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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verly Story Oct 11. 2024

#6 수렁_2

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세희 이야기

”우리 오랜만이지? 두 달 만인가? “


격정적인 시간을 보냈던 지연과 정훈은 땀에 젖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훈의 품에서 먼저 입을 뗀 건 지연이었다.


정훈은 말이 없었다. 그녀 머리밑에서 팔베개 역할을 하는 오른팔은 그대로 두고, 몸을 젖혀 다른 한 손으로 전기담배를 가져다 입에 댔다. 후 불어내는 그의 숨에서 딸기향이 나는 듯했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

”결혼 때문에? “

”응, 세희 씨가 결혼하자네.“

”그렇구나. 뭐 나이가 나이니, 자기 생각은 어떤데? “


지연은 정훈의 의중을 캐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기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자 지연도 한입 달라고 했다. 정훈은 지연과 단둘이 있을 때는 그녀에게 반말을 사용했다.


”나도 결혼하고 싶어. 세희는 괜찮은 여자 같아. “

”....... “


항상 세희를 칭찬하던 지연이었지만, 막상 정훈의 입에서 세희 칭찬을 들으니 질투 났다.


”결혼해도 우리 계속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널 놔줘야 하나......? “

”....... “

”우리 관계가 벌써 몇 년이니. 결혼해도 가끔은 보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꼭 결혼해야 해? 세희는 나이가 많아서 출산도 못할걸? 차라리 좀 더 착한 연하 신부를 찾는게 어떨까?“


지연의 솔직한 심정은 정훈이 다른 여자와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가 연애 중에는 지금처럼 자신이 밤에 몇 시간 함께 보내도 간섭하는 아내가 없어서 괜찮다. 하지만 그가 결혼을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연이 필요할 때 즉각 즉각 정훈이 달려 나올 수 없고, 만남의 장소 또한 문제였다. 그들 만남의 절반 이상은 정훈의 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의 만남이 가장 마음 편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푹 빠지거나, 심장이 뛰는 사랑을 해서 만난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삼 년 전쯤 정훈은 지연을 처음 봤다.  그들은 교사모임 봉사활동에서 만났다. 함께 학교를 다닌적 없지만 지연은 정훈의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동문으로서 관심도 갔고, 자상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카리스마 있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지연이 멋져 보였다.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조가 되어 업무 봤다.


그렇게 친해진 후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두 사람은 하던 프로젝트 관련 대화를 하며 계속 술을 마셨다. 결국 만취된 정훈은 블랙아웃 되었다. 중간중간 기억나는 거라곤 지연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끊기는 몇몇 장면뿐이었다.


아홉살 많은 연상녀였지만, 두 사람은 꽤 잘 맞았다. 어차피 정훈은 노총각인 싱글이었고, 지연은 그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모든 책임감에서부터 잠시 자유를 느꼈던 동시에 그녀를 짓누르던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삼 년 전부터 ㅅㅅ파트너라는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정훈은 지연이 유부녀란 것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당장 떠나간다 해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었고, 정훈 때문에 지연이 가정을 버릴 일은 절대 없었다. 지연은 자녀를 끔찍이 사랑하고 챙겼다. 남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 많은 그가 지연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 여겼다. 여자도 폐경이 오듯이. 좋은면이 더 많은 배우자였다.  

단지 결혼 20년 차라 지독한 권태기를 겪고 있었고, 정훈과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를 풀고 집으로 돌아가면 지연은 오히려 더 나은 엄마와 아내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둘은 그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가끔 만남을 가졌을 뿐이라 여겼다. 그래서 불륜이란 단어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요즘은 어디서든 유부녀, 유부남들 사내 불륜 소문이 공공연히 들려왔는데, 거기에 비하면 둘은 나름 깔끔한 관계라 생각했다. 그렇게 합리화시키며 관계를 이어왔고 원하던 바를 서로 메꿔 주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은 아니지만, 조금 질투 난다? “

”하하 왜 그래. “

”그래도 너랑 이렇게 누워있으면 맘이 편하고 내 무거운 스트레스들이 한 번에 날아가는데. 지난 몇 년 즐거웠어. “

”나 아직 결혼 안 했는데? 우리 헤어져 오늘? 난 아닌데. “


정훈은 지연의 옆구리를 살짝 간질 었다. 둘은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모텔에 머물렀다.


밤새 잠을 설친 세희는 새벽녘에 깜빡 잠들었다가 알람 소리에 화들짝 깼다. 정훈의 연락은 없었다. 세희는 걱정되어 전화를 걸려다 멈칫했다. 대신 문자로 안부를 물었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학교로 등교했다. 종일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혹시 교통사고라도 났나 싶어 걱정도 되었지만, 일단 기다렸다.


점심시간 지나서야 정훈에게서 한통의 문자가 왔다.


