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세희 이야기
‘내 나이 막 39살. 드디어 짝꿍을 만난 것일까.’
세희는 창 밖에 흩날리는 하얀 물체를 보았다. 눈이다. 그와 나는 어쩌면 운명적 만남일까.
그때 정훈의 따뜻한 입술이 세희의 볼에 또 닿았다. 그녀의 볼이 마치 용암이 끓어오르듯 활활 타는 느낌이었다. 39살에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구나. 그리고 그의 입술은 세희의 입술에도 닿았다. -지난 <백세희> 편-
눈꽃 날리던 그 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2024년 일월 어느 추운 날,
세희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고백을 받았다. 듬직한 정훈을 짝꿍으로 만나게 되어 행복했다. 그이를 만나기 위해 이제껏 기다려왔나 보다..라는 낯간지러운 오래된 대사가 마치 세희를 위한 문구가 된 것 같았다.
봄이 되자 학교 운동장에 한두 그루 서 있는 나무에서 벚꽃이 날리고, 등굣길 인도가에 있는 개나리들은 마치 세희를 환영하는 듯했다. 정훈과의 연애는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그이와 가로수길도 걸었다. 몇 년 전 한참 그곳이 인기 있어 미디어에 등장할 때면 남자 친구와 꼭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산들바람 맞으며 가로수길을 걷다가 향긋한 커피에 티라미수를 먹었다. 또 걷다가 쇼핑도 하고 서점에 들러 책도 골랐다. 가로수길이 데이트 코스로 유행이 지났다지만 어린 커플들이 많이 보였다. 정훈이 예약해 놓은 팬시한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루프탑 바에 가서 탁 트인 서울 전망을 바라보며 칵테일을 마셨다. 곁에 살짝 기대면 정훈의 듬직하고 따뜻한 어깨가 있었다. 칵테일 보다 더 달콤한 키스는 좋았다.
”그거 알아요? 학생들이 날 놀려. 어떤 학생은 선생님 연애 중이냐며 대놓고 묻는 거 있죠. 요즘 아이들은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니깐. “
”하하하하 어떻게 알아 아이들이? 일부러 소문낸 거 아니에요? “
정훈은 장난기 가득 농담을 했다.
”그럴리가요.“
”이뻐요. 연애를 하면 더 이뻐진다쟌아요. 세희씨는 원래 이뻤지만 말야.“
연애 시작한 지 석 달이 되어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씨를 붙이고 동갑인지라 반말을 하지만, 존댓말을 섞어 쓰는 버릇은 여전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둘의 관계는 썸타며 밀당할 시간을 건너뛰고 온전히 평화로운 연애 상태로 접어들었다. 굳이 그런 것에 에너지 뺏길 이유가 없었다.
정훈과 세희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데이트하던 중 자연스레 백화점을 들러 살림 관련 물품을 구경한다던지, 주방 전자 제품도 둘러보았다. 가끔 예쁜 소품을 보면 세희는 그것을 사다가 혼자 사는 정훈의 집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요리해서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으며 영화 한 편 보는 하루의 마무리가 늘 행복했다. 그의 훈훈한 세제향이 도는 셔츠를 입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나른한 일요일 아침도 좋았다. 이런 하루하루라면 그와의 결혼 생활도 상상할 수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날도 여느 주말처럼 전날 데이트 후 함께 밤을 보낸 뒤 정훈의 집 거실 소파에 둘이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커피 한 모금 마시다 무심코 책을 읽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그때 세희는 다짐했다.
‘이 남자라면 괜찮을 거 같아.’
하루라도 빨리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훈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세희를 돌아보며 이마에 키스 해 주었다.
”우리 함께 살까? “
‘헐 함께 살자.. 라니! 이게 무슨.. 여자가 먼저 할 말투니 세희야!‘
세희는 얼굴이 붉어졌다.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이렇게 창피할 줄 몰랐다. 정훈은 그런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 나 부족한 게 많아요. “
’ 그래서 예스야 노야?‘
의외의 대답에 세희가 혼란스러웠다.
”부족한 나지만 세희 씨만 좋다면 이렇게 둘이 계속 이쁜 거 보러 다니고 맛난 거 먹으러 다니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내게 조금의 시간을 줄래요? 하지만 내년 안에는 우리 결혼하자. “
정훈의 품속에서 세희는 눈을 깜빡였다. 답은 예스인데, 목소리는 차분한 듯 하지만 ’그런데, 하지만‘이란 접속사를 쓰며 말을 잇는 그의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어떤 조건이 끼어있는 느낌이 찜찜했지만 세희는 개의치 않았다.
”좋아요. “
세희는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런 세희가 사랑스러웠는지 정훈은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 아침 햇살아래 두사람은 키스만큼 진한 사랑을 나눴다.
세희와 정훈은 여전히 교사모임에 나갔다. 지연선배와 함께 스터디를 하고 모임 후에 여전히 셋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지연은 두 동갑내기 교사들이 함께 커플이 된 것을 축하해 줬다.
