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혜연이야기
공허하고 어두운 우주 속 공간에 마냥 떠다니던 혜연이 눈을 떴다.
그녀의 왼팔에는 링거가 꼽혀있었다. 조금 전 들었던거 같은 목소리, 진철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언니, 언니 괜찮아?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
” 어.. 지아야. 여기 어디니. “
혜연이 돌아보니 병실이었다. - <한혜연_2> 전편
혜연이 돌아보니 병원이었다.
혜연이 병원에 있는 동안 썰리와의 논쟁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다른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혜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도를 했다느니, 죽었다느니. 아프지도 않은데 거짓으로 병원에 입원해 숨은거라는둥, 그들은 정말 혜연이 죽기라도 바라는건가 싶을 정도였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항상 '그냥' 잘 지내던 혜연이 어쩌다 인플루언서가 되었고, 불과 일주일전까지만 해도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그들을 위해 혜연은 매일 땀흘려 컨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난 열흘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와 날벼락에 혜연은 현실같지 않은 황망한 세상에 살게 되었다.
우선 아들 율이 걱정되었다. 엄마는 죽지 않았어, 엄마는 그런 사람 아니야. 직접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통화 목소리로만 전할 수 밖에 없었다.
병원 밖은 유튜버들이 영상을 마구 찍어대는 바람에 얼굴이 알려진 율의 병원 방문을 혜연이 말렸다. 대신 가족 중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진철이 회사 휴가를 내고 율이를 보살폈고, 병원에서는 혜연을 지극 정성 간호했다.
선을 보고 결혼한 후 10년간 함께 지내온 남편이지만 그가 가족을 이렇게 보살피는 상황 또한 낯설었다. 결혼했고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거의 별거한 부부 같았다. 혼자만의 생활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각자의 삶을 살다보니 부부간의 정이나 애틋한 사랑은 없었다. 혜연에게는 그런 관계가 오히려 더 편했다.
룸메이트처럼 한 집에서 각방을 쓰며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지내던 부부였다. 진철은 일년에 두세 번 율이를 위해 가족여행 갔었고, 혜연의 각종 파티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진철은 사업가 집안의 셋째아들로 집안 대소사와 회사관련 행사가 많았는데, 그 때 혜연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며 아내 역할을 할 뿐이었다. 부부로서의 책임은 그 정도뿐이었다. 그 외에는 룸메이트와 다름 없었다.
이는 두 사람 모두 합의하에 이뤄졌던 관계였다. 진철 또한 선을 보는 그 날부터 혜연에게 따로 기대했던 것은 없었다. 진철도 혜연처럼 모든 것을 가진채 태어나 풍족하게 살았고, 셋째로서 가업에 대한 책임감도 덜 했다. 그 또한 혜연과 같이 그냥 잘 지내고, 적당히 행복하게 삶을 지내던 인물이었다. 부부관계 또한 지난 10년 그냥 적당히 알아서 잘 보내던 참이었다. 서로의 삶에 방해되지 않고 부담주지 않은 채, 부부싸움 한번 없이 지내고 있었다. 사실 룸메이트도 10년동안 한번쯤 싸울수 있다. 두사람은 비지니스 관계라 해도 무방했다.
일반 룸메이트와 다른게 있다면 율이라는 공동으로 책임져야할 자녀가 있다는 점이었다. 부부가 아닌 부모로서의 활동은 두 사람 모두 적극적이었다. 함께 운동회나 발표회등은 두 사람중 적어도 한명은 꼭 따라다녔다. 두 사람 모두 율이만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다정한 부모였다.
그런 남 같았던 진철이 이렇게 나서서 혜연과 율을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혜연은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 든든했다.
혜연이 병실에서 눈을 뜬 후 각종 검사를 받았다. CT는 물론 MRI 촬영에 피검사도 재차 여러번 했다. 의사도 남편 진철이 상담을 하고 올 뿐 별 다른 말은 없었다. 혜연은 어쩐지 불안했지만 표를 내지 않고 기다렸다. 무슨일이 있으면 이야기 해주겠지.
진철이 고용한 변호인단은 그 사이 바깥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댓글 부대가 단 글들을 내리고, 선을 넘은 댓글은 고소했다. 그러나 사건의 논쟁인 썰리와의 관계와 문제는 어떠한 행동도 가하지 않고 주의깊게 보고만 있었다. 혜연의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진철은 화가 나 당장이라도 썰리에게 여러가지 죄값을 물어 구치소에 넣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혜연이 병실 창문 밖으로 화사한 오렌지 빛깔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진철이 병실로 들어왔다.
회사갈 때 매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앞머리가 흘러 내려져 있었다. 항상 목 끝까지 채우던 와이셔츠의 단추도 몇 개 풀어져 있었고, 소매는 언제나처럼 걷어부쳐져 있었다.
‘하루가 피곤했나.’
