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혜연 이야기
둠칫 둠칫
어둡고 희미한 조명아래, DJ가 요즘 트렌디한 라운지 뮤직을 틀고 있었다. 한두 명씩 사람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행사 건물 앞 거리에서는 연예부 기자와 파파라치, 유투버들이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도착 후 웰컴 드링크와 핑거푸드를 먹으며 칵테일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혹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패션계의 큰 손인 한현준이 개최한 특별 이벤트는 업계 유명인들 포함 백여 명 정도 참석한 이벤트로, 입구에는 <패션과 화해의 밤>이라 붙어 있었다.
작은 콘서트와 패션쇼를 접목한 친목과 예술을 겸한 이색 이벤트로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이 이벤트는 업계에 조용히 소문이 났다. 유튜브 공방 사건 발생 이후 처음 혜연과 썰리가 같은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위한 파티라는 소문에 모두가 주시했다.
혜연은 진철과 현준이 미리 준비해 둔 몇몇 의상 중 블랙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전투복을 하나하나 입는 느낌으로, 드레스를 착용하고 귀걸이를 달았다. 헤어숍에서 이미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후였지만, 혜연은 이벤트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마스카라를 한 번 더 올리고, 립스틱을 덧 발랐다. 립스틱을 클러치에 담고 손가락에 반지들을 만지작 거렸다. 진철이 혜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런 그를 혜연이 올려다보자 진철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안정시켰다. 곧 차문이 열리고 혜연은 레드카펫이 아닌 흰색 카펫을 밟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준 오빠가 레드카펫이 아닌 흰색카펫을 깔아놓은 이유는 분명 화해의 의미였으리라. 항상 그는 디테일이 많은 아티스트였다. 항상 소소한 것에서부터 그의 마음씀을 알 수 있었다.
진철과 함께 건물 내로 들어간 그녀는 혼자 비밀의 VIP 룸으로 안내받았다.
그날 그곳에는 특별한 방이 비밀스레 준비되어 있었는데, 소문대로 혜연과 썰리,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해 준비한 방이었다. 안에서는 밖의 패션쇼와 공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었다. 혜연이 들어서니 방안에는 두 사람이 칵테일잔을 들고 앉아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썰리와 현준이었다. 썰리는 잔을 들고만 있었고, 현준은 홀짝홀짝 두어 잔 째 들이키는 중이었다.
혜연은 썰리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썰리는 혜연을 바라보며 먼저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혜연은 그게 진심인지 가식인지 판단하려 했다. 우선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일단 현준은 중재자로서 두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공유하며, 갈등 해결 방법을 제안했다.
"너네두 알다시피 나 게이쟌아."
갑작스러운 첫 문장부터 현준은 혜연과 썰리를 당혹스럽게 했다.
현준은 게이였다. 그가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문화에 굵직한 남자 패션 디자이너가 몇 있었는데 조용히 활동하고 있었다. 소문에 유명한 몇 디자이너가 성소수자였지만, 당시 한국 사회 정서상 남자가 게이라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힐 수 없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들을 부모님도 걱정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 일도 두려웠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패션디자이너 중에 마크 제이콥스, 베르사체, 톰 포드등 슈퍼스타급 게이 디자이너가 여럿이었지만, 베르사체를 제외한 두 디자이너 또한 본인들의 성정체성을 대놓고 광고하지는 않았다. 다른 나라보다 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성소수자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현준이 게이였기에 그 독창성이 남들과 달랐을지도 몰랐다. 남성의 강함, 여성만의 화려한 디테일과 전체적인 우아함을 강조한 그만의 작품은 인정받았다. 현준은 유럽에 위치한 고급 유명 브랜드에 취직한 후 경력을 쌓았고, 한국 패션 잡지에서 그런 그를 가끔 인터뷰했었다. 업계에서 어느 정도 그의 인지도가 올라가던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떠오르는 신인 패션디자이너 10인에 들었다.
