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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verly지아 Oct 04. 2024

#5 진지아_2

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주치의는 그런 지아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 지아씨, 우리 나이 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생리는 규칙대로 잘 나오고 있어요? “

”네........ “


주치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트를 살폈다.


” 저는 지아씨 정신상담을 받아 보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 무슨 문제 있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약간의 우울증이 있는 거 같은데, 뭐 대부분의 주부들이 겪고 있는 거랍니다. 그게 심각하다기보다, 어차피 이제 갱년기도 다가올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지아씨와 맞는 상담사를 알아두는 걸 제안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지금부터 이분저분 만나보면 좋을 거 같아요. 증상 없이 아무렇지 않게 갱년기를 지나가는 분도 많지만, 요즘은 40대 초반에도 생리가 끊기고 갱년기가 일찍 오는 경우가 많답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


지아가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치의는 애써 길게 둘러 이야기했다. 아마도 지아가 ‘내가 정신병이 있다고요?’라며 오해할까 봐 최대한 편하게 이야기하는 듯 했다.


” 제가 추천할 테니 지금부터 여러 명의 상담사를 만나봐요. 그래야 지아씨와 맞는 정신상담사를 만날 수 있어요. 그들이 약을 권하면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


그래, 우울증이 올 수밖에 없는 거 같다.

모든 것이 복합적이겠지만, 원인이 호르몬이든 주변 환경이든 세상의 변화든 일단 그녀 삶의 모든 즐거움이 말라가고, 어둠의 그림자가 지아의 삶에 다가왔다. 지아가 하던 모든 일들이 다 부질없고 의미 없이 여겨지며 허무하고 지루했다.


매일 쌓여가던 설거지나 빨래, 청소 그 모든 것을 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아니 잠시동안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딘가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의 어둠은 점점 더 그녀를 엄습했고, 그녀는 끈적한 아스팔트 같은 그림자 속에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아 소리 없는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모임에서 그런 그녀의 상태를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혼자 이겨내고 싶었다. 그 외 다른 이유는 없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오자마자 지아를 붙잡는 어둠이 싫었다. 운전하는 내내 그런 복잡한 심정이 그녀를 더욱 숨 막히게 했다. 집으로 가던 차를 돌렸다.

근처 화방 앞에 차를 세운 후 그녀는 급히 화방으로 들어갔다. 차에 들어갈 수 있는 한도 내 가장 큰 캔버스를 찾았다.


지아는 베란다 한편에 그 커다란 캔버스를 세웠다. 조금 전 화방에서 사 온 캔버스였다. 거기에 함께 사 온 물감을 퍼 붓기 시작했다. 그녀 속에 쌓인 응어리를 하얀 캔버스에 쏟아 던지듯 물감을 쏟고 있었다. 겹겹이 컬러들이 섞여 바닥으로 물감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캔버스 위에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미대 다닐 때 그림 좀 그렸었지만 지금은 마구마구 그녀의 감정을 퍼붓고 있을 뿐이었다. 그림을 놓은 지 10여 년도 더 되었기에 이제 그림에 자신감도 없었다. 그냥 갑갑한 감정을 어디엔가 퍼붓고 싶었다.


3학년 5학년 아이들이 놀라 뛰쳐나왔다.


”엄마 뭐 해? 우리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 “

”나도 해볼래~나도 같이 미술놀이해 엄마~“


철없는 3학년 딸아이는 슬리퍼를 가지고 나와 오른쪽 곁에 쪼그리고 앉아 캔버스 한편에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마음껏 붓질해. 그래도 괜찮아. “


그러자 둘째 녀석도 달려 나와 곁에 있는 큰 붓을 들고 물감을 마구 섞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갑자기 그런 미술놀이를 시작한 모습에 의아해하지도 않고 깔깔거리며 캔버스에 본인들의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마구마구 미친 듯 붓질을 해대던 지아는 옷에 묻은 물감들을 보며 아이들과 함께 깔깔 웃었다. 그녀의 슬픈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지 아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동안 몰래 숨어서 흘리던 눈물이 지금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아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페인트 통에 든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느라 엄마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연신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지아는 아이들이 물감놀이에 집중하는 게 다행이라 여겼다.




“ 요즘 기분은 어떠세요?”

“ 오늘은 좀 괜찮은 거 같아요.”


지아는 매주 한 시간 정도 의사와 상담했다. 상담을 하면서 느낀 점은 지아 스스로 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끼양이 풀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느새 양치기가 나타나 바른 길로 인도를 해준다. 지아는 상담실에 들어가면 항상 길 잃은 새끼양이 된 기분이 들었다.


“지난주에도 이전처럼 가끔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었나요.”

