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세희 이야기
정훈의 신혼집에서 우연히 혼자 시간을 가지게 된 지연. 그곳이 불편했다.
'지난 삼 년 내 남자집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남의 집에 있는 불청객 같네. 풋'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정훈의 신혼집과 곧 하게 될 그와의 이별이 지연을 혼란스럽게 했다.
보수적이던 지연이 사회적 도덕과 윤리 따위를 떠나 왜 정훈을 만나게 되었을까. 왜 욕심을 채우고 여전히 채우고 싶어 할까. 뭐가 모자라서. 완벽한 가정과 존경받는 직장, 원하던 공부와 성공. 모두 그녀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졌다. 얼마 전 승진도 했다. 어릴 때 꿈꿨던 인생의 목표를 오십이 거의 다 되어 성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연은 불륜이지만, 정훈은 총각이므로 불륜은 아니라 여기며 지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특히 한국땅에서 유부녀가 섹스 파트너를 두는 일은 이혼감이란 것을 지연도 알고 있었다. 이제 약혼녀가 생긴 이상 정훈마저 불륜남으로 만들었다. 그러기 전에 그를 보내야 하는 걸 아는데,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질 수는 없지만, 남에게 보내기 싫다는 생각. 스스로의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와의 관계, 그녀의 삶.
가장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우러나오는 단어가 있었다. 외로움.
지연의 외로움을 정훈이 채워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육체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눈물 한방울이 흘렀다. 채워지지 않는 듯한 인생이 지치고 서러웠다.
세희. 좋은 아이지만 싫다. 세희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떠올리면 자신이 더 나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에 와인을 한모금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거의 한 병을 들이켰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렸지? “
동창모임에서 얼큰히 취해있던 정훈이었다. 지연도 와인 한 병을 거의 비운 터라 취기가 올라왔다. 일찍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탓인지 밤이 늦지 않았다.
정훈은 약속대로 친구들이 2차 술집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집에 들렀다. 가정이 있는 그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었고, 또한 마음먹었을 때 지연과 이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집에 들렀다. 그런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가장 프라이빗한 공간이 본인의 집이기에.
그런데 막상 와보니 지연이 취해있었다. 정훈은 지연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에어컨 틀지 않은 여름날이 더웠다. 더운 공기에 정훈의 취기가 훅 올라왔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지연을 집으로 보내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녀를 부축했다.
지연을 잡아 세우려는데 그녀의 셔츠 사이로 젖가슴이 살짝 보여 멈칫했다.
”정훈아...... 가지 마.”
놀란 정훈이 지연을 쳐다봤다. 지연이 유혹하는 눈빛으로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세희가 신혼집에 새로 장만해 놓은 침대로 다가갔다.
한편 세희는 드레스숍에서 나와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맛키>에 들러 한참 수다했다. 친구들과 헤어질 무렵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세희는 정훈이 집에 없을 거라 짐작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보니 3차 4차까지는 기본일 테니 말이다. 특히 그날은 정훈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니 분명 새벽 두 시 이후에 들어올게 틀림없었다.
”세희야 집에 데려다줘? “
수민이 물었다.
”아니 정훈 씨 집에 들렀다 가려고. 아까 드레스숍에서 가져온 결혼식 관련 물품인데, 가는 길에 그 집에 두는 게 나을 거 같아. “
세희는 물품을 넣어뒀던 차 트렁크를 열으라는 손짓을 했다.
”가방 꽤 크던데. 내가 데려다줄게. “
” 좀 돌아가야 하잖아. “
”그냥 타! “
세희는 뒷좌석 지아곁에 앉았다. 보조 운전석에 앉은 혜연이 차에서 들을 음악을 고르고 있었다.
” 정훈씨 집에 잠시 놓고만 나올 거지? 그럼 그 집에 먼저 들르자. 렛츠고 “
” 그래 고마워. 얼른 가방만 두고 나오면 돼. “
세희는 큰 종이가방 두 개를 어깨에 메고 정훈의 문을 열었다. 당연히 집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한참 술집이든 노래방이든 유흥을 하고 있을 때니 말이다. 문입구에 가방을 두고 나가려는데 주방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 켜놓고 나갔나 보네. 친구들 기다리는데.’