한국에 귀국 후 현준은 본인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키우고 있었다. 특별 워크숍을 열어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그의 감각뿐만 아니라 유럽 최고 패션쇼를 기획하고 참여했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현준이 유럽에서 돌아와 승승장구할 무렵 그를 질투시기했던 한 디자이너가 현준이 성소수자라며 언론에 흘렸다. 당시 몇 명 연예인이 이미 커밍아웃을 했지만 한국문화에서 여전히 낯설었다. 커밍아웃했던 연예인은 그의 용감함에 박수를 받았지만, 더불어 한동안 티브이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만큼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때라 현준과 그의 브랜드 이미지는 실추했고, 더불어 많은 손해를 끼쳤다. 당시 친했던 한 모델이 두 디자이너를 화해시켰는데,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대방은 사과는 커녕 남 탓을 했다.
”얘들아 사람 사는데 질투와 샘이 왜 없겠니. 있어도 돼.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어쩌겠니. 그런데 그 질투와 샘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악한 거야. 나야 워낙 실력이 출중하니 (재수 없지? 호호호) 프랑스로 돌아가 활동을 하면서 금전적으로 손해 본 문제도 해결했지만, 마음고생을 꽤 오래 했지. 그리고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지금 다시 자리 잡았어. 그런데 그 상대방은 어떻게 된 줄 알아? 인생에 나락으로 떨어졌어. 결국 남의 비밀을 이용해 간사하게 일을 하던 그 악한 사람은 업계에서 퇴출되고 본인 인생은 더 엉망 됐어. “
그리고 그는 썰리를 보며 이야기했다.
”아직 너네는 어려. 앞으로 충분히 변화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특히 너 썰리. 우리가 몇 번밖에 안 만난 사이지만, 난 썰리 이미지가 참 좋았거든. 이 쪽 여우들처럼 누구 뒤통수치거나 그럴 거라 생각지 못했단다.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난 너네 둘이 좋게 화해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건 우정 관련 이야기만도 아니야. 두 큰 정상의 인플루언서들이 이렇게 명예스럽지 못하게 사라지는 건 프로답지도 않고, 한국 패션뷰티계가 안타깝게 여기기도 한단다. 둘 다 다 큰 성인인데 이야기 좀 해보자. “
현준은 친근하게 이야기했다. 둘러 이야기하지 않고 요점만 딱 꼬집어 이야기하는 현준의 대화 스타일이 썰리의 가슴을 쿡 찔렀다. 현준은 코 맹맹한 소리가 섞여 나왔는데, 얼마 전 감기를 격하게 앓았단다. 그런 와중에 이런 행사와 화해 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혜연은 그의 정성과 마음이 감사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남의 입장을 공감하며 배려해 주던 다정한 오빠였다.
썰리는 한국, 유럽에서 유명한 대선배 앞에서 부끄러웠다. 자신도 그때 갑자기 미쳤었나 싶기도 하고, 여전히 혜연에 대한 선망과 질투가 없지 않았다. 자신처럼 행동했던 과거의 어떤 이는 업계에서 퇴출당했고, 더불어 인생에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현준말대로 아직 어린데, 이제 서른인데, 창피해하지 말고 자존심 부리지 말자.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겠는가.
썰리는 칵테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언니 진심으로 사죄드릴게요. “
미니스커트를 입고 힐을 신은 그녀의 무릎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현준과 혜연은 썰리가 요즘 MZ세대라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그런 행동을 할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왜 그랬니. “
사건 발생 때부터 줄곧 썰리에게 하고 싶던 질문이었다. 마음은 일어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그 질문이 먼저 나왔다.
”언니를 질투하고 시기했어요. “
"하... 단지 그뿐이니. 그런 감정 때문에 이런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고 진실로? 내가 거의 죽을 뻔했는데?"
”언니를 많이 좋아하고, 언니처럼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두가 언니만 바라보는데 샘이 많이 났어요. 이번에 패션쇼도 초대받지 못했고, 스폰서나 광고제휴도 많이 줄어서 질투심에 더 시기했었나 봐요. 모두가 저의 꼬인 콤플렉스와 자존심에서 시작된 거 같아요. 업계에서 퇴출하라면 나갈게요. 한 대 때리고 싶으면 때리셔도 돼요. 언니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큰 일을 저질렀어요. “
”일단 일어나. 소파에 앉자. “
미니스커트를 입고 맨 살로 바닥에 앉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손가락질과 모진 말을 듣게 만들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썰리가 여전히 미워서 말만 했지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신 현준이 그녀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넌 나를 죽음 문턱까지 몰고 갔어. 그런 무서운 댓글들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난 널 많이 이뻐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유튜브도 언론의 일종이야. 언론의 힘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해. 처음에 우린 재미로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시청자 수는 어마하게 커졌고 우린 인플루언서라는 타이틀을 받았어. 그 뜻은 우리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야. 즉 공인이 된 것이지. 언론은 사회의 안정뿐만 아니라 불안도 조성할 수 있어. 시청자들은 화면 속의 우리를 보고 판단하고 돌을 던지든 꽃을 던지든 한단 말이야. 넌 너의 사적인 질투와 샘에서 출발했다지만, 결국 공적으로 허구를 알리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타인의 인생도 짓밟으려 했다는 거. 그리고 언론인, 공인으로서 큰 잘못을 했다는 건 알아야 할 거 같아. “
”....... 깊게 뉘우치고 있어요, 언니. “
진심이었다.
