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한 그릇의 온기
내가 한국 가요 — 지금은 케이팝이라 불리는 — 에 눈을 뜬 건 아마도 네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김원준의 화려한 무대와 가요톱텐에서 박진영의 파격적인 비닐 바지 데뷔 무대를 지켜보던 아이였다. 엄마 손을 잡고 최신가요 믹스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가던 그 아이는 카세트 플레이어로 쉬지 않고 한국 가요를 들었다. 공부할 때조차 빠른 리듬의 곡을 들어야 스퍼트가 나던 나는,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도 아이유의 '분홍신'을 들으며 막판 스퍼트를 올리곤 했다. 이 습관은 일을 하는 지금도 남아있다.
싱가포르로 건너온 뒤 잠시 한국 가요와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타지에서 '한류'와 '케이팝'의 위상을 실감하며 다시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에게는 익숙했던 아이돌의 무대가 이곳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경이롭게 비치는지 목격하며, 나 또한 외국인의 시선으로 케이팝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싱가포르의 일상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고 노래하는 이들을 보는 것은 짜릿한 구원이었다. 이건 한국에 살 때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첫 번째 회사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의 바람이 불어 닥쳐 친했던 동료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 마른 오징어보다 더 바짝 말라가던 나의 일상을 적셔준 것은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통해 알게 된 그룹 '뉴이스트'였다. 네 살 때부터 시작된 가요 인생이었지만, 이토록 적극적인 '덕질'은 처음이었다. 나는 카페 가입을 넘어 SNS에서도 소소하게 덕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SNS에서만 소통하던 싱가포르 팬에게 연락을 건넸다. 그 친구를 통해 구한 콘서트 티켓을 받기 위해 오차드의 어느 카페에서 가졌던 생애 첫 '덕후 모임'. 어색함도 잠시, 좁은 싱가포르의 덕후 세계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팬클럽 활동이 아니었다. 우리는 싱가포르와 해외 콘서트를 함께 다녔고, 싱가포르 팬들이 여는 아이돌 이벤트에도 꼬박꼬박 참여하였다. 대화의 9할은 아이돌 이야기였지만, 나머지 1할의 일상이 쌓여 우리는 '덕질 메이트'를 넘어 진정한 친구가 되어갔다. 이런 생활을 영상으로 남기려고 유튜브에 브이로그를 기록하기도 했을 만큼 나의 일상은 활기를 되찾았다.
얼마나 돈독해졌는지,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거나 운동 센터에 등록할 때 쓰는 '긴급 연락처'란에 나는 주저 없이 한 친구의 번호를 적는다.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도 혹시나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이 친구에게 가장 먼저 연락하라고 번호를 넘겨주었을 정도다.
싱가포르에 와서 맞이한 첫 생일을 제외하고, 나는 2018년과 2019년의 생일을 혼자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싱가포르에 와서 친해진 동료들, 나에겐 전부였던 친구들이 떠난 자리엔 지독한 외로움만 남았었다. 그러다 이 덕질 친구들을 만나고 나의 주말은 이전보다 훨씬 빡빡하게 싱가포르의 맛집과 카페를 다니는 일상으로 채워졌다. 그러던 여느 때처럼 아이돌 이야기를 하러 모인 식당에서, 한 친구가 갑자기 보온도시락 통을 꺼냈다. 그 안에는 정성껏 끓인 미역국이 담겨 있었다.
"네 생일이라 처음으로 끓여봤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날 만큼 선명한 기억이다. 한국에 계신 우리 엄마는 지금도 이 친구에게 고마워하신다. 타지에서 외로워하던 딸에게 뜨끈한 국 한 그릇을 내어준 그 마음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룹은 해체했고, 지금의 나는 바쁜 회사 일로 예전만큼 열정적인 덕질을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단톡방은 여전하며,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일상을 응원한다.
언젠가 내가 좋아했던 그 아이돌을 만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고맙다고. 당신들 덕분에 나의 싱가포르 생활이 즐거웠고, 무엇보다 내 생에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내가 속상한 일이 생기거나 힘들 때면 한걸음에 달려와 줄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 사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길 망설이는 커다란 이유 중 하나도 이들과 함께하는 이 소중한 생활을 놓고 싶지 않아서다.
언제든 내 곁에 있어 주는 나의 친구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예전만큼 자주 연락하지 못해도, 너희는 여전히 나의 가장 든든한 '싱가포르 가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