“네. 지난주에 또 속이 시끄러웠어요. 잠잠하던 우주가 뒤엉키는 느낌이고, 자꾸 근심이 생기고, 예민해지는 거 같고, 별일 아닌데 엄청 거슬리고. 아니야 괜찮다. 생리 때가 오려나보다 여기며 혼자 정신을 가다듬고 견뎠어요. 그럴 때면 제 몸 세포 하나하나가 다 따로 노는 거 같아요. 머릿속은 어수선하고 산만해져요. 그래도 괜찮다.. 하고 참는데, 하필 그럴 때 아이중 한 명이 버튼을 눌리는 일이 꼭 발생해요. 정말 별일 아닌데, 갑자기 미친 여자처럼 꽥! 하고 화산처럼 감정이 폭발해 버려요. 평소라면 다정한 말투로 지적하고 넘어갈 작은 일인데. 폭발한 후 후회는 하지만 이미 늦었고. 그렇게 히스테리 수준으로 격앙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음날 꼭 생리가 터져요. 이게 갱년기인가요...?”


지아는 원인을 찾고만 싶었다. 인성 좋은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는데, 엄마 때문에 정신불안이 걸릴 판이라 여겼다. 그만큼 지아의 감정 기복이 심했다.


“지아씨 상태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요. 아무래도 갱년기 전조 증상 정도로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요즘은 삼십대도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우울증세가 좀 있는 거 같아요.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세요?”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을 언급했다. 역시 지아의 직감이 맞았다.

지아는 더 우울해졌다. 이제 36살. 우울증과 갱년기라니.


“스트레스야 항상 받죠. 아이들 세명의 스케줄 관리와 장보기, 식사준비, 학교학원 통근과 숙제 봐주기, 청소와 빨래, 각 선생님들과 소통등 일이 끝이 없네요.”


“가사를 도와주실 분은 안 계시나요?”


“네 가끔 청소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시긴 하고, 친정 엄마가 오셔서 도와주시기도 했는데 요즘은 엄마도 힘드셔서 쉬시라 했어요.”


“청소도우미분의 일정을 늘릴 상황이 되실까요.”


“전에는 일주일에 두 번 오셨는데,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 후에 일정을 줄였어요. 물론 도우미분 구하기도 힘들고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학원비도 만만치 않아서 횟수를 못 늘리겠어요.”


“그럼, 가사를 조금 덜 하고, 그 일을 가족들에게 배분하는 건 어떨까요. 가령 빨래를 개고 나면 아이들이 가져다가 정리하고, 남편이 청소를 도와주고, 외식을 조금 더 하거나. 가족들이 함께 지아씨의 무게를 조금 더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어요.”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인생의 삼분의 일 정도는 청소와 빨래등 가사노동에 사용되는 듯 해 억울했다. 아이들도 컸고 대충 하자고 생각했지만, 본인도 모르게 계속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닦고, 가족들이 사용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꼼꼼히 했다. 집이 어질러져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계속 정리하고 닦고 쓸었다. 산처럼 가득 쌓인 다섯 식구의 옷을 개어 방마다 옷장에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이들에게 위임해도 되겠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오셔서 우울증 검사하신 결과를 보면 아주 심각하지는 않지만, 방치할 수준도 아닌 거 같아요. 감기도 두면 자칫 폐렴으로 갈 수 있잖아요. 원하시면 우울증 약도 처방해 드릴 수 있어요.”


‘약을 꼭 먹어야 해요!’가 아닌 ‘원하시면 처방’ 해 줄 수 있다는 말이 조금 위로가 됐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할 생각하니 지아는 무서웠다. 그 약에 평생 의존할 것만 같았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처방약을 권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아씨가 원치 않는다면 함께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죠. 혹시 운동하세요?”


“아니요. 할 시간이 없어요.”


“그럼 운동을 해보시는 건 어때요?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야죠. 아이들 등굣길에 함께 나와 운동하러 가신다거나, 동네 걷기를 하거나 말이죠. 이제 근육량도 줄어들 텐데 일단 운동에 집중 한번 해 봅시다.”


 “한번 해 볼게요. 평생 약 먹는 거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지아는 앉아있던 밝은 갈색 가죽 소파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고 등을 기댔다. 머리를 뒤로 젖혀 천정을 바라본 후 잠시 눈을 감았다. 편했다.


“선생님, 얼마 전 베프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허무하고 공허했어요. 오랜만에 만나 무척 반가웠는데, 그 반가움을 엄습할 만큼 제 우울증이 올라왔나 봐요. ‘엄마’라는 존재는 좋지만 ‘주부’의 삶이 저를 조이는 거 같아요. 미친 듯이 차를 돌려 화방을 갔어요. 정신 차려보니 베란다가 온통 물감 투성이로 엉망 되어 있고, 가당찮은 그림 한 점이 제 갑갑함의 모퉁이에 서 있더라고요. 아이들은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한 물감놀이였다며 좋아했고, 저도 어쩐지 숨 쉴 수 있었어요.”


