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 수민이야기
"ex wife. 전부인."
수민과 창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공연을 끝까지 관람했다. 웃어야할 장면에서 웃고, 황홀하고 섹시한 배우들의 시스루룩과 댄스를 보며 감탄하고, 록시를 꼭두각시처럼 무릎에 앉혀 복화술로 노래를 하고 마지막에 깊은 폐활량을 자랑하는 빌리역 배우의 가창력에 기립박수 쳤다.
두 사람은 공연에 집중하는 듯 했지만, 사실 정신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공연 전 우연히 마주친 존재와의 그 순간이 공연에 집중하는데 큰 방해가 되었다. 뮤지컬 배우들의 어마한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보면서도 창민의 머릿속에 린다가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창민과 그런 존재의 짧은 만남과 연락처 교환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척, 모른척 해야했던 수민의 마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은 공연을 관람하고, 감동의 순간에 손뼉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딴 공간에서 헤매이고 있었다.
‘나야 린다. 어제 공연 잘 봤어?’
‘어 린다. 너는 거기서 일하는거 같던데.’
‘얼굴 보고 이야기해. 이태원쪽으로 니가 와.’
린다의 문자를 보니 창민은 잊고있던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린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었다. 창민의 의견은 묻지 않았고 항상 일방적이었다. 그게 주로 두 사람 싸움의 원인이었다. 둘 다 너무 어렸다. 20살에 어학당에서 만나 22살에 결혼했으니 말이다.
그날 아침 창민은 수민에게 린다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주저했다.
“어제 그 분 만나러 가야지? 무서워? 같이 가줘?”
서른다섯의 촉은 속일 수 없다. 수민이 먼저 쿨하게 농담식으로 대화의 물꼬를 터줬다.
“걘 항상 그래. 일방적이야.”
“그럼 안 나가면 되겠네.”
“나가지 말까? 난 안봐도 괜찮아.”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사실이었다. 그래도 결혼까지 했던 첫사랑인데, 한국에 있는 그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창민의 마음을 먼저 읽어준 수민이 차라리 고마웠다.
“같이 갈래? 미국은 이혼해도 새부인, 새남편들 넷이 함께 만나기도 하는데.”
“나 한국사람이거든. 으이그. 나 그 정도로 쿨하지 못해.”
창민은 멋쩍어 바지 주머니 끝을 만지작 거렸다.
수민과 창민은 공통분모가 있었다. 둘 다 돌싱이었다는거.
두사람 모두 20대 초반에 불같은 사랑을 했고, 초스피드로 결혼해 행복한 신혼을 시작했다가 2년내에 이혼했다는 점이었다.
창민은 린다를 연세어학당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20살이 되던 해 여름 방학, 한국말과 문화를 배운다는 취지로 연세어학당에 왔었다. 당시 학교 수업도 좋았지만,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국 대학생 문화를 밤낮으로 즐기다보니 한국말도 자연스레 늘었다. 그 때 린다는 미국 모대학 학부에서 연기와 연출 공부를 하던 배우겸 연출가 지망생이었다. 두 사람은 반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스레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매일 함께 수업을 듣고 틈틈이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교 시절 내내 공부만 했던 창민에게 린다는 첫사랑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너무 어린 나이라며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결혼했다. 그렇게 스무두살 동갑내기 어린 부부가 되었다.
아직 인생과 사랑에 미흡했던 어린 신혼부부는 막상 동거생활을 해보니 서로의 성격과 입장 차이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잘한 생활에서의 갈등부터 자녀 출산 계획까지 서로의 의견이 달랐다.
가정과 관련된 모든 것뿐만 아니라 가끔 창민의 개인적인 일까지 린다는 혼자 스스로 평가, 판단하고 마음대로 결정했다. 그리고 창민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귀엽고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듣는게 가장 편한 삶이라며 맞춰주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크고 작은일들이 점점 쌓이자 창민은 답답했다. 창민의 시선에서 아내는 항상 명령만 내리는 독재자처럼, 그의 삶을 움켜쥐고 마음대로 조정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사랑해도 부부 관계가 수평이 아닌 수직 관계로 되어가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갈등은 대화로 시작했다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불어 당시 배우를 준비하던 린다는 오디션을 보러다니며 뮤지컬을 위한 희곡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일을 사랑할거라며 자녀를 원치 않았고, 창민은 소년 시절부터 가졌던 진실한 사랑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 두세명 낳고 행복하게 사는 꿈이 있었다. 두사람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면서 결국 2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했다.
그랬던 린다를 만나러 이태원으로 가는 동안 지난 시간을 기억해보던 창민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고보니 지금 수민도 자기애 강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여자 아닌가. 린다와 수민은 공통점이 있었다.