”아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사귀지. 지난 2년 둘이 시간만 낭비했네. “
”아우 참 선배니임.“
”....... “
아무 말 없이 한참 맥주를 들이키던 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이 참에 결혼도 하지 그래. 나이도 나이인데.“
둘만 남자 지연은 반농담으로 세희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결혼 이야기 했어요. 선배님만 아세요. 아직 부모님들께 말씀도 안 드렸는데. 어쩌면 올해 말에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올해 말? 이제 석 달 만났는데? 그리고 벌써 4월이야 자기야.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
” 사실 정훈씨는 내년 안에 하자고 했는데,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나 봐요. “
지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세희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 “
”저도 잘 모르지만, 아무리 남자 친구이라도 프라이버시는 안 건드리는 편이라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
”그런데 자긴 올해 안으로 서두르는 이유가 있어? “
”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내년에 저도 서른 후반이 되는데 할 수 있다면 올해 말에 하고 싶어요. 딱히 늦춰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는 거 같고. “
”......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정훈이 참 성격 좋고 성실한 후배지만, 그래도 결혼은 그렇게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사람은 사계절을 사귀어보고 결혼해야 한다쟌아. “
정훈이 돌아오는 참에 둘의 대화는 끊겼다.
” 두 사람 여름에는 바닷가 여행도 가고, 겨울에는 눈구경 가. 연애할 때가 좋을 때다. 결혼 20년 차 되면 알콩 달콩이 사라져서 연애 때 감정, 그게 부럽다 부러워. 결혼한 후에 후회하지 말고 즐겨. “
”그러고 보니 저희 둘 아직 한 번도 함께 여행 간 적이 없네요. 그렇죠 정훈 씨. “
”...... “
”왜? 급할 거 없어. 이제 사귄 지 얼마 안 됐는데 천천히 여행 가면 되지. “
”정훈씨가 은근히 바쁘네요. 정훈씨 우리 여행가자.“
정훈이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응 그래. 휴가여행은 나중에 계획하자. “
”정훈씨 그전에 우리 주말여행이라도 가면 안 돼? “
”곧 5월이 오면 쉬는 날이 많아 연차 쓰기 좋지 않을까? “ 지연이 거들었다.
”그러자 곧 5월이니 어린이날끼어서 잘하면 며칠 쉴 수 있겠다 정훈씨“
세희는 여행 이야기에 신이 났다. 선배 지연의 지지가 이렇게 든든할 줄은 몰랐다며 지연이 고마웠다. 오늘따라 정훈은 대답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쿵
그때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세희가 돌아보니 지연이었다. 그녀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다가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정훈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일어난 지연은 제대로 걷기 힘들어 보였다.
”아 아파. 아무래도 발목이 접질렸나 봐. 나 먼저 들어가야겠는데. 둘이 하던 여행 이야기 마저 하고 데이트 잘하고 가. “
지연의 목소리에 힘도 없고, 기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정훈씨가 부축해서 모셔다 드리는 게 어때? “
근심 어린 눈빛으로 세희는 지연을 걱정했다.
”아니야, 가다가 약국에 들러 파스 사 가면 돼. 에고 나이가 이렇게 무서운 거야. “
”정훈씨가 차로 댁에 모셔드릴 거예요. 자기야 여기는 내가 정리하고 갈게. 도착하면 연락 주고. “
”세희씨....... “
”아 난 정말 괜찮아. 도착해서 괜찮은지 알려줘요. “
지연을 부축한 정훈이 세희를 바라봤다. 세희와 함께 있고 싶은 눈치였다. 곰처럼 듬직한 체격이라 지연샘을 가볍게 지탱하고 있었다.
”지연샘 아프시겠다. 얼른 모셔다 드려. 가셔서 찜질하세요 안되면 병원에 가시고요. 조심하세요 선배님. “
세희는 지연의 발목이 덧날까 두 사람을 얼른 가게에서 몰아내 보냈다. 그리고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 후 한참이 지나도 정훈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다.
세희는 문자를 적다가 내려놓았다. 응급실에 갔나, 집에 잘 찾아갔나, 정훈은 집에 잘 도착했나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지만, 술도 한잔 했고 밤도 늦었고 피곤해서 잠들었을 수도 있으니 내일 연락하자며 세희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한편, 가게를 나온 정훈은 양손으로 지연을 부축했다.
”지연선배, 그러고 보니 저도 술을 마셨네요. 택시 잡아드릴게요. “
아무래도 뒤에 혼자 남은 세희가 신경 쓰였다.
”대리 부르면 안 될까. “
”일단 댁으로 가서 쉬세요. 발목 더 나빠지면 어쩌려고요. “
”왜 세희가 걱정돼? “
택시를 찾던 정훈이 지연을 내려다보았다.
”...... 그럼 일단 약국으로 가자. “
”네, 약국에 가서 우선 응급처방부터 받아요. “
정훈이 부축한 채로 두 사람은 약국이 보이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훈은 양손으로 지연 어깨를 잡았고, 지연의 몸은 정훈에게 살짝 기댄 채 부축되어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 지연은 정훈의 왼손에 자신의 왼손을 얹었다. 그리고 꼭 쥐었다.
”정훈아 오늘은 둘이 있고 싶은데.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거 같아. 오늘 오랜만에 나랑 있으면 안 돼? “
지연이 촉촉한 눈빛으로 정훈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정훈의 표정이 미묘했다. 지연은 대리운전사에게 연락하며, 약국으로 가던 발걸음을 살짝 돌려 도로가에 주차된 정훈의 차로 돌렸다. 절뚝이던 그녀의 걸음이 천천히 일반걸음으로 돌아왔다.
정훈은 지연과 함께 하는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치 그런 유혹 당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 같았다. 그는 이미 길들여진 사람처럼 그녀의 행동에 따랐다.
금세 도착한 대리기사가 운전한 정훈의 차는 지연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평소 자주 가던 모텔로.
그날 밤 잠을 청하던 세희는 이상하게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일어났다. 이상한 불안감에 주방으로 가 물 한 컵을 들이켰다.
*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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