“...... 다시 그림을 시작해 보는 건 어때요?”


“자신이 없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무능한 생각을 하게 될지 몰랐어요. 그림도 이렇게 못 그리게 될지 몰랐고요. 10년 넘게 연필과 붓을 놓고 살았으니. 아이들을 키우고 돌아보니 저의 모든 것이 다시 원위치, 0에 서 있는 거 같아요. 정말 20대 때 열심히 살았는데. 몇 날 밤을 새우며 작업하고, 어렵게 직장도 잡았었는데.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인생에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기분이 허무하고, 우울해요. 그래서 다시 동굴로 들어갔어요. 아이들 때문에 오래 머무르기 쉽지 않지만. 그 속에서 책만 읽고 있어요. 제 허함을 달래려고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그럼 기분은 나아지세요?”


“네. 속이 텅 빈 느낌인데,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 기분이 나아져요. 어릴 때 생각도 나고요. 좋아하는 자기 계발 유투버가 추천하는 책을 지금은 읽고 있어요. 제 자아를 찾기 위해서요. 하지만 두렵습니다.”


“왜요?”


“ 주부가 된 후 잃어버린 제 존재감과 자아를 찾고 싶은데, 막상 찾으면 엄마인 제 모습을 잃을까 봐요. 제가 원래 워커홀릭이었어요. 한 가지 집중을 하면 두 가지를 못해요. 자유분방한 생각을 가지고 살던 엉뚱한 저를 찾아내면, 자상하고 다정한 엄마의 모습보다 예민하고 일에 미친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 예민하고 깐깐한 일중독이었던 사람이 자상하고 마음이 여유로운 엄마라는 존재로 지난 10년 동안 변화하고 성장했어요. 아이들은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랐고, 아이들 성장에는 자상하고 다정한 엄마가 정서적으로 나을 거 같은데 말이죠.”


“자상하고 다정한 모습도 일중독 지아씨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요. 속에 있던 또 다른 자아가 지난 10년 동안 더 두드러지게 나왔겠지요. 그렇지만 중간중간에 예민한 아티스트로서의 존재가 튀어나오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아이들은 이미 알지도요.”


“ 그럴까요. 제가 일에 집중할 때 누가 방해를 하면 으르렁거리고 톡 쏘아버릴지도 몰라요. 왜 이렇게 단순하죠.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은 엄마를 귀찮게 하는 존재라 여길지도 몰라요.”


“자상한 엄마와 까칠한 아티스트 사이에서 갈등이 되시나 보군요.”


“ 네 "


미술을 전공했던 지아였다. 감수성도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아이들도 엄마가 집중해서 그림 그리는 모습에서 배울 거 같아요. 그리고 멋진 엄마 모습을 찾을지도 모르고요."


" 사실 제가 힘들게 미술을 공부해 봐서 아이들에게는 이 길을 권하고 싶지 않아요. 결국 인간은 먹고살아야 하고, 앞으로 더더욱 여자남자 각각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봐요. 전 미술을 선택할 때 돈에 관심이 없었고, 끌리는 대로 선택했을 뿐인데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남편일이 힘들어져 경제적으로 힘들어져 보니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란 고민을 했어요. 물론 제 선택을 후회하고, 제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현실적으로 바뀌고 있다 해야 하나...... 아이를 낳고 육아하는 여성이 창작활동을 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네요.”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다고 아이들  모두 미대를 가거나 화가가 되는건 아니니 마음 편히 가지시면 어떨까요. 자기 계발서 외에 다른 흥미로운 책이 있나요?”


“어릴 때 읽던 고전을 다시 읽고 싶지만, 그 사이 문해력이 떨어져서 일단은 가벼운 현대 소설과 웹소설을 주로 읽고 있어요. 술술 읽어지는 책들이죠. 웹툰 제작이나 동화책 제작도 관심이 있어서 스토리텔링 관련 책도 손에 잡히고, 그림 관련 온라인 수업도 등록했어요. 아직 시작은 하지 않았지만, 손이라도 풀어보려고요. 요즘 글도 쓰고 있어요. 짧은 스토리를 적는데 좌절했습니다. 문해력뿐만 아니라 작법도 엉망인 거 있죠. 그런데 말이죠......”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지아를 보던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안심의 미소였다. 지아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걸 눈앞에서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본인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 그녀는 일어서고 있었다. 지금 저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본인도 모른 채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시냇물처럼 졸졸졸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주치의가 추천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신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는다. 적어도 지아는 그런 용기가 있었고, 살고 싶어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끈적한 아스팔트 같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그 시커먼 늪같은 바닥으로 가라앉던 지아는 자신의 존재감과 자존감도 함께 깊은 지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여겼다. 누구도 그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 본인 커리어를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일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수많은 환자들을 겪어온 노의사는 알았다. 그게 원점이 아니란 것을. 상담의 마지막에 노의사는 지아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아씨, 오늘 내가 한 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의사로서가 아닌 인생 선배로서.

