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수민이야기
그때까지만 해도 수민은 그들 미래를 상상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그녀의 마음을 끌고 가는 그곳으로 가버렸다. 나이, 계급장, 일, 사랑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끌리는 대로 그와 함께 남은 하루를 보냈다. 20대에도 그렇게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수민이었다.
전형적인 극 사고형, 이성적, 논리적인 수민의 삶에 일어난 대형 사고였다. 그것도 상대는 직장 동료.
어차피 멀리 떠날 직장 동료라 어쩌면 마음의 고삐를 풀었을지도 모른다. - 전편 <채수민_2>
”어떻게 만났는지 다 기억나지~ 우리가 너 원나잇한 거 알았으면 브런치 먹자고 연락 안 했을 텐데. 그날따라 텔레파시가 불통이었어 그치잉? “
혜연이 텔레파시 보내는 흉내를 냈다.
”우리 그날은 안 잤어! 아니 같은 호텔방에서 잔 건 맞지만 그 원나잇이 아니었다구.“
”나이가 몇 개인데 그게 가능해? “
”진짜라니까! “
”미국으로 떠난 후부터 창민씨가 지극정성이었지. 장거리 연애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창민씨 정성이면 장거리 연애 10년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
세희가 그들의 장거리 연애를 칭송했다.
”아직 사귀기 전, 썸 타는 시기였는데 그 사람 정말 노력했었지. 수민이 아플 때 미국에서 죽이랑 꽃 배달 보냈던 거 생각나? 현시대 테크놀로지 기술과 우리나라 배달 기사님들이 사랑의 다리 역할을 해 주셨지. 얘네 20살에 만났다면 도움 못 받고 깨졌어 벌써. “
” 응 완전 자상. 그리고 그때 기억나? 나 김치랑 밑반찬 만들어서 수민이 집에 넣어주러 갔는데 세상에 어떤 남자가 집 앞 계단에 서 있지 뭐야. 딱 알아봤지 사진 속 그 남자. 실제로 얼마나 훈남이던지. 내가 다 떨렸다야. “
지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때 서프라이징이었지? “
” 응 내가 문을 열며 수민이 집으로 들어가자 해도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고, 수민이 올 때까지 계단에서 기다렸던 거 같아. “
수민은 그날을 떠올렸다. 커다란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계단에 앉아 있던 그 남자는 수민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던 그 모습이 수민에게 현실성이 떨어졌다. 지금 뉴욕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대체 왜 눈앞에 있는지. 전 세계를 누리며 일하는 사람이다 보니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듯했다. 더구나 수민의 집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작년, 이틀을 함께 보낸 후 그가 싱가폴로 떠난 지 약 한 달 만이었다.
그동안 창민은 싱가폴과 미국에서의 바쁜 일정에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업무상 한 두 번 통화한 게 다였다. 그는 아직 H사와 협업하는 중이었지만 사실 수민과의 프로젝트는 마쳤던 상태였다. 업무 핑계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
서로 매일 문자를 적었다가 보내지 못했다. 각 국의 시차도 있었고,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 어떤 식의 문자를 보내야 할지 머뭇거렸다. 직장동료인지 썸 타는 관계인지, 그냥 지나가는 관계일지도 몰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막상 연락되면 무척 다정한 듯 하지만, 평소에 문자조차 없고 설사 보낸다 해도 한 두 단어 정도만 보내는 모습, 그의 뜸한 연락에 수민이 실망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창민을 마음속에서 밀어내도 계속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사랑의 불나방처럼 마구 불에 뛰어들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녀도 사회적 위치가 있었다. 답답했지만 수민은 그냥 있었다. 그냥 없던 일도 만들어 회사일에 집중하였다. 역시 일이 내 연인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한달이 흐른 후 수민의 집 앞 계단에 창민이 앉아 있었던 거다. 오랜 시간 기다렸나 보다. 수민을 보자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수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수민은 최근 야근하느라 푸석해진 피부와 얼굴의 잔주름이 거슬리던 중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나타나 그렇게 바라보니 민망해졌다. 보톡스라도 미리 맞아둘걸.
” 여전히 이쁘네. “
한 달 만에 나타나 영어 발음 섞인 한국말로 그가 뱉은 한마디였다. 거짓말이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좋다. 아니 나이가 들은 후에 들으면 더 기분이 좋다. 자주 듣지 못하는 말이기에. 오늘따라 집 앞 가로등 노란 불빛 조명이 감사했다.
”못 참아서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
창민이 수민을 포옹했다. 그에게서 향이 났다. 그만의 향기.
포옹한 채 수민에게 속삭였다.
”좋아해요. 벚꽃 속에서 날 보던 당신이 매일 떠올랐어요. 지난 한 달 너무 힘들었어요. 당장 비행기 타고 싶었죠. 당신이 날 잊을까 봐 걱정했어요. 많이 좋아해요. “
창민은 그날 수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번은 수민이 먼저 다가오기 전에 그가 먼저 수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키스는 여전히 달았다.
톰포드 향수와 그의 체음이 혼합된 향이 수민의 코끝에 전해져 왔다. 수민이 원래 좋아하던 부드럽고 관능적인, 세련된 향이다. 그 유니크한 향에 창민만의 냄새가 섞여 수민의 머릿속까지 긴장하게 만들고, 가슴은 콩콩 뛰었다. 특유의 따뜻하고 달콤한 향이 그와의 키스를 더욱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날부터 두 달 정도 창민은 한국에 머물렀다. 한창 바쁜 시기일 때라 새벽에 미국과 통화하고 수민이 회사를 간 시간에 잠시 눈을 붙였으며, 그녀가 퇴근하면 함께 데이트했다.
