나는 누가 보살펴주냐고 묻고 싶은 날이 많았지만, 그 말은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린 깜냥에도 나보다는 피곤에 찌든 엄마가 더 보살핌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든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책임감'이라는 관념이 실체를 가진 물질처럼 어깨에 내려앉을 때가 있다. 모종의 절망이 찰라처럼 스쳐간다. 아직 나하나도 건사하기 버거운데, 내 욕심과도 정산이 덜 끝났는데...
그런 날은 아빠가 생각났다. 풍금 반주에 맞춰 안다성의 노래를 부르던 날의 아빠. 아빠는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되는 여동생을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고 그 오랜 세월을 버텨냈다.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경제활동을 접고, 부양의 무게를 젊은 아빠에게 상속했다. 어쩌면 아빠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을 지 모른다.
자신의 노동이 어째서 제 자식이 아니라, 부모의 자식을 위해 소모되어야 하는지. 젖도 떼지 못한 아이를 남겨두고 젊은 아내가 새벽부터 우윳값을 벌러 나갈 때, 왜 젊고 힘센 할아버지는 동네 복덕방에서 장기나 두며 종일 여유로운지. 당연한 듯 아들의 월급봉투를 챙기는 할머니가 남편에게는 한 마디 푸념조차 없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아빠에게도 해답을 검색할 구글이나 지식in이 필요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때의 아빠는 아직 마흔을 넘기지 않은 청춘이었다. 아직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을 나이.
말을 잊은 사람처럼 며칠을 침묵 속에 살다가도, 술 한 잔에 다른 사람처럼 웃고 노래하던 아빠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사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이질적이었다. 그 생경함이 어색했기에, 나는 그에게 끝내 다정한 딸은 되어주지 못했다.
그 둘은 결국 하나라는 것,
무겁게 입을 다문 그도,
미성으로 슬픔을 노래하던 그도,
육중한 수레를 끌며 수풀을 헤쳐가던 젊은 남자도,
외로움이, 자유가, 동경이 메아리치는 골짜기에서 잠시 일탈을 꿈꾸었을 누군가도,
아무도 없는 바다 위에 홀로 누운 것처럼 막막했을 젊은 날의 내 아버지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