‘연락 미리 못해 미안해요. 일찍 잠들었어.’

‘괜찮아요?’

‘어. 몸이 좀 안 좋아서 약 먹고 쉬고 있어. 나중에 연락할게.’


톡은 그렇게 끊겼다. ‘나중에 연락할게’라는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서운했다.


‘많이 아파? 죽 끓여줘? 여하튼 나 퇴근 후 다시 연락할게. 수업 들어가야 함’


세희도 아프다는 정훈이 염려되었지만, 다음 수업을 위해 출석부를 챙겨 교무실을 나섰다.




봄이 지나고 날이 조금 더운 듯한 오월, 그때 계획했던 대로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났다. 그때 세희는 정훈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정훈이 생각보다 마음을 일찍 정했던 이유는 연세가 드신 그의 부모님 때문이었다. 마흔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라며 계속 선자리를 만드시던 세희의 부모님 또한 두 사람이 결혼을 앞당긴 이유였다.


정훈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결혼을 전제로 만나던 사이인데, 새삼 지연을 핑계로 미룰 필요는 없을 듯했다. 결혼 후에라도 천천히 정리하지 뭐. 천천히.


가을의 신부가 되기로 했던 세희는 여름 방학 동안 되도록 결혼 준비를 마치려 노력했다.

이사하기 빠듯한 시간이므로 일단 신혼집은 정훈의 집에 꾸미기로 했다. 가전제품과 가구를 바꾸고, 세희의 물건도 조금씩 옮겨갔다. 결혼식장과 신혼여행지는 두 사람의 상의하에 예약하고, 결혼식 하객 명단도 만들고 초대장도 골랐다. 비록 초혼이었지만 이미 연령이 높았던 탓에 결혼식도 소박하게 준비했고, 덕분에 일도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우리 마치 두 번째 결혼처럼 일 너무 잘하는데? 이렇게 잘하기 있기야? “


초대장 제작 사이트를 통해 주문접수를 막 끝낸 후 세희는 맥주 두 캔을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이걸 천생연분이라 하지? “


정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세희가 가져온 맥주 한 캔을 따서 세희에게 건네고, 나머지 한 캔은 따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지잉 지잉


그때 식탁 위에 있던 정훈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 왔음을 알리는 진동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휴대폰을 흘깃 보았다. 순간 동공이 커졌다. 지연에게서 온 문자였다.


”이 시간에 누구야? “

”광고 문자겠지머. 가을의 신부님, 맥주나 마실까요. “

”아 모야. 낯 간지럽게. “


둘은 깔깔대며 맥주를 마셨다.


”다음 주말에는 웨딩드레스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

”어? 나 초대장도 줄 겸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기로 했는데 어쩌지? “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늦겠네? 일단 내가 먼저 가서 드레스와 턱시도 골라둘게. 좀 씻어야겠다. 오늘도 긴 하루였네. “


세희가 맥주캔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때 정훈은 얼른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밤늦게 미안. 나 부부싸움 했어. 가도 돼?’

‘세희가 함께 있어.’


정훈은 얼른 문자를 지웠다. 지연과의 시간이 아쉽지만 그도 이제는 한 여자에게 정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희가 좋았다. 부모님도 좋아했고, 앞으로 미래가 그려지는 사람은 지연이 아닌 세희였다. 지난 몇 달간 두 여인을 동시에 만났지만, 이제 정훈은 지연을 깨끗하게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마음이 찜찜했는지 정훈은 다시 휴대폰에 문자를 남겼다.


‘미안해. 우리 언제 따로 만날까. 할 말이 있어.’


지연의 대답은 없었다.




” 우와 너무 예쁘다, 세희야! 아니 그동안 얼마나 다이어트를 한 거니! 환하게 웃어봐. “


지연은 연신 휴대폰 사진을 찍어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희는 쑥스러웠다.


”신부님, 다음 드레스 환복해 보시죠. “

”저 드레스 몇 벌 더 골라봐도 될까요? “

”네 그러세요. 편히 둘러보세요. “


두어 벌을 입어 봤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없었다. 이뻐보였지만 자신과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았다. 어린 신부가 입었다면 더 이뻤을텐데. 세희는 마치 재혼 같은 느낌이 들 만큼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나이 들어 보여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이뻐 이뻐. “


곁에서 드레스를 고르는 지연이 세희 기분을 좋게 해 주려는 듯 연신 칭찬해 댔다.


”아휴 어쩜 드레스도 이렇게 예쁘니. 내가 결혼한 게 이십 년 전이라 그때 비하면 훨씬 이쁘네. 입어보고 싶다 얘. 그런데, 너 육개월만 사귀고 결혼해도 되겠니? “


세희에게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우리 나이쯤 되면 삼사개월만 사귀고도 결혼해서 잘 살던데요. 결혼 생활을 계속 연애하는 느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세희는 미소 지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지연이 고마웠다.