창민이 본사에 꾸준히 요청한 결과 온라인으로 업무 보기를 승인받았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뉴욕 본사로 가야 했다. 그 후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민이 당장 수민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기세였다. 두 사람은 창민이 지내던 호텔과 수민의 집을 오고 가며 그 해 여름을 함께 보냈다.
”언제까지 머무를 예정이야? “
”수민만 괜찮다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이참에 한국에 있는 회사 알아볼까? “
수민은 창민의 반말이 귀여웠다. 창민은 수민보다 세 살 연하였다. 두 사람이 영어를 사용할 때는 별 탈 없었는데, 함께 며칠 지내며 한국말을 쓰다 보니 수민이 자연스럽게 반말을 사용했다. 창민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였지만 조부모와 함께 살았고 연세어학당도 다녔기에 반말과 존댓말을 구분할 줄 알았다. 처음에는 띄엄띄엄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수민이 자기가 누나라며 말을 놨고, 그러자 창민도 함께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수민은 그가 귀여워서 한소리 했다.
”어허 존댓말 써야지. 누나라 불러. 누나! “
”싫어. 누가 누나야? 넌 내 애인인데? 키도 이렇게 쪼그만 게. “
라며 큰 키로 수민을 폭 껴안았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어 수민은 항상 그를 놀렸다.
친구들은 수민과 창민, 이름 끝자리를 따서 민민커플이라 불렀다.
민민커플은 홍대 앞 거리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함께 마셨고, 작은 라이브 콘서트나 공연을 찾아다녔다. 북카페에 가서 시원한 얼음 동동 띄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책을 읽고, 열띤 논쟁을 하기도 했다.
가끔 함께 장을 봐서 수민의 집에서 요리도 하며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갔다.
창민은 한국에 거주하면서 뉴욕 회의에 영상으로 빠짐없이 참석하고, 업무도 꼼꼼히 보고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본사에서는 그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또한 직업상 출장이 잦은 관계로 수민의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지낼 수만은 없었다. 창민은 처음으로 본인의 출장 많은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민은 <시카고> 뮤지컬 티켓 두장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창민이 다시 미국으로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민, 나랑 같이 뮤지컬 보러 갈래?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랍니다."
"무슨 공연인데?"
"뮤지컬 시카고. 25주년 기념으로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투어팀이 내한한 공연이야. 대박이지? "
"날마다 오는 기회 맞는데? 나 뉴욕 살잖아."
"아 그렇군요. 조~오켔습니다. 싫으면 다른 친구에게 전화 돌릴까욤?"
참 유치하다며 수민은 스스로 반성했다. 그런 수민의 모습이 귀여웠다. 삐지지 않게 생긴 그녀가 삐졌으니 말이다.
"브로드웨이든 서울이든 뭐가 중요해. 내 곁에 수민만 있으면 되지."
뮤지컬 공연 당일, 창민과 수민은 손을 잡고 뮤지컬 공연장에 들어섰다. 일찍 도착한 덕에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오 역시! 난 사람 많은 게 질색이야. 일찍 오길 잘했어 그치.“
”우리 저기서 인증샷 찍자. 수민, 저기 로고 조형물 뒤에 서봐. “
입구에는 오늘 출연 배우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빨간색으로 제작된 ‘CHICAGO’ 조형물과 반짝이는 백그라운드로 포토존을 꾸며놓았다. 수민은 그 조형물을 배경으로 기념샷을 찍었다. 서로 찍어주고, 커플 셀카도 다양한 표정으로 깔깔대며 찍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얼른 그 자리를 떠나 무대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 좌석을 찾아 들어가기 전 수민이 잠시 화장실에 가느라 창민 혼자 홀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방금 막 찍은 사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값진 보물마냥 하나씩 쌓여가는 두 사람만의 추억물이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Hey, who’s this guy! David? 이게 누구야! 설마. “
깜짝 놀란 창민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Linda?”
“와! 어떻게 여기서 만나? 여기서 뭐 해?”
“공연 보러 왔지. 너야말로 왜 한국에 있어?”
12년 만이었다. 창민은 반가움보다 우선 놀란 마음이 더 컸다. 린다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오더니 아무렇지 않게 포옹하며 인사했다.
“어떻게 이렇게 만나지? 24살 때 마지막으로 봤으니... 12년만?”
린다는 창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마치 진짜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인지 한번 더 확인 중인 듯했다. 그때 린다가 쓰고 있던 검은색 헤드폰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헤드폰마이크를 통해 뭐라고 답했다. 그리고 급히 휴대폰을 창민에게 내밀었다.
“전화번호 찍어봐. 이 먼 한국에서 이렇게 만났는데 밥은 한 끼 먹어야지. 언빌리버블!”
창민은 얼떨결에 그녀의 전화기에 휴대폰 번호를 찍으며 물었다.
“넌 여기서 뭐 해?”
“전혀 안 반가운 표정이네? 좀 서운한데?”
“아니 그게 아니고,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니 너무 놀라서.”
“내가 지금 업무 중이라 얼른 들어가야 해. 공연 후에 연락할게.”
밝게 웃으며 인사하고 그녀는 가던 방향으로 급히 달려갔다. 계속 헤드폰 마이크에 대고 재차 무언가 확인하며 사라져 버렸다.
“누구?”
뒤에서 수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민은 뒤돌아 그녀를 봤다. 수민을 속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주 오래전 이미 청산된 관계.
“ex-wife.(전부인)”
목구멍에서 꺼낼 일 없던 단어였다. 창민이 아무리 미국태생이라지만, 전부인을 마음 편히 친구처럼 대할 만큼의 관대함을 가지지 못했다. 그에게 린다는 상처를 남긴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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