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은 여러 모로 어리둥절한 곳이었다. 남루하다는 점만 같을 뿐 서울 우리 집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변소는 치명적으로 못마땅했지만, 끝내주게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다. 부엌이었다.
좁은 서울 집에서는 열한 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한집에 살았다. 우리 집은 증조할머니까지 4대가 모여사는 대가족 중의 왕대가족이었는데, (고모만 무려 네 명!) 그에 반해 집도 작고, 방도 적었다. 식구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손바닥만 한 공간 안에서 요령껏 운신했다. 역시나 좁아터진 부엌에서는 합쳐봐야 세 개밖에 안 되는 불구멍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할머니와 엄마가 열한 식구의 끼니를 준비했다.
늘 공기는 연탄가스와 반찬 냄새가 섞여 고약했고, 식구들이 내놓은 그릇들로 좁은 개수대는 항상 어지러웠다. 손이 작았던 할머니는 무슨 음식이든 모자라게 만들었다. 돈 버는 사람은 아빠와 엄마뿐이었기에, 빈곤한 찬거리 하나도, 길고 긴 흥정 끝에 최저가로 최소 단위만 구매했다.
작은 냄비에 조린 감자 몇 알이, 열한 명의 한 끼 반찬이 되었다. 감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고기도 아닌데, 고기만큼 맛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반찬의 영예를 차지했다기에는 당시 내가 먹어본 음식의 종류가 미천했을 것이다. 어차피 자주 먹을 수 없는 고기는 반찬이라기보다 별식에 가까워 순위 밖에 존재했고, 계란은 몇 알로 온식구에게 은혜를 고루 베풀려니 국이나 지단처럼 다른 음식을 빛나게 만드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본연의 풍미를 간직한 채 밥상에 오른 반찬 중 감자는 덴뿌라(할머니는 어묵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 메뉴였다.
감자조림이 밥상에 올라오면 나는 재빨리 상에 앉은 사람의 숫자로 감자의 총량를 나눴다. 나에게 허용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하고, 딱 그 정도만 먹는 것이다. 언젠가 덴뿌라 조림에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었다. 간식 없는 유년은 늘 배가 고팠다. 허기로 쓰러지기 직전 저녁상에 올라온 덴뿌라 조림에 꽂힌 나는 그만 식탐의 마귀에 영혼을 팔아버렸다, 홀린 듯이 그것만을 집중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 할머니의 벼락같은 호통이 날아왔고, 제 입만 안다는 치욕스러운 욕설에, 치사하게 먹는 걸로 혼난 서러움이 더해져, 채 삼기지 못한 밥을 입에 문 채 한참이나 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그다음부터는 감자조림과 같은 그날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치면, 자동반사처럼 내게 허락된 할당량을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색적 레시피가 넘쳐나고 음식물 낭비가 이슈가 될 정도로 사정이 달라진 지금까지도, 난 감자조림만 보면 무턱대고 설렌다.
서울의 부엌은 그렇게 누추하고 옹색했다.
그에 반해 외갓집의 부엌은 터무니없이 광활했다.
일단 부뚜막 한가운데에 거대한 가마솥이 두 개나 걸려 있었다. 할거하는 군웅들을 제압한 제왕 부부처럼, 공간의 중심을 차지한 한쌍의 무쇠솥에는 재료 불문, 자신을 거쳐간 어떤 음식도 가볍게 내놓지 않겠다는 권위가 서려있었다.
부엌은 양쪽으로 문이 뚫렸는데, 뒷문으로 나가면 우물이 있어 널찍한 우물가가 준비대와 개수대 역할을 했다. 솥 하나에는 늘 물이 끓고 있어 그 물로 음식도 만들고, 세수도 했다. 다른 솥 하나에는 밥도 짓고 가끔 국도 끓였다. 마지막으로 아궁이에서 잘 달궈진 숯을 골라 작은 화로에 옮기고는 거기에 냄비나 프라이팬을 올렸다.
나는 한풀이하듯 이모에게 매일 감자조림을 해달라고 졸랐다. 이모는 진짜로 겨우 감자만 조려주면 되는 거냐며, 반찬 걱정 안 해도 되고 아주 좋다면서, 정말 매일 감자를 조려줬다. 이곳에 감자는 흔했다. 감자뿐 아니라, 옥수수도, 고구마도, 서울에서 눈치가 보여 식탐을 경계하던 모든 것들이 지천에 널렸다. 할아버지가 읍내에서 사 온 김 한 톳이 더해져 식단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요리는 내가 온전히 반해버린 그 황홀한 장작불 위에서 탄생했다.
외갓집에서 끝내주게 마음에 드는 것 중 압도적 1위는 바로 장작불이었다. 할아버지는 겨울 내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오셨다. 장작은 시골집 담벼락을 따라 여기저기에 쌓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새벽밥을 하기 전에도 이모는 피곤한 낯빛으로 아궁이에 장작을 지폈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모를 대신해 아궁이를 맡겨달라고 성화를 부렸는데, 이모는 입으로는 위험해서 안 된다고 만류하면서 아궁이 앞의 깔판을 내 엉덩이 쪽으로 슬쩍 내밀곤 했다.
겨울산에서 막 도착한 나무들은 과묵하고 우울했다. 눈에 젖은 장작을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붙은 장작을 그 아래 괴면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고 자란 산속의 기억에 침잠한 듯 젖은 나무는 달려드는 불길을 외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궁이에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고 나면, 마침내 장작은 수증기로 자신을 떠나가는 수액과 결별한 채 조금씩 불길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한번 불이 붙고 나면 나무는 맹렬한 화염을 뿜어내며 주변에 열과 빛을 나른다. 절정의 순간에 그는 다시 제 몸 위에서 또 다른 장작을 말리고는, 검은 숯으로 화로에 담겨, 종국에는 하얀 재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슬픈 소멸의 제의가 끝나고 나면 그 맛난 감자조림이 나에게 왔다.
양 볼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아궁이를 들여다 보아도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았다. 오직 방학 때만 만끽할 수 있는 극강의 오락이 불장난이다. 아궁이로 둘러싸인 방화의 요쇄 속에 장작, 삭정이, 종이, 풀, 겨, 지푸라기와 같은 온갖 가연성 물질들을 던져 넣고는 각 재료들이 불과 만나 벌이는 개성 넘치는 불꽃쇼를 관람하다 보면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몰랐다. 이래서 불구경이 동서고금의 다른 현란한 유흥을 재끼고 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로 손꼽히나 보다.
불이 애들에게 허용되는 곳은 오로지 외갓집뿐이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저 밤에 오줌 싼다, 는 경고만 날릴 뿐 하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매혹적인 일을 금기 없이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곳의 다른 단점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방안에서도 코가 시릴 정도로 쇠락한 집이었지만, 장작의 추억 때문에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집을 떠올리면 따뜻한 온기가 몸 안 어딘가를 데우곤 했다.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뒤져 까만 공처럼 변해버린 커다란 감자를 꺼내, 고스란히 그것을 혼자 차지할 때는 가슴 뻐근한 충만함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