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선생님 오늘 강의 너무 좋았어요. 도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선생님이라니. 그냥 선배라 불러요. “
”그래도 되나요? “
”그럼, 겨우 8살 차이 나는데 뭐. 정훈이도 선배라 불러. 그렇지? “
”아 네... “
큰 곰처럼 천천히 뒤따라오던 정훈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저음이라 덩치 있는 그의 모습에 어울렸다. 목소리 덕분에 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는데, 거기에 총각이라 여학생들에게 더 인기 있었다. 물론 노총각이지만 말이다.
”우리 교육교사 모임도 끝났고, 어디 가서 치맥이나 할까?
“ 좋죠~”
세희는 신이 나서 얼른 쫓아갔다.
키 163cm 정도 아담한 체격에 항상 긴 단발 머리를 하고 있는 세희는 경력 15년차 교사다. 목 끝까지 셔츠 단추를 채워입는 단정한 옷차림에 옅은 미소를 장착한 다정한 선생님 스타일이다. 이번에 새로 전근한 동네 교육교사 모임에 가입했다. 교육교사 모임은 주변 선생님들과 친분도 쌓고, 새로운 소식도 전해 받고 수업관련 연구나 자료조사등을 함께 하는 교사들 친목모임이자 일종의 스터디그룹이었다.
세희가 총총 걸음으로 뒤따라가며 신 난 이유는, 지금 그녀에게 선배로 칭하라 시켰던 선생님이 평소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 분은 강지연 선생님으로 전교조에서도 유명하시고, 학생들의 학습지와 시험지 연구에도 참여하시며, 후배들을 토닥이며 일일이 챙기시는 모습에 세희가 존경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여전히 박사 학위를 공부하며 육아도 하시고 대단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계신 지역 교육교사 모임에 가입을 할 수 있어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셋은 근처 호프집에 들어갔다.
“저기요~ 치맥 세트 2번 주세요. 맥주 먼저 주세요.”
“여기 혹시 학교 학생들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고등학교 선생님인 세희는 본인도 모르게 직업병이 나왔다. 비록 학생주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성년 학생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맥주를 들이키는 상황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주변을 노려보다가 강지연 선배님께 눈길이 닿았다.
강지연 선배님은 살짝 통통한 볼살에 얇은 테 안경을 쓰고, 다정한 가사 선생님 혹은 아이들을 잘 보듬어 주는 인자한 양호 선생님처럼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깐깐한 국어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엄한 편이었다. 리더쉽도 있어서 지역 교육교사 모임 스터디를 이끌었다. 세희는 전근한 이곳 지역 교육교사 모임에 가입하기 전부터 강지연 선생님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교육교사 모임에서 항상 그녀의 강연을 듣고 지도를 받아왔지만, 함께 치맥으로 다져진 이 날이 세희와 지연 선생님의 첫 사적인 만남이었다.
이후 매달 있는 교육교사 모임 후 세희와 정훈, 지연. 이 세명을 중심으로 함께 모임을 가졌다. 월급 받은 날은 정훈이 초밥에 사케를 쏘기도 했고, 가끔 세희가 삼겹살을 사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지연 선생님도 파스타에 와인을 사며 셋의 우정은 쌓여갔다.
세희는 이 모임이 좋았다. 학습 관련 뿐만 아니라 학생들 생활 지도 관련과 진상 학부모 대처법등, 혼자 끙끙댈 수 있는 고민을 타학교 선후배 교사들과 함께 나누며 배워갈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올초 어느 추운 겨울날. 그날도 역시 모임을 끝내고 셋은 옹기종기 따뜻한 전골 앞에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ㅋㅌㅋㅌ
지연의 메시지톡이 울렸다. 소리만 들어도 왠지 다급함이 느껴졌다. 지연이 들여다보니 집에서 온 문자였다.
“ 어쩌니. 우리 막내가 급히 응급실 가는 중이라네. 나 먼저 일어날게.”
“ 어머 아이가 무슨일로. 괜찮아요?”
“어 배가 아프다는데, 일단 병원 가봐야 알 거 같아. 중학생이라 잘 버틸 거야. 오늘 미안해. 둘이서 전골 다 먹고 가기. 다음에 내가 맛난 거 살게.”
“저희 걱정 마시고 얼른 아드님께 가보세요.”
“ 선배, 나중에 ㅋ톡에 상황 알려주세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정훈도 서두르는 선배의 외투를 집어주며 안부를 걱정했다.
지연이 다급히 식당을 나가자, 정훈과 세희, 두 사람만 멀뚱히 남게 되었다.
항상 셋이 어울리다가 막상 둘만 남으니 어색했다. 그 어색함을 깨기 위해 정훈이 먼저 입을 뗐다.
“세희 씨는 항상 겸손하고 남을 배려해서 좋아요. 학생들이 잘 따를 거 같아요.”
“정훈샘, 우리 말 놓기로 하지 않았나요? 우리 동갑이쟌아요.”