지아씨는 결코 원점으로 돌아간 게 아니에요. 그 지난 10년 동안 지아씨의 재능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다시 깨울 수 있어요. 어쩌면 엄마로서의 삶을 겪은 뒤라 더 근사한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몰라요. 나도 마흔두 살에 박사 공부 시작했답니다. 막내가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야 말이지요. 큰 아이가 중학생이었는데  공부가 쉽지 않았지만 결국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의 저보다 훨씬 더 어린 지아씨가 왜 못하겠어요.

아이들도 엄마를 지지할 거예요. 지나고 보니 40살도 50살도 아직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늦다고 하는 사람들 말 믿지 말아요.  지금 제가 65살인데 이제는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게 쉽지 않은거 같아요. 내가 겪어봐서 알아요. 그러니 본인을 믿고 자아를 깨워봐요. 할 수 있어요.”


지아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고, 얼굴 근육이 경직됐다. 시간이 멈춘 듯 지아의 주변 공기가 멈춘 듯했다. 심장이 찌릿해지며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이건 그냥 위로가 아니었다. 듣고 싶던 말을 들었다.

잠을 자고 있던 자아와 재능.


방황하던 지아를 멈추게 한 문장이었다. 의사의 말이 옳았다. 원점에서 시작하려니 부담되고 일어서기 힘들었지만, 그동안 일궈놨던 내 능력이 잠을 자고 있었다면 깨워볼 만 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온 지아는 기분이 좋았다. ‘잠자고 있는 너의 재능’ 이란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모든 재능과 꿈이 사라진 채 밥하고 청소하는 중년 아줌마로만 여겨지던 자신이 조금은 값지게 느껴졌다.


그 동안 여덟살 연상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 하다못해 친정 식구들 중에서도 '지아의 존재'를 귀하게 여겨주는 이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가족을 위한 지아의 모든 노동과 정성은 당연한 걸로 취급되어 왔었고, 한국 전통 문화에서도 이는 당연시 여겨졌었다.


문제는 현시대는 그 전통시대와 다르다는 점이다.

회사를 그만둘때, 선배맘들은 버티라고 했다. 아이들도 크면 세련되고 멋진 엄마를 원한다고. 그 때 그 선배맘본인들은 이미 늦었다며 슬퍼했다.

요즘 엄마라는 존재가 책임져야할 일은 너무 많다. 엄마, 아내, 매니저, 요리사, 청소부, 운전기사, 정보수집가및 분석가 등등. 예전에는 없었던 책임감은 늘어났고, 엄마와 아내란 존재에게 원하는 바는 커져갔다. 거기에 남편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졌을 때 시어머니로부터 비수같은 말을 들어야했다. 

정말 쉼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오는 댓가는 결국 금전적인 성취가 없으니 존재의 가치를 낮게 보는 눈들 뿐이었다. 아이들이 어릴때 제대로 도와준 사람은 친정엄마 한분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육아가사를 도와준 적도 없던 다른이들은 이젠 돈도 못 버는 능력없는 여자라 했다. 12년만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한단 말인가. 서럽고 억울했다.

당연히 사라지고 싶었을 수 밖에. 이런 생각을 하니 지아의 눈에 눈물이 다시 고였다.  

 

최신 트렌드나 사회에서 뒤떨어져 있는 본인의 모습을 순간순간 보게되고, 뉴 테크널러지를 다루는것도 느렸다. 이젠 모든게 전산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데,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 없다. 유튜브보고 배우란다. 그럴 시간이 어디있냐고. 

결국 그런 모습을 한심해하는 주변 눈빛과 시대에 뒤떨어져가는 스스로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자존감과 존재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차림새 또한 회사로 출근하는 워킹맘에 비해 뒤떨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결혼 생활 십사년을 살고 보니 지아는 마른 멸치처럼 쪼그라 들어 초라한 모습의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삶에 지쳤다.


상담을 마치고 나온 지아는 기분이 좋았다. ‘잠자고 있는 너의 재능’ 이란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모든 재능이 사라진 채 밥하고 청소하는 중년 아줌마로 여겨지던 자신이 조금은 값지게 느껴졌다. 0에서 시작할 부담감이 훨씬 덜했다.


시계를 보니 아이들 픽업 타임이 조금 더 남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근처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앞 카페에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도서관으로 들어가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건장한 한 남자가 커다란 캠핑 배낭을 메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막 여행을 마치고 공항을 나온 분위기의 그 남자는 성큼성큼 도서관을 향했다. 특별한 책을 찾는 듯 곳곳을 기웃거리다가 지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서 벗어 툭 바닥에 내렸다.

쪼그려 앉아 책을 찾던 지아가 소리에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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