귀찮았지만 그래도 불을 끄기 위해 신발을 벗으려는데 낯선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사이즈에 여자 신발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 신발이었다. 그때 세희의 등골이 싸했다. 조용한 집안 안방 쪽에서 작은 신음 소리를 들은 듯 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남녀의 호흡소리였다.
세희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다시 그 낯선 신발을 내려봤다. 그리고 안방 쪽을 다시 보았다. 세희는 본인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젠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명히 여자 목소리였다. 지연...... 선배? 순간 다시 신발을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봤던 지연선배의 구ㅉ샌들이었다. 숨이 막혔다. 설마.
세희는 아파트 문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대로 집을 나왔다.
‘설마. 아닐 거야. 지연선배일 리가 없어. 내가 잘 못 안 거야.’
세희는 현실을 부정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수민의 차를 탈 수가 없었다. 일단 문자 했다.
‘수민아 내가 정훈씨 집에서 할 일이 더 있네. 나중에 택시 타고 갈게. 오늘은 먼저 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수민은 휴대폰을 보더니 다시 세희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없어 아무도 없을 때 좀 더 정리해 놓고 가게.’
‘알았어. 신혼집이니 할 일이 많겠지. 너무 늦게 있지 말고 어서가. 필요하면 연락하고!’
수민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차를 다시 몰았다.
멀리서 떠나는 수민의 차를 보니 세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심정이 복잡했다. 지연이 일 확률이 크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 없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연은 두 자녀가 있는 가정을 가진 유부녀였다. 세희의 안방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세희는 걸을 힘도 없어 근처 벤치에 멍하니 앉았다. 머리는 이미 그 목소리와 신발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지만, 마음은 사실이 아니라며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길 바랐다. 집으로 다시 올라가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그래 내가 착각했을지 몰라.’
어두운 아파트 공원 벤치에 얼마나 넋 놓고 앉아 있었는지 몰랐다. 순간 두 남녀가 아파트를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대기 중이던 ㅋㅋㅇ 택시를 탔고, 남자는 큰길로 걸어갔다. 지연은 집으로 가는 것일 테고, 정훈은 다시 친구들 모임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세희는 얼굴을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오해라고, 착각이라고 고집부릴 수도 없었다. 세희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 버렸다.
알고 싶지 않던 진실을 보고 말았다. 세희의 발밑이 축축해지며 어두운 늪이 고이고 있었다.
다음날 일요일 이른 아침 세희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정훈이었다. 전날 밤 지연과 시간을 보낸 후 집을 나설 때 현관에서 큰 종이 가방 두 개를 봤기 때문이었다. 안에는 결혼 관련 물품들이 있었다.
”모른다고 하자. 세희는 내 신발인지 모를 거 아니니. “
”이러나저러나 내가 딴 여자랑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잖아. “
그 상대가 지연이란 걸 알게 되면 세희가 까무러칠 거 같아 걱정되었다. 반면 지연은 태연했다. 어차피 세희가 알게 되었다면, 어쩌면 둘이 헤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밤새 뜬 눈으로 보낸 세희는 어떤 변명이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 받았다.
” 자기 잘 잤어? 미안. 동창들하고 늦게 놀다가 연락 못했네. 어제 친구들과 잘 보냈어? 드레스 사진 왜 안 보내줬어? “
”...... “
물어볼 말은 많았지만 목이 매였다.
”사진은 함께 보려고 먼저 안 보냈어요. 턱시도 사진은 봤죠? “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브런치 먹자고 전화했어. 하루 못 봤다고 보고 싶다. 드레스 사진도 얼른 보고 싶고. 자기 좋아하는 OO 레스토랑 가자.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
”나 어제 잠을 못 자서 좀 쉬어야 할 거 같아요. 나중에 봐요. “
정훈의 전화를 끊은 세희는 깊은 수렁에 빠진 듯했다.
‘엄마 나 어떡해......’
걱정할 엄마 생각하니 그녀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세희는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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