다만 수민은 항상 배려심 있는 여자였다. 평소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있지만, 그 모습 뒤로 상대방을 공감하고 챙기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건 창민의 의견을 묻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대화가 기분 좋았던가. 존중 받는 느낌.
수민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혼자 두고온 수민이 마음에 걸렸다.
“한국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출장? 그 여자는 누구야?”
파스타 한입 돌돌 말아 입안 가득 넣으며 린다는 건너편에 앉은 창민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수민을 생각하던 창민은 밥이 넘어가지 않아 포크로 파스타만 건드리고 있었다.
“너 좋아했던 봉골레파스타인데, 왜 안 먹어?”
“넌 여전하구나.”
“뭐가? 아 너 음식 미리 주문해 놨다고? 내가 시간이 많이 없어서 그래. 조금 있다가 리허설 들어갈텐데, 갑자기 연락오면 가야할 수도 있거든. 너 이제 봉골레 안 좋아해? 다른걸로 시킬까?”
말을 말자. 창민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뮤지컬 연출해?”
“아니, 이번 시카고 투어팀 스텝으로 한국에 출장 온거야. 팀이 필요할 때 통역도 하고, 매니저 곁에서 부매니저라 해야하나.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연출가 꿈은 못 이뤘고. 그동안 한국과 뉴욕에서 뮤지컬과 가끔 영상관련 배우, 스텝. 이일 저일 하며 지내고 있어. 너는?”
“그랬구나. 나도 일 때문에 한국에 거주중이야.”
린다가 곁눈질로 창민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그거뿐이야? 여자친구 생긴게 아니고? 뉴욕 B 컨설팅펌에서 일한다는 소식은 들었어. 한국에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그런줄 알았으면 뉴욕에서 연락 한번 하지 그랬어.”
“연락하면 뭐. 오붓하게 술이라도 한잔 하게? 친구하자 머 그런거 별로야. 전남편이랑 어떻게 친구가 되니.”
“나도 친구할 생각없어. 그냥 한 말이야.”
12년만에 만났는데 왜 그때랑 똑같은 기분인지. 창민은 대화를 길게 할 수 없었다.
린다는 파스타를 먹는둥 마는둥 와인잔만 기울이는 창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린다도 창민을 무척 사랑했었다. 다만 사랑의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 당시는 떠나는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붙잡는 법도 몰랐고 자존심도 강했던지라 그녀 또한 그를 떠났다.
“결혼했어?”
”아직“
”뉴욕가서 제대로 밥 한번 먹자. 그래도 우리 애틋했었는데.”
“애틋했지. 내 첫사랑이었는데. 그런데 이젠 다 지난 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창민의 심장 안쪽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오래된 상처가 욱씬거렸다.
린다와 헤어진 후 고통과 외로움은 참을 수 없었다. 회사만 다니는 것도 모자라 밤에 대학원을 등록했고, 미친 듯이 일하고 공부하며 매일 허드슨 강변을 달렸다. 1분 1초도 린다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동안 음주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그녀와의 추억과 그리움이 달려들어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땀흘리며 강가를 달렸다. 그렇게 스스로 채찍질하며 몇 년을 보냈는지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가 나왔다.
“이 집 맛있네. 언제 미국 돌아가? 가기전에 한번 더 오자.”
창민은 그런말을 하는 린다가 참 천연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녀는 두사람 관계에 있어 정말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을지 모른다.
"린다, 잘 지내지?"
"뭐야 아까 물었어야 하는 멘트 아니니?"
진지한 창민의 눈과 마주치자 린다가 대답했다.
"응 잘 지내."
"우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고도 토닥거릴까."
"......."
"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창민은 그녀가 커피와 디저트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음식값을 지불한 뒤 함께 레스토랑을 나왔다.
“ 린다야, 우리 인연은 오늘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우리 우연히 만나도 아는 척 하지 말자.”
“....... 여자 친구 때문이야?”
“응 나 애인있어. 사랑하는 사람.”
"......."
린다는 무슨말을 하고 싶은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 말을 뱉지 않았다.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해."
그로부터 며칠 후 창민은 뉴욕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전아내를 만나고 온 후 창민은 수민에게 그녀에 대해 별 말 없었다. 수민은 이것저것 궁금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밥만 먹었다는데 계속 물어보는 것도 이상했다.
창민이 뉴욕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포옹을 했다.
“My love, 우리 곧 만나. 항상 내가 곁에 있다는거 명심해.”
창민은 비행시간이 다가옴이 초조했다. 발을 떼기가 싫었다.
“그래요. 나도 놀러 갈게. 가서 일에 집중 잘 하고.”
“연락하는거 잊지말고.”
낙엽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2023년 초가을, 그는 다시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세상에서 어려운 사랑중에 하나가 장거리 연애다.