”그래도 너무 급한 거 아닌지 몰라. 내가 정훈이를 몇 년 알아왔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같아. 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쟌아. 넌 정훈이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해? “

”저도 그 속을 어찌 다 알겠냐만은,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선배님도 함께 겪어보셨잖아요. “

”그래 겪어봤지. 아주 많이....... 얘 이것도 한번 입어봐. 넌 볼륨이 있어서 이게 어울릴 거 같아. “


지연이 추천해 준 드레스는 슬림한 머메이드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나잇살에 통통한 배가 도드라져 보였다.     

”결혼식까지 살 조금만 더 빼면 이쁘겠네. “

”오늘 함께 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선배님. “

”나야말로 영광이지. 아침에 통화 안 했으면 어쩔 뻔. “


아침에 지연과 세희가 통화하던 중 드레스 고르러 간다는 말에 지연이 샵으로 들렀다. 두 사람은 한두벌 입어보다가 머메이드 스타일 드레스를 입은채 다른 드레스를 더 고르고 있었다. 그때 수민과 지아, 혜연이 달려 들어왔다.


”헉헉 다 끝난 거 아니지? 늦어서 미안해. “


급히 오느라 달렸는지, 다들 헉헉 거렸다. 뒤이어 눈치 빠른 직원이 물과 샴페인을 가져왔다. 친구들은 소파에 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암만 생각해도 정훈씨 없이 너 혼자 드레스를 고르게 할 순 없지! 그래서 내가 차로 지아, 혜연언니까지 싹 끌고 왔어. 혜연언니는 곧 미국 떠나느라 회의중이었는데, 응급이라고 뻥치고 불러냈어. 하하하. 아 그런데 손님이 계셨네요. “


수민은 그제야 같은 공간에 서 있는 지연이 직원이 아님을 알았다.


”이분은 교사모임 선배님이셔. oo고등학교 강지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세희 친구 채수민이라 합니다. “


연이어 서로 인사했다. 인사가 끝나자 다시 찐 친구 모드로 돌아갔다.


”오우야 너 똥배 어쩌려고 머메이드 스타일을 골랐니! 우리 나이에 뱃살 몇 개월 만에 빼기 힘들다. 다른 거도 입어봐. A라인 드레스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


드레스를 뒤지며 혜연이 한소리 했다. 세희는 얼른 지연의 눈치를 봤다.


”내 눈엔 이쁘기만 한데? “

”많은 여성들이 머메이드 라인에 로망이 있긴 하지. 잘록한 허리, 섹시한 엉덩이 라인에서 허벅지까지. 이건 뽀샵해주는 웨딩화보 촬영때 한번 입고, 본식용은 이걸로 입어보자. “


혜연은 A라인 드레스 한벌을 골라 세희에게 내밀었다. 머메이드를 추천했던 지연의 기분이 언짢았지만, 일부러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추천한거니 상관없었다. 지연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세희야. 이것저것 다 입어보고 골라. 친구들 왔으니 이제 난 들어갈게. 친구들과 천천히 예쁘고 잘 어울리는 드레스 찾아. 난 이만 가볼게. “

”선배님 가시게요? 끝나고 식사라도 함께 하고 가세요. “

”아니야 다음에. 아까 할 일이 있었는데, 혼자라 해서 얼른 나왔던 거야 “

”죄송해서 어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다음에 밥먹으면 되지. 드레스 입은 사진 보내줘. 친구분들도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뵐게요. 반가웠어요.“


지연은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들도 그녀를 잡았지만 지연은 드레스샵을 나섰다.


”미리 연락이라도 먼저 하고올 걸 그랬네. 미안해 세희야. 난 너 혼자 있는 줄 알고.“


수민이 사과했다.


”아니야 괜찮아. 아까 통화했는데 갑자기 오셔서 따로 너네에게 연락할 기회가 없었어. 마칠때쯤 친구들이 올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씀 드리긴 했어. 아마 이해하실거 같아. 혼자있는 동안만 같이 계시다가 간다고 하긴 했었는데......“


그렇게 급히 나간 지연이 마음에 걸렸다.


”이미 가셨는데 어쩔. 얼른 다음 드레스 입어봐.“


혜연이 샴페인 한모금 들이키며 이 분위기를 정리했다. 처음 본 사람이지만 어쩐지 지연의 기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리로 나온 지연은 휴대폰을 꺼내 정훈에게 문자했다. 세희의 웨딩사진 한두장을 첨부했다.


‘어디야?’

‘오늘 고교 동창모임. 세희랑 같이 있어요?’

‘나왔어. 세희 친구들이 몰려와서 불편해서 나왔지.’

