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오랜만에 맛있는 키스 모임이군.‘
거울 속 얼굴을 보며 수민은 입술에 립스틱을 덧칠하고, 향수를 살짝 뿌렸다.
보들한 연푸른 컬러 니트 가디건을 어깨에 걸쳤다.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아침, 저녁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아직 여름 끝자락이라 어딜 가든 실내는 에어컨 풀가동 중일 확률이 크므로 가디건을 챙겼다. 여름 감기 걸리면 기분 나쁘다. 한창 덥던 지난 7월에도 코비드로 의심할 만큼 심한 기침감기로 수민은 고생했다. 그저 미리미리 여름 감기 조심하는 수밖에.
택시에서 내려 커피숍으로 걸어가는 동안 생각보다 더운 듯했다. 괜히 가디건까지 걸쳤나. 등에 살짝 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같다.
스윽.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역시 시원한 공기가 맞았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이곳은 수민이 좋아하는 곳.
수민과 그녀의 친구들이 3년째 아지트로 삼고있는 단골 커피숍 <맛있는 키스>다.
마치 건축가의 개인 미술관을 온 듯한 감각 있는 공간이다.
커피숍 이름이 조금 생뚱맞기는 하다.
생각만 해도 달콤한 곳 일듯 하지만, 이름과 달리 로맨틱하다기보다 오히려 그곳은 편한 휴식 공간 같다.
커피숍 입구, 독특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면 내추럴 나무 바닥재와 편안한 아이보리 컬러로 칠해진 넓은 카페가 한눈에 들어온다. 식탁과 의자를 한 세트로 봤을 때 각 세트들의 스타일과 재질이 다르다.
모던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나무 가구들이 커피숍 전체 곳곳에 비치되어 있고 그 위에 두꺼운 책과 작은 장식품,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다. 각 테이블 사이마다 허리 높이 만한 사이드 테이블이 있는데, 덕분에 마치 어느 집 거실에 들어온 듯한 편안한 느낌이다.
가게 이름이 <맛있는 키스>지만 실내 장식으로 키스 관련 사진이나 그림, 조각은 전혀 없다. 대신 입술 사진이나 그림이 벽면 곳곳에 붙어있다.
그 입술 소품들도 다양하다. 팝아트 스타일, 판화, 가는 펜으로 그린 세밀화 입술, 두툼하고 섹시한 여성 입술과 남성의 얇은 입술등 갖가지 입술 그림이나 컬러, 흑백 사진이 걸려 있고, 유럽 어느 벼룩시장에서 산 듯한 오래된 빈티지 입술 그림도 있다. 그 색상들 또한 다양하지만 전체적인 컬러톤은 비슷해 이 공간이 통일되어 보인다.
큰 공간 안에 개성 있는 작은 거실들이 모여있는 듯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져 있다. 그림과 가구, 작은 소품까지 다양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치 한 아티스트가 제작한 느낌이다. 어쩌면 한 개인 큐레이터가 제품을 구입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 곳에 가면 작은 개인 미술관을 온 느낌이 든다. 단정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디테일이 많은 이 편안한 공간은 그녀들의 아지트다.
수민이 두리번거리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역시! 최애 테이블을 잡았군.'
안쪽을 보니 혜연, 세희, 지아가 자리 잡고 이미 수다 중 이었다. 그녀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이 가게 제일 안쪽, 천정이 유리 아치로 생겨 마치 유럽의 정원 내 온실에서 차를 마시는 듯한 착각을 들게 만든다.
위를 올려다보면 서울의 빌딩 꼭대기가 보일 뿐이지만,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도시가 아닌 한적한 야외에 나와 휴식하는 기분이라 수민과 친구들은 그 테이블을 좋아했다. 또한 다른 테이블과 살짝 분리되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친구들을 보니 수민의 한쪽 입꼬리가 씽긋 올라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 안을 가로질러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오우야~ 얼마만!”
양팔 벌려 제일 먼저 수민을 와락 껴안은 사람은 혜연이었다.
“언제 돌아왔어? 시차적응은 끝났어? 내 선물은?”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듯 수민은 본인 선물부터 찾았다.
“옛다!”
혜연은 시리얼 박스 비슷하게 생긴 종이 박스를 수민에게 내밀었다. 혜연은 3주 전 미국 LA에 출장 갔다가 하와이를 거쳐 그저께 귀국한 참이었다.
“역시 언니뿐이야!”
“이럴 때만 언니지? 여기 더 있어. 골라봐”
혜연은 쇼핑백에서 슈푸림 티셔츠, 트레이더 죠엔 에코백, 산타모니카 로고가 찍힌 모자, 각종 과자와 잼등 다른 선물들도 잔뜩 꺼내 친구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종이 박스를 뜯더니 바스락 거리는 비닐봉지를 꺼냈다. 안에는 꽃모양의 요거트를 입힌 쿠키가 있었다. 핑크색 쿠키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한입에 와앙 넣더니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이 쿠키는 수민이 혜연에게 미리 부탁했었던 쿠키였다.
“음,, 이 요거트 쿠키가 딱 내 취향이라니깐! 난 이게 맛있더라. 잘 먹을게 언니! 사랑해!”