그 날따라 유독 지쳐보이는 진철의 얼굴을 보며 혜연은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괜한 고생을 안겨 준 듯 해서 미안했다. 진철은 병실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 앉으며 아무말 없이 혜연을 마주 봤다. 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완전 괜찮아요. 진작에 퇴원해도 될 것 같았는데. 언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오늘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검사 결과 다 나왔어.“
”정말? 율이한테 연락해야겠어요. 지난 며칠 할머니집과 외가댁을 오가느라 율이도 힘들었을텐데.“
진철이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혜연의 눈을 지그시 바라 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후그는 무겁게 입을 뗐다.
”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썰리양 관련, 다른 하나는 당신 관련.“
혜연은 그의 짧았던 침묵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의 눈을 되바라보며 난 준비됐으니 이야기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썰리양은 당신을 많이 부러워했던거 같아요. 결국 그 감정이 질투와 시기, 샘을 불러왔고 또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감정적으로 일으켰던거 같아요.“
”저를 부러워했다고요? 단지 질투때문에 저를 부셨다고요? 썰리가 모자란게 뭐가 있어서?“
”사람마다 부러움과 질투의 정도가 다르겠지. 아마도 유복하고 행복하게 자라온 당신의 성장배경부터 외모와 지금의 인기까지 모두 시기했을지도. 사건 직전에 모든 럭셔리 브랜드가 당신만 협찬하고, 패션쇼에도 당신만 초대해서 그동안 쌓였던 모든 질투와 샘이 그런식으로 터진 듯 해요. 어리석은 짓을 했지. 그리고 중간에 두 사람을 이간질한 무리도 있는거 같아.“
남의 일에 별로 관심없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진철은 본인의 일인 양 심각한 모습으로 썰리 이야기를 계속 했다.
”우리 회사 법무팀에서 썰리양 회사로 고소장이 들어갔어요. 그들이 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계략이고 모함을 위한 과장이었으며 결국 당신 명예뿐만 아니라 뷰티제품 중소기업들의 브랜드 이미지도 심하게 훼손시켰어요. 아직은 썰리 회사로 문서가 들어가고 있지만, 썰리 개인에게도 치명타를 던질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면 끝까지 가 볼게요. 당신 이렇게까지 만든 그 사람 나도 용서못해.“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혜연의 편이었는지 그녀도 몰랐다. 항상 혜연에게 별로 관심없던 남의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남들처럼 애틋하게 사랑해서 결혼한 내 편, 그런 남편처럼 보였다. 혜연의 가슴이 뭉클했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뭐예요?“
”....... 당신 주치의와 그외 다른 전공의들과 면담하고 왔어....“
이상하게 진철이 뜸을 들였다. 혜연은 그런 진철을 가만히 보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혈액암이래...... 어떻게 말해야할지 망설였지만, 의사가 아닌 남편인 내가 먼저 이야기 하는게 맞는거 같아요. 미안해요. “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 의사 면담 이후 진철은 혼자 병원 계단에서 한참 울었다. 그런데도 지금 다시 눈물이 차 올랐다.
”.......“
혜연은 그냥, 그냥 살던 약간 무료했던 과거의 삶이 그리웠다. 법적 소송과 암, 모든 일이 한번에 터져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보, 일단 우리 집에 가요.“
혜연은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그 후 몇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혜연은 온 집안을 뒤집고 정리했다. 버릴 물건들을 정리하고, 거실의 인테리어도 싹 바꿨다. 몸과 정신을 바쁘게 하고 싶어 자꾸 일을 만들었다. 그래도 혜연에게 일어난 일이 와닿지 않았다. 이 모든일들이 여전히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는데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진철은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켜봤다. 모든 항암 치료 준비는 사실 끝나 있었다. 그는 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초기라 회복 가능성이 높다는 다소 긍정적인 결과를 받았기에 혜연에게 조금의 시간을 줄 수 있었다.
진철과 혜연은 오랜만에 한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우리 얼마만이예요 단 둘이 와인마신게?“
” 선 본 후 데이트 할 때였던가?“
혜연도 오랜만이라 생각하며 와인잔을 입에 댔다. 창밖 야경이 아름다웠다.
”내가 당신에게 너무 무관심했던건 아닌지 요즘 후회스러워요.“
” 당신 무슨말이예요. 우리 선 보는 날 각자 독립생활에 만족하고, 서로 존중해주는 성향들인거 뻔히 알았으면서. 그래서 결국 결혼생활도 별 탈 없이 지내왔고. 덕분에 부모님 잔소리도 안 듣고, 나 편하게 잘 지냈는데? 알잖아요, 진철씨가 너무 관심줬으면 진작에 답답하다고 도망갔지.“
”미안해요.“
마지막 문장은 웃으라고 혜연이 농담한건데 진철이 심각해졌다.