‘근처에 누가 있어요?’

‘아니’

‘괜찮아? 거길 왜 갔어.’


지연이 혼자인 것을 알고 정훈은 평소대로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게. 그냥 보고싶었어. 너랑 결혼할 여자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

‘내가 10살 어리고 싱글이었으면, 넌 나랑 결혼했을까.’

‘프로끼리 왜 이래. 그런 망상할 틈이 있으면 한 숨 자는게 낫겟다. 하하 ’


정훈은 농담하며 대화를 끊었지만, 갑자기 불안해졌다. 적어도 그가 아는 지연은 쓸데없는 상상이나 필요없는 말을 하는 여성은 아니었다. 물론 그동안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우유부단한 정훈의 성격에 어울리는 강단있고 리더쉽있는 지연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연애나 결혼을 상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정훈이었다. 서로 필요에 의한 관계. 깔끔한 관계. 그게 다였다.


‘풋.. 그냥 해 본 말이야. 우리 만남도 얼마 남지 않은거 같은데 오늘 보면 어떨까?’

‘오늘은 늦게 마칠거 같은데 어쩌지?’

‘올 때까지 기다릴게. 네 집에 마지막으로 가도 돼?’


마침 오늘은 세희가 드레스 피팅 후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세희의 아파트에서 잔다고 했었다. 정훈이 과음한다면 친구들과 밤 늦게 집으로 귀가할 수 있기에 세희가 정훈을 배려한 거였다.  


‘그래. 그럼 집에 가 있어. 좀 늦을텐데 괜찮겠어?’

‘괜찮아.’

‘알았어. 내가 2차 가기 전에 핑계대고 들를게. 여기 집에서 가까워. 되도록 일찍 갈게.’


정훈은 지연의 귀가시간을 위해 너무 늦게까지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안되요. 그냥 들어가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연이 오라고 하면 언제라도 항상 달려갔던 지난 삼년의 습관때문에 그녀를 보내지 못했다.


한편 ‘되도록 일찍 갈게.’ 이 마지막 문구에 지연의 마음이 이상하게 요동쳤다. 정환의 집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직은 이전 번호와 같았다. 정환의 집에 들어간 지연은 조금 달라진 그의 집을 둘러봤다. 거실 쇼파와 커피테이블, 바닥 카페트, 못보던 커피머신, 세희 정훈의 커플 사진, 안방의 침대, 모두 새 물건이었다. 지연이 처음 보는 낯선 물건들 속에 정훈의 컴퓨터만 그대로라 그 기계가 반가웠을 정도였다.


이렇게 꾸며놓은 집이 만약 지연과 정훈의 신혼집이었다면. 되도록 집에 일찍 오고 싶어하는 정훈과의 신혼생활을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주방에 가 찬장을 열어 와인잔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레드 와인병 하나를 꺼내 잔에 따랐다. 그 와인은 정훈과 지연이 자주 마시던 비싸지 않은 캘리포니아산 피노 누아르였다.


이상하게 싫었다.

이 밤이 어쩌면 그와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다는게 싫었다. 세희에게 정훈을 뺏기기 싫었다. 하지만 지연이 정훈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가정을 깨고 싶은 생각을 단 1초도 한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내가 욕심이 많구나. 아님 질투하나? 나이들어 뭐하는 짓이니."

 

지연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하며 피식 웃었다. 질투? 자신이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황망했다. 자신은 이 남자가 떠날 때 언제라도 쿨하게 보낼 수 있을거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이 오니 싫었다. 자신은 훌륭한 엄마고, 완벽하고 존경스러운 교사며, 멋진 아내라 생각하며 살았다. 지연의 인생은 언제나 원하던 바를 이루며 계획대로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다 믿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 잡고 지내왔던 지연이 지금 지층이 흔들리는 땅위에 서 있는 양 몹씨 흔들리고 있었다. 앞으로 정훈을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벌써 두렵고 마음이 아파왔다. 그에 대한 연민인지, 혼자 남을 자신을 걱정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정훈의 신혼집에서 우연히 혼자 시간을 가지게 된 지연. 그 곳이 불편했다. 


'지난 삼 년 내 남자집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남의 집에 있는 불청객 같네. 풋'


와인을 한모금 더 마셨다.

정훈의 신혼집과 곧 하게 될 그와의 이별이 지연을 혼란스럽게 했다. 보수적이던 지연이 사회적 도덕과 윤리 따위를 떠나 왜 정훈을 만나게 되었을까. 왜 욕심을 채우고 여전히 채우고 싶어 할까. 뭐가 모자라서.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와의 관계, 그녀의 삶. 

가장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우러나오는 단어가 있었다. 외로움.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에 와인을 한모금씩 마시다 보니 거의 한 병을 들이켰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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