과자봉지를 뜯자마자 하얀 손바닥들이 날름날름 쿠키를 내놓으라 했다.
이에 수민은 쿠키를 아예 냅킨에 덜어 친구들과 함께 나눠먹기 시작했다.
“ 아웅 내 새끼들 많이 먹어~ 미쿡 쿠키 사 온 이 언니가 뿌듯하네.”
벌써 15년 차 친구들.
그녀들은 15년 전 필라테스 학원에서 만났다. 처음 수업에 들어와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뻣뻣함을 위로삼아 수업을 빼먹지 않았고, 그렇게 운동하다가 친해졌다. 그 후 가끔 운동 후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주말에 영화를 보거나 콘서트를 함께 보러 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들은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친구가 되어갔다.
“우리 얼마만에 완전체야? 한 달?”
“어 그런 거 같아. 혜연언니가 한 달 정도 미국에 있었던 거지? 갔던 일은 잘 됐어?”
“아후 말도 마. 엘에이도 이전 같지 않아. 홈리스(거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위험했어. 다운타운에서 화보 찍는 내내 좀비처럼 어슬렁 거리는 홈리스님들 덕에 바짝 긴장했었네. 그래도 무사히 화보촬영 잘 끝내고, 고객도 잘 만나고, 사진도 많이 찍고 덕분에 잘 다녀왔어.”
“ 사진 정말 멋지다. 정말 이건 언니 천직이야 천직.”
혜연의 휴대폰을 건너 받은 세희는 화보사진을 넘겨보며 감탄만 할 뿐이었다.
그 사이 서버는 수민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갔다. 마침 우걱우걱 먹던 쿠키가 목에 매였는데 잘 됐다 싶어 수민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들이켰다.
“역시 <맛키>의 커피맛은 최고야!”
유리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했다. 수민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 가디건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이젠 <맛키>에 오면 그냥 우리집 거실 같아 “
” 동감이오. 오랜만에 <맛있는 키스>에 오니, 맛있는 키스가 먹고 싶네? “
” 뭐래! 유부녀들이 왜 그러셔~ 노처녀도 가만있는데. “
” 남친 있으니 좋~겠다. 너도 결혼 10년 차 넘어봐. 달달한 키스가 그리워지는 날이 올 거야. “
” 형부 있잖아. “
”어머 12년간 같은 남자와 키스해 봐. 계속 맛있기만 하겠니. 설렘이라는 양념이 없어서 달달함이 떨어지고 있단다. “
” 언니는 형부 말고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 게 괜찮아? 아니 형부가 딴 여자랑 키스하면? “
” 키스 정도는 어때? 몸도 마음도 섞는 게 아닌데 문제 될 게 있나? 넌 어떻게 생각해? “
혜연이 곁에 지아를 쳐다보았다.
” 어? 모래! 언니 아직 시차적응중이야? 하하. 카페 상호 이야기하다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야. “
당황한 지아는 호탕한 척 웃음과 함께 말을 얼버무렸다. 아이셋 둔 유부녀인 지아가 솔직한 답을 하기에 갑작스럽고, 또한 조심스런 질문이었다.
” 나 말고 여기 너만 유부녀인데 너라도 받아줘야지! 수민이는 돌싱이라 그 마음 모를 테고.ㅋㅋ“
”당장은 노코멘트. “
”어라 얘 봐라..? “
혜연은 눈을 살짝 찡그려 지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때 수민이 끼어들었다.
”만약 우울증 걸린 주부가 맛있는 키스를 배우자 아닌 이와 우연히 하게되었는데, 그게 위로가 된다면, 난 찬성이야. 청춘들은 클럽에서 만난이와 원나잇도 하는데 뽀뽀 한번 못해? 주부도 스트레스 풀어야지. 업소에 가는 유부남 놈도 있잖아. “
혜연과 지아는 동시에 수민을 돌아보았다. 평소 과감하게 말하는 혜연이기에 수민의 뜻하지 않은 발언이 놀랍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수 달콤 키스 이야기에 업소는 왜 나와. 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업소 사람이랑 키스를 해 본 적 없지만, 달달하고 맛있지는 않을 거 같은데? 키스가 맛있는 이유는 심장에서 부터 전해오는 찌릿함 아닐까"
" 그건 그래. 호호. 그나저나 이제 그런 맛있는 키스를 할 수 있을까? 39살 내 심장을 찌릿하게 할 달달한 키스를 이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것도 어릴 때나 하는 거지. "
수민이 대답했다. 그때 세희의 선생님톤 근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 안 되지! 그건 치팅이야. 어떻게 남편을 두고 딴 남자와 키스를 해? 말도 안 돼!! 큰 사회 문제야. “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갑자기 수다가 끊어지니 다들 본인 커피잔으로 눈이 갔다.
실행을 하지 않을 반농담에 의미없는 수다임을 알면서도, 그저 생각과 고민을 토로하는 여자들의 수다임을 알면서도, 예민하게 반응 할 수 밖에 없는 세희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기에 다들 입을 다물 뿐이었다. 혜연은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세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넌 정훈씨랑 어떻게 되어가니. 마음은 정했니?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
세희 또한 커피잔을 들어 컵 속의 진한 액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독주를 마시는 표정으로 그 액체를 한 모금 스읍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