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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헷세

언제까지나 사춘기

by 명랑도리



시골의 시간은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흘렀다. 아무리 살아도, 좀처럼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따분함에 심신을 상실할 지경이었다.

나는 우리에 갇힌 늑대처럼 좁은 방안을 하릴없이 왕복했다.

하다 하다 광도 뒤졌다. 거기도 별 것이 없었다.

종자가 담긴 자루나 수확한 곡식, 벽에 걸려 말라가는 나물, 곰팡이 핀 메주... 헛간을 차지한 사물들은 모두 ‘애들은 가라’며 목소리를 깔았다.


집만큼이나 늙은 차단스 서랍에는 그나마 흥미로운 것들이 좀 있었는데, (그래 봐야 짝이 안 맞는 화투, 나무로 다듬은 윷짝, 새마을 모자, 목장갑, 비사표 성냥, 양초, 반짇고리 같은 것.) 매일 일삼아 여닫다 보니 그것도 곧 매력을 잃었다.


돌연

나는 누군가의 호출에 응답하듯 그 방문 앞에 당도했다.

여태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걸치고 있던 투명망토가 효력을 잃은듯, 그 방이 갑자기 나타났다.

툇마루를 지나 집의 후미진 꼭지점에 방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필요한 공간들이 레고처럼 여기저기 덧붙여진 시골집에서 그 방은 지금껏 내 눈을 피해 잘도 숨어 있었다.

냉기와 먼지가 야합한 방에는 괴괴한 연막이 자욱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면서 나는, 호기심과 목숨을 맞바꾸는 호러 영화 속 멍텅구리들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은 오래된 공부방이었다.

먼지 쌓인 책상을 중심으로 의자, 책꽂이, 책가방, 화구, 제도기 같은 물건들이 무심하게 널브러졌다.

외갓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품들.

킹스크로스 역 '9와 3/4' 승강장에서 기차를 잡아탄 해리포터처럼 낯선 공간에 떨어졌다.

그제야 나는 삼촌과 이모도 한때는 학생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매일 심드렁한 표정으로 읍사무소로 출근하는 외삼촌도, 하루 종일 소처럼 일하는 이모도, 이 사물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껄떡대며, 울컥하며, 시시덕거리며, 싱숭생숭한 그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나 보니 엄마가 이미 엄마이듯, 이모도, 삼촌도 언제나 어른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때 이모의 나이가 고작 스물셋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깐 울었던가.)


무인도에서 와이파이가 터지는 스폿을 발견한 뉴요커처럼 나는 흥분했다.

거기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오래된 학용품이나 낡은 앨범, 조금만 손보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들. 그리고 책.

레오 버스카글리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제목과 작가를 읽어 보았지만 국민학생의 지력으로 도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단행본 전권을 발견했을 때는 이 무시무시한 무료함과 결별할 수 있다는 희망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나는 책꽂이 끄트머리에서 나를 이 곳으로 유인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드디어 발견한다.

데미안.

동화의 세계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제목만으로도 대강의 서사를 예상할 수 있었던 동화책들과 달리 이건 도무지 무엇에 대한 이야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강렬한 만화책의 유혹을 물리치고 데미안에 손을 뻗은 것은 제목이 발산하는 신비감 때문이었다.

이미지 - 민음사

첫 장을 펼치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그 방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계가 갑자기 둘로 쪼개지는 듯한 기분.

이명과 현기증마저 생겼다.

아침에 방에 들어갔는데, 이미 늦은 오후.


집 밖으로 무작정 나선 것은 실종된 나를 찾느라 종일 고생한 이모의 잔소리를 피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견딜 수 없는 감정인데, 설명하기가 어려운...

이다음에 실연이나 상실, 혹은 역설적이게도 명작과 만났을 때 무방비로 겪게 되는 내 ‘가슴앓이’의 효시였다.


그 외딴 방에 머무는 긴 하루 동안 밖에는 눈이 내렸다.

잠정 휴업에 돌입한 쇼핑몰처럼 모든 것이 흰 천에 덮였다.

그래서 세상이 더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나는 눈 쌓인 길을 걸어 저수지에 도착했다.

그나마 떠오르는 곳이 거기였다.

호젓한 곳에서 문득 경이로운 빛을 반사하던 겨울날의 얼음 저수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방죽 위에 올라가 보니, 얼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아, 거기에는 하얀 눈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검은 산은 초록을 잃고 밤을 맞을 채비를 하는 중.

소음도 사라졌다.

눈은 성능 좋은 방음제였고, 세상은 절대적 묵음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보다 더 완벽한 고요는 경험한 적이 없다.

심장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울림이 살가죽까지 밀려왔다.

소리는 사라지는 방식으로도 울림을 남겼다.

눈밭에 한두 발을 떼어놓자, 고슬고슬하게 쌓인 눈송이들이 하나로 겹쳐지는 뽀드득 소리가 났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가락에 힘을 주다가 그만 제대로 나뒹굴었다.

나는 일어나려는 의지를 접었다.

눈 속에 한참을 누웠다가 저수지 가운데로 눈사람처럼 굴렀다.


저녁 하늘에 순도 높은 고독이 깔리는 중이었다.

불현듯 눈물이 흘렀다.

조용히 울다가, 조금 흐느껴 보다가, 나중에는 부러 엉엉 소리도 냈다.

내가 소리를 멈추니 세상이 다시 침묵했다.

건너 산에서 시작된 찬 바람이 가슴 어딘가를 그대로 관통하고 지나간 듯, 심장 왼쪽 한켠이 시리고 아팠다.

세상은 어제와 달랐고, 나는 모든 것이 시큰둥했다.


동그란 저수지 한가운데 누워 나는 어두운 서울집의 엄마와 검은 숲의 헤세를 생각했다.

둘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지만, 나를 슬프게 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했다.

다음 날 일찍 난 서울로 돌아갔다.

엄마는 별안간 변덕을 부리는 나를 데리러 올 형편이 안 되었다.

방학은 아직 꽤 남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종이에 메모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홀로 긴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멀미에 시달리는 여자 아이 혼자 감당하기에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내 안에는 이미 그걸 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가 생겼다.


1985년. 1월.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왔다.


루카치 식으로 말하자면, 길은 끝났고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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