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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것

언제까지나 사춘기

by 명랑도리



시골집은 여러 모로 어리둥절한 곳이었다. 누추하다는 점만 같을 뿐 서울 우리 집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치명적으로 못마땅한 점도 있었고, 끝내주게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뭐니뭐니해도 변소였다. 당대 최고의 오컬트 물이었던 ‘전설의 고향’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였다. 검은 동양화를 배경으로 '傳說의 故鄕'이라는 타이틀이 흘림채로 등장하면 벌써부터 심장이 쫄깃해졌다. 전설의 고향과 함께 유년을 보낸 자들에게 변소는 자동으로 귀신과 연결되는 공간이다.

정열을 상징하는 불처럼, 꿈을 상징하는 별처럼, 탄생을 상징하는 물처럼, 변소는 귀신의 원형적 상징이었다. 빨간 종이를 줄까, 하얀 종이를 줄까, 극한 상황에서도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주던 그녀들의 (아무래도 가장 클래식한 귀신은 긴 생머리에 소복 차림이라는 편견의 작용) 공간이 바로 변소였다.


출처 - 매일신문


시골의 변소는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일단 위치부터가 그랬다. 신호가 오면 신발을 신고, 앞마당을 가로질러, 소와 개를 거쳐 뒷마당까지 질주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어린애들의 배설기관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는 설계였다.


하지만 지리적 열악함은 다른 조건에 비하면 문제 축에도 들지 않았다. 일단 거기는 문이 없었다. 문이 없으니 당연히 잠금장치도 없었고 잠금장치가 없으니, 타인의 침범에 대한 방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변소는 돌담으로 지어진 움막 같은 곳이었는데, 입구에는 문대신 가마니가 걸려 외부에 대한 노출을 요식적으로 막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굵은 돌멩이를 쌓아 만든 벽은 돌 사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마음만 먹으면 굳이 돌 틈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고도 밖에서 얼마든지 내부인의 엉덩이를 훔쳐볼 수 있는 구조였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행위에 대한 보안이 이토록 허술하다니!


어린 나의 깜냥에도 이건 아니지 않냐는 본능적 거부감이 절규하고 있었다. 변기 따위는 없다. 평지보다 조금 높은 두 개의 발판을 흙으로 다져 올리고, 그 위에 양발을 놓고 맨 땅에 배설물을 투척하는 것이다. 변소 한쪽 벽에는 쌀겨나 지푸라기, 흙 등이 섞인 물질이 산을 이루고 있었는데, 볼일을 보고 나면 삽으로 그것을 퍼서 변과 섞어 반대편 벽으로 치웠다. 아직 대변이 섞이지 않은 물질과, 이미 대변과 섞인 물질이, 발판을 중심으로 양쪽에 위치하는, 선형의 시스템을 장착한 곳이었다. 흙에서 탄생한 인간이 자신의 유기물을 다시 흙으로 돌려보낸다는 고매한 순환적 철학이 실천되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곳이 두려운 또 다른 이유는 마음먹고 집중력만 발휘한다면 타인의 배설물을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유난히 비위가 약해 멀미도 심했던 나는 그곳에 들어가면서부터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리며, 행여 무심결에라도 어떤 또렷한 장면이 포착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사방으로 환기가 가능한 그곳에는 희미한 지푸라기와 흙냄새만 맴돌았지만, 긴장된 나의 신경은 후각적 자극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숨도 쉬지 않으려 호흡까지 조절했다.


문제는 대장의 신호가 밤낮을 가릴 만큼 사려 깊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밤의 변소.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처음, 이모만 함께 한다면 천군만마를 등에 업은 장군처럼 늠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자신감으로 밤의 변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럴 수가.

플래시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 속에 엄지 손가락만 한 빨간 전구가 아슬아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하필, 빨간 전구일까.

전구는 사물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조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발판에 앉아 누군가의 눈깔을 닮은 빨간빛을 뒤통수에 두고 검게 너울거리는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볼일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태를 파악하자 변의는 냉큼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진짜 괜찮겠냐는 이모의 미심쩍은 질문을 무시하며, 나는 황급히 돌아섰다. 그곳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붉은 조명을 배경으로 천정 같은 곳에서 머리부터 툭 떨어지곤 하던 그녀들의 거주지로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그 공간과의 사투. 하지만 밤똥은 수시로 나를 찾아왔고, 그걸 참아내기에 두 달은 너무 긴 시간이었기에... 나는 결국 두려움에 몸을 맡겼다. 피할 수 없으니 맞서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으니, 그냥 맘껏 두려워하기로 한 것.

문밖의 이모를 백번씩 불러가며, 나는 똥을 쌀 테니, 이모는 떡을, 아니 노래를 부르라고 떼를 쓰면서, 뒷골이 당기는 기분을 온몸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낮,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날 할아버지는 큰 삼태기를 가져와 변소 한벽에 쌓인 범벅을 담았다. 그리고는 한 번의 찡그림조차 없이 (오히려 소중한 것을 다루듯), 할아버지는 그것들을 지게에 척척 담아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밝은 곳에서 만난 그것들은 그저 흙무더미에 불과할 뿐 의외로 더럽지도, 두렵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점점 견딜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금 더 키가 큰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똥꿈을 꿨다며 복권을 사는 아빠의 기분이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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