”혹시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거나 우정을 불순하게 이야기 한 사람들이 있었니? “
썰리 머릿속에 그녀의 질투와 시기심을 불 지르던 몇몇 경쟁자들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 제가 부족한 탓이에요 언니. 누가 무슨 말을 하던 그 말을 들은 이는 저예요. “
눈물이 뚝뚝 무릎 위로 떨어졌다. 혜연은 그런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결국 현준의 보석 같은 역할로 두 사람은 화해했다. 그리고 그는 여러 생각과 의견을 공유했다. 서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콘테츠를 제작해 올리고, 더불어 함께 협업해서 콘텐츠를 찍는 등의 해결책과 함께 다시 재기할 것을 강요했다.
두 사람은 결국 현준의 의견을 수락하고,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콘테츠를 제작하여 올리며 팬들에게도 화해의 중요성을 알렸다.
두 사람의 영상은 곧 화제가 되었다. 처음에 팬들은 달갑지 않은 반응이었다. 사회에 한번 부정적인 파장을 일으키면 재기하기 쉽지 않았다. 대중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보고 들은 것 중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꾸준히 노력하며 공익광고처럼 사람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다 보니 시청자들에게 각인되어 긍정적인 이미지를 끌어냈다.
패션과 뷰티 관련 크고 작은 브랜드 회사들이 두 사람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업계 유명 인플루언서들이었고, 이 참에 노이즈 마케팅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협업을 권유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공동 콘텐츠를 제작하고 패션, 잡지 화보 촬영 및 인터뷰를 했다. 대부분 '갈등과 화해', '화해의 아름다움'이란 슬로건으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두 사람이 협업한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건이 바로 미국에 삼 주간 다녀와야 했던 긴 여행이었다.
”안 돼요! 당장 입원해야 할 사람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관계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미국까지 가야 하다니. 그것도 삼주씩이나! 암은 어쩌고. 그리고 그 사이 악화되면 어떡해요! 안 돼요. “
진철은 노발대발, 강력하게 반대했다.
혜연은 여태 이PD에게 혈액암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가장 바쁜 시기에 이PD가 일에 집중하지 못할 거라며 혜연은 진철의 입을 극구 막았다.
” 진철씨, 나도 미국행 관심 있어요. 그리고, 진짜 가고 싶은 이유는 당신과 함께 하와이 가고 싶어서예요. 전에 나랑 하와이 바닷가 가고 싶다면서요. 프로젝트 마친 후 우리 거기 들러 쉬고 와요. 나도 당신이랑 따뜻한 모래 위에서 칵테일 마시고 싶다고요. “
”그건 암 다 낫고 다녀와도 되잖아. “
”그게 보장이 안된다면? 장담할 수 없잖아요 우리. “
진철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 낫고 또 가면 되지! 나도 우리끼리 하고픈 일이 많아요. 우리 리스트 만들어서 나 다 낫고 나면 함께 하나씩 도장깨기 해요. 나 할 수 있어. 안 죽어. “
진철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런 진철을 혜연은 껴안았다. 혜연의 마른 뺨에 그의 눈물이 번져왔다.
”약속할게. 그 프로젝트 끝나면 항암치료하러 입원할게. 응? “
”대신 내가 함께 미국 모든 일정 동행해도 돼? “
"회사는 어쩌고."
"지금 그게 문제야."
혜연은 그를 더 꼭 포옹했다.