”아이 그럼 나도 미안하게? 와이프라는 사람이 매일 일 한답시고 야근하고, 해외 촬영다니고. 우리 그런거 알고 결혼했쟎아요. 우리 미안해 말기. 오늘 한강 야경이 이쁘네요.“
”마음은 정했어..? 항암 치료 할거죠?“
”내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생각해보니 우리가 함께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 병실에 누워있는거 보니까 하나하나 떠올랐던거 있죠.“
오늘따라 남편 진철이 귀여워보였다. 혜연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얼굴을 진철쪽으로 내밀었다.
”정말? 뭐가 제일 하고 싶은데요?“
”많지. 함께 하와이도 가고싶고, 팔짱끼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남들하는 데이트 우리 안 해봤쟌아요.“
”그러네 우리 그런거 안 해봤었네. 우리 이제 해요. 내일 당장 극장가요 우리!“
”그럴까? 당장 예약할게요.“
그 때 진철이 주머니에서 큰 봉투하나를 꺼냈다.
”설마 벌써 영화 티켓을 샀다고요? 말도 안돼!“
혜연은 설마하는 눈빛으로 봉투를 열어 티켓을 꺼냈다. 초대장이었다.
<패션과 화해의 밤>
VIP 손님으로 귀하를 초대합니다.
from Joon
날짜를 보니 이번 주말이었다. Joon은 실명이 한현준으로 혜연과 친한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는 유명 고급 브랜드 회사 유럽 본점에서 부수석 디자이너까지 지낸 감각좋은 실력파 패션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한국에 귀국해 본인 브랜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하하 영화 티켓은 곧 예매할게요. 이번 일로 현준형이 많이 안타까워해요. 그동안 당신과 썰리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나봐. 이번에 형이 스페셜 패션쇼에 당신과 썰리를 초대했어요.“
”싫어요. 다신 그 아이 안봐요. 내가 어떤일을 당했는데.“
세상에서 암매장 당하던 기억이 떠올라 혜연은 괴로웠다.
”이대로 활동 접고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퇴장할거예요?“
”어차피 암으로 죽을 수도 있는데, 그게 어때요.“
혜연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입으로 내뱉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뚝 떨어졌다.
”죽다니 누가 죽어. 율이 엄마, 당신은 내가 살릴거야. 싫으면 안가도 되요. 나도 내키지 않지만 현준형 정성을 봐서 당신에게 조심스레 물어본거예요. 그런데, 내가 당신 성격 아는데, 이대로 썰리씨를 구치소에 넣고 싶지도 않쟎아요. 삼일안에 연락해주면 되니 생각해봐요. 당신 입을 의상과 모든 악세서리는 최고급으로 다 준비해뒀으니까 염려말고요.“
혜연을 모를 줄 알았는데 그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진철말대로 혜연은 썰리와 법정공방을 하고 그녀를 구치소로 내동댕이 치고 싶지는 않았다. 많이 좋아했었던 동생이고 10살이나 어린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 불쌍하기도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기와 명예, 수입도 많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만 부러워하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다. 자신의 것과 바꿀 수 없는 남의 인생인데, 자신의 영광은 뒤로 한채 남의 것만 바라보던 불쌍한 영혼이었다.
명품 브랜드들이 고작 혜연의 외모와 집안 배경만 보고 좋아했을리 없다. 혜연의 인기와 퀄러티뿐만 아니라 채널의 마케팅 전략, 미래 혜연의 브랜드 전망등 사업관련 모든 정보수집 및 분석을 통해 그들을 협찬한다. 썰리와 그 팀은 어리석었다.
혜연이 썰리덕에 온갖 잔인한 말부터 거친말을 들으며 마녀사냥 당했지만, 그녀를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제면 썰리는 반성하고 있을까. 이제면 연락올까. 썰리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못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 쉽게 화해 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감히 당신을 건드린 죄로 아주 호되게 죄값을 치르게 하고싶어 미치겠지만, 당신을 위해 참고 있어요. 화해냐 감옥행이냐.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난 무조건 당신편이야. “
혜연의 생각을 읽고있는 듯 진철은 혜연보다 더 화 난 말투로 썰리에 대해 역정 냈다. 혜연 대신 시원하게 쌍욕도 해 주었다. 그런 진철을 보니 웬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철이 이런 사람이었나.
그냥 말없고, 무뚝뚝하고, 사무적이며 차갑던 사람이라 여기며 살았다.
그 때 진철이 갑자기 혜연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끌어내 그의 무릎에 앉혔다. 혜연은 민망해 주변을 살폈다. 진철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폭 껴 안았다.
”여보 우리 치료한 후에 율이랑 우리 셋,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요. 만약 당신이 곁에 없다고 생각하면 나 숨을 못 쉬겠어.“
혜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날, 두 사람은 오래된 권태기 부부로서가 아니라,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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