“아 그랬나? 그래 우리 말 놓자요 세희샘.”
“그러자...요”
2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어색하지. 세희는 혼자 한 모금 하려고 소주잔을 들었다. 그때 정훈도 잔을 들었다.
“같이 마셔. 짠 ”
정훈이 긴 팔을 뻗어 세희 손에 쥐어있는 소주잔을 탁 치고 꿀꺽 들이키더니 잔을 비웠다.
놀라 쳐다보는 세희에게 정훈은 마시라는 듯이 턱으로 잔을 가리켰다.
그렇게 둘은 별말 없이 주거니 받거니 몇 잔 기울였다. 그때 지연샘의 문자가 도착했다.
[아들 맹장이래. 큰 문제없고, 요즘 맹장은 수술도 금방이래. 걱정 마시고 다들 굿 나이트! ]
세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훈도 걱정했었는지 표정에 긴장이 풀린 듯했다. 정훈은 세희잔에 소주를 따르며 찡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정훈의 웃는 얼굴이 귀엽다.
“지연샘 안부 연락도 왔고, 우리 이제 마음 편히 달려볼까? 평소에 운동이나 등산 좋아해?”
정훈의 질문에 답을 하고 질문을 하고, 또 답을 하고. 둘은 잔을 기울이며 좋아하는 운동, 취미와 책 관련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 왜 아직 결혼 안 했는지 물어봐도 돼?”
“갑자기?”
아까부터 질문이 많던 정훈은 느닷없이 결혼 이야기를 물었다. 세희의 가슴에 훅 하고 무언가 꽂힌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일인데도 세희에게는 여전히 그 기억이 아팠다.
“응. 아니, 갑자기는 아니고. 이전부터 궁금했었어. 내가 실례를 했다면 사과할게.”
“실례는 무슨. 이 나이까지 내가 얼마나 들은 질문이겠어. 약혼자가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과 헤어지고 방황하다가 정신 차려보니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기고, 이렇게 노처녀가 되어있네? 하하..하. ”
애써 쿨한 척 이야기했지만, 취기 때문인지 끝에 웃음은 나답지 않다고 세희는 생각했다.
그런 세희를 정훈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 심정이 복잡했을 텐데 담백하게 답해줘서 대견해.”
그의 눈과 마주친 세희의 심장이 갑자기 쫄깃했다. 세희는 술기운인지 그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거 같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말이라도 꺼내야 이 분위기를 모면할 거 같았다.
“ 정훈샘은 키도 크고, 다정해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을 거 같은데 왜 여친이 없을까 궁금했어. 아니 있는데 내가 몰랐나?”
“왜? 내 여친 되어주게?”
“......?”
기습 질문에 세희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세희의 볼을 살짝 스쳤다. 그의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이 세희의 옆머리를 살짝 만졌다.
" 머리에 뭐 묻엇네."
그는 세희 머리에 묻어있던 작은 휴지조각을 떼내어 털어냈다. 조금 전 세희가 머리를 넘기다가 휴지가 붙었나 보다.
‘ 이 사람 혹시 선수인가......? 나 서른 다섯. 마흔을 앞두고 있는데 이 스침에 긴장하다니! 정신 차려! 나 서른다섯 살이란 말이다.’
스스로 다그치는데, 정훈이 말을 이어갔다.
“ 사실 몇 달 전부터 네가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였어.”
“......”
세희는 얼음땡에 걸린 얼음이 되어 버렸다.
“미안해. 술취해 고백해서. 항상 지연샘이 함께 계시니 이런 마음 전할 틈이 없었어. 우리 둘만 따로 만나보면 안 될까?”
“......”
“왜 말이 없어? 나 지금 데이트 신청한 건데......”
“ 어? 응? 어. ”
세희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이게 연륜인가. 하긴 서른다섯살이 썸을 타고 재고 따지고 그런 피곤한 순서를 거칠 시간도 에너지도 없지.
사실 그녀도 처음 그의 저음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호감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교육교사 모임의 단원으로 함께 동지애를 키우고자, 나대는 감정을 단번에 잘라내고 있었던 것일 뿐. 그리고 또래 남자들은 당연히 연하 여친을 원할테니 세희에게 관심은 없을거라 단정 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장이 콩닥되었다.
‘왜 이래 백세희! 나 35살. 심장이 죽은 거 아니었어? 웬 심폐소생......?’
세희는 생각이 들킬까 쑥스러워 창쪽으로 눈을 돌렸다. 밖에 하얀 무언가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다!
'뭐지 이 영화의 한 장면은?'
"어.. 라 했다! 백세희"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세희의 볼에 또 닿았다. 이번은 손가락이 아니었다. 정훈의 따뜻한 입술이 세희의 볼에 닿았다. 쑥스러워진 그녀의 볼이 마치 용암이 끓어오르듯 활활 타는 느낌이었다.
서른 다섯살에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구나. 그리고 그의 입술은 세희의 입술에도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