혜연과 썰리, 두 사람 모두 자유롭고 화려한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최고 패션 엑스포인 매직 MAGIC 라스베이거스에 방문해 유튜브에 홍보하고, 관련 지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팬 사인회를 했다. 연이어하는 뷰티 엑스포에서는 신상 제품을 둘러보고, 서로 메이크업을 해주며 깔깔대며 웃기도 하고 알콩달콩 진솔된 대화를 나누는 콘텐츠가 떡상했다.
행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라스베이거스에서부터 로스앤젤레스까지 로드트립하며 브이로그 외 유명 맛집과 커피숍 관련 콘텐츠를 촬영했고, 각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큰 반응을 얻었다.
그때 엘에이에서 두사람은 함께 팬들과의 작은 미팅 이벤트를 가졌다. 거기서 팬들과 함께 소통했는데, 사람들의 만남과 관계,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혜연과 썰리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 삼주동안 출장이자 화해여행을 하는 동안 소원한 감정 없이 이전처럼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스케줄을 남기고, 전날 밤 썰리의 문자가 혜연에게 도착했다.
[언니 와인들고 언니방으로 건너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진철씨는 잠들었으니 거실에서 조용히 한잔하자. 건너와.]
그날 일정을 마치고 화장을 지운 두 사람은 파자마 차림으로 조용히 만남을 가졌다. 썰리는 레드와인과 달달하고 고소한 인절미 과자를 안주로 가져왔다. 혜연은 냉장고에 있던 남은 치즈와 포도, 크래커등으로 얼른 미니 치즈 플래터를 만들었다. 여행 내내 다른 스태프들과 진철이 함께였으므로 두 사람만의 여유로운 시간은 처음이었다. 부드러운 조명아래 포근한 파자마 차림으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도 따뜻했다. 그녀들은 마치 여대생처럼 얼굴에 팩을 하나씩 붙이고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썰리는 이번 여행 어땠어?"
"제 인생에 뜻깊은 여행인 거 같아요."
그녀는 와인 한 모금 홀짝이고 말을 이어갔다.
"아직은 세상에 따뜻함이 더 많다고 느꼈어요. 또한 제가 경험한 세상은 빙산 꼭대기 수준밖에 되지 못함을 뼈저리게 느꼈고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가 인플루언서로서의 가치를 폄하하고 큰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던걸 알았어요. 제가 제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준비도 안된 제게 과분한 타이틀이 주어졌던 거 같아요. 머 대신 덕분에 이렇게 여행도 하고 있지만요."
"나도 이번여행이 인생에 중요한 한 부분이 될 거 같아. 물론 나도 재미로 유튜브를 시작했고, 심심하던 인생에 그냥 즐거움을 주는 정도로 시작했다가 점점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던 적이 있기는 했어. 유명 연예인보다는 좀 더 자유롭지만 수입부터 개인삶 일부분이 공개되며 공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던 거고. 이번에 미국 와보니 또 다른 큰 경험을 하고 가는 거 같아. "
"왜 화 안 내세요?"
"내가? 우리 둘 사이를 시기해서 어린 너에게 슬금슬금 이간질 한 인간들 내가 모르겠니. 수소문해서 누군지도 다 알아. 나잇값도 못하는 그 인간들이 더 나쁘지만, 그런 거 시시콜콜 다 따지고 싸우고 다니다 보면 내 성격만 나빠지고 내 인생만 낭비하는 거. 싫던 좋건 어차피 이 업계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고. 사실 내가 화를 내고픈 사람들은 그들이야. 가서 승질내고 뒤집어엎고 싶어 죽겠다. 하하 "
혜연은 인절미 과자를 한입에 넣고 평소보다 더 강하게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사람의 관계들을 꼬으고 비틀고 자기들 마음대로 욱여넣어 모함도 하고 이간질도 하는 인간들.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은 있어.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고 세상이 자신들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다만, 그런 사람들을 상종하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야. 차라리 엮이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진실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내가 너무 꼰대처럼 말이 많다야. 요즘 어린 세대들 이야기 좀 해줘."
둘은 늦은 밤까지 인플루언서의 삶과 언론의 파워, 요즘 아이들 트렌디, 영화 이야기 등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다 어느새 와인 한 병을 비웠다. 두 사람은 업계에서 함께 가야 할 동지였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서로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도 알았다.
모든 공식적인 일정을 마친 후, 혜연은 진철과 함께 하와이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마치 허니문인양 신혼부부처럼 손을 잡고 디자인이 같은 커플 티셔츠를 입고 해변을 걸었다. 이전에는 유치하고 촌스럽다고 어느 누구와도 절대 커플룩을 하지 않던 혜연이었다.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노을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그와의 맛있고 달콤한 키스는 결혼 생활 중 처음이라 혜연은 생각했다.
썰리의 철없는 질투와 샘으로 시작된 갈등이었지만, 혜연의 인생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 일을 겪으며 남아있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모세의 바닷물이 갈리듯 관계의 물살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혜연은 그저 사람들을 좋아했을 뿐인데, 그렇게 갈리는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반면 이를 통해 인생에서 더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남편 진철처럼.
삶을 바라보는 깊이가 더 깊어졌다. 마흔이 되어서야 한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실제 겪었지만, 이 모든 일은 질투와 샘, 이간질등 사람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점.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콤플렉스에서부터 생긴 감정이라 여기며 그녀는 그와 관련된 캠페인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갔다.
특히 여성들 간에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감정이 바로 질투와 시샘이다. 여성들에게 패션과 뷰티, 외모뿐만이 아니라 자존감, 자신감,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콘텐츠를 더 제작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다녀온 후 어느 날, 썰리가 혜연을 <맛키>에 불러냈다. 썰리는 평소 혜연이 즐겨 찾는 커피숍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언니, 난 언니가 너무 좋아요. 우리 파자마나잇도 의미있는 대화도 많이 나눴고 따뜻한 밤이었어요. 언니 그동안 죄송했고, 용서해 줘서 감사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언니의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만도 든든해요."
" 왜 그래 오글거리게에. 뭐, 뭐 필요해. 다 말해."
함박웃음 지으며 농담하던 혜연이 웃음을 멈췄다. 썰리의 얼굴이 어딘가 싸했다.
" 썰리 어디 가? 안 그래도 요즘 유튜브와 SNS 계정 닫은 거 같다고 이PD가 이야기하던데."
"네 언니... 파리 가려고요."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요. 예전부터 화장품과 향수 제조법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콘텐츠 제작을 하면 할수록 더 궁금했고, 뷰티 브랜드 제작도 관심 있었어요.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제대로 제조법부터 비즈니스까지 배워보려고 해요. 지금 아니면 지금의 저로 그냥 주저앉을 거 같아서요. 언니께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돌아올게요. 언니 그때까지 승승장구해서 제 브랜드 광고해 주기!"
'승승장구'란 말에 혜연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투병생활 후 살아서 다시 시청자들 앞에 설 수 있을까.
한창 다시 주가를 올리던 썰리의 모든 계정을 닫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날 이유도 없었다. 혜연은 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게 더 큰 모습의 우리 썰리가 기대되는걸? 그래도 브이로그는 계속해. 내가 우리 썰리 궁금해서 매일 들여다볼 거야."
"언니는 직접 놀러 오셔야죠!"
썰리가 빙그레 웃었다.
"파리로 가면 아는 지인은 있고? 뉴욕은 내가 아는 지인 소개해 줄 수 있어"
"내가 도와주면 되지."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어디선가 현준이 나타났다.
"깜짝이야. 오빠 우리 여기 있는 걸 어찌 알고."
"내가 모르는 게 어딨겟니. 하하 사실 썰리가 연락했어."
현준은 모던한 디자인의 작은 나무 박스 두 개를 꺼내 두 사람에게 각각 나눠 주었다. 나무 박스에는 각각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혜연과 썰리가 조심스레 열어보니 벨벳으로 깔려있는 박스 안에 팔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리 동생님들 기특해서 주는 선물이야. 세상에서 두 개밖에 없는 내가 디자인한 커스텀 팔찌. 두 사람 우정 팔찌로 특별 제작한 아이템이니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 참고로 박스는 내 친형이 제작한 거야."
팔찌는 심플하면서도 독특했다. 심벌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입술 모양이었다. <맛있는 키스>의 입술 심벌과 닮았다.
순간 혜연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반지 네 개도 만들어뒀어."
"???!!!!!! 설마?"
그녀가 고개 들어 현준을 쳐다보니 그가 눈을 찡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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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