특히 막 시작한 연인의 장거리 연애는 더 힘들다.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곁에 있고 싶고,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애 바이러스가 마구마구 뿜어져 나오는 시기에 연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고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 사단을 낸 것이 아닌가.
“그들은 십대였다고 치자. 난 곧 마흔인데 모냐. 에휴. 보.고.싶.다.”
수민은 <맛키>에서 쇼파에 기대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연히 만났던 창민의 전아내가 떠올랐다. 린다라 했던가. 그녀는 미녀였다. 린다도 지금쯤 뉴욕에 있을텐데. 둘이 만났을까. 묵혀둔 생각의 또아리가 문득 이상한 곳으로 잽싸게 튀어 나갔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거리 연애에서 삼가해야 하는게 그런거다. ‘혹시...했을까.’ 쓸데없는 상상과 오해는 장거리 연애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방해물 중 하나다.
”뭘 그리 혼자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하냐. “
”왔어?“
”창민씨 생각하니?“
세희와 지아가 수민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거리와 카페에는 온통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렸다.
"남친은 있는데 왜 작년 연말보다 더 외로운 느낌이지?"
"너 예전에 전남친 군대 간 시간동안 고무신 제대로 신고 기다렸다 했지? 그보다 낫다고 생각하자."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결국 이혼했는데. 그리고 이 힘든걸 왜 또 하고 있을까. 내 성격에 분명 문제가 있는거시얌."
"그래 안 되겠다. 우리 병원에 가보자. 아님 내가 가서 약이라도 타올까?"
" 그래 약 좀 타와봐. 옆구리도 시리니 찜질기 잊지말고."
셋은 키득거리며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리움에 반쯤 미쳐가고 있다며 그녀들은 수민의 아픔을 농담으로 승화시켰다.
”연말에 창민씨 한국 안 와?“
”몰라. 지금 런던이래. 혼자 세상일 다 하는 사람 같아.“
수민은 보고싶은 그가 원망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원래 출장 많은 직업이쟎아.“
”너가 가면 어때? 짜잔~하고 나타나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럼! 연말은 무조건 연인과 함께지. 따뜻한 코코아 마시며 카페에 앉아 눈 날리는 밤하늘을 보는 추운 겨울날의 낭만. 남친 팔짱끼고 입김 날리며 크리스마스 장식된 거리 돌아다니는 낭만.“
”지아님, 시를 써라 시를 써. 누가 아티스트 아니라할까봐. 하하“
"것두 청춘들이나 하는거야. 우리 나이에 추운데 그리 돌아다니면 무릎 시려. 얼음위에 넘어지면 도가니 나가고. 따땃한 곳이 최고여."
셋은 만담하는 듯 주거니 받거니 깔깔거렸다.
한달에 한번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던 창민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지난 삼개월동안 두 번 왔고, 그나마 3일정도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수민 또한 그동안 연말 기획 이벤트 준비와 마케팅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기에 그녀 역시 휴가 낼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날 <맛키>에는 매콤한 시네몬 향이 가득한 달달한 펌킨 라테가 맛있다. 수민은 뉴욕에서 한창 공부하던 시절, 겨울에 마시던 그 라테가 떠올랐다.
일주일 후
정말 수민은 뉴욕 JFK 공항을 나섰다. 반강제로 연말 휴가를 빼서 가벼운 짐만 챙겨 뉴욕행에 올랐던 거다. 뉴욕의 칼바람은 여전했다. 볼살이 얼얼해 롱패딩 자켓의 후드를 뒤집어 쓰려고 팔을 올렸다. 패딩쟈켓이 이불처럼 두꺼워 몸이 둔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후드를 휙 덮으며 수민을 꽉 껴안았다. 창민의 향기가 났다. 두꺼운 파카를 통해서도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따뜻한 품에 안기자 수민은 저절로 함박 웃음이 나왔다. 차가운 볼살이 땡겼다.
”안에서 기다리지 추운데 왜 나왔어.“
”얼른 보고 싶어서?“
”나도 보고싶었어.“
창민은 그녀의 차가운 입술위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러 뽀뽀 했다.
”어떻게 이런 귀여운 생각을! 내가 한국가서 서프라이징하기 전에 선수쳤네. 보고싶었어.”
수민을 지그시 바라보는 창민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심장이 콩닥거렸다.
맨하탄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혔다. 얼마전 내린 눈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따뜻한 차안에 창민과 둘만 있다면 교통체증 정도야 상관 없었다. 창민은 계속 수민의 손을 꼭 잡고 한 손으로 운전했다. 수민도 몸을 돌려 운전석에 앉은 그의 옆모습만 쳐다보았다. 저 멀리 맨하탄의 마천루 경관 따위 관심없었다.
막힌 교통체증과 달리 수민의 입은 아우토반을 달리듯 지난 이야기들을 종알종알 창민에게 전하기 여념 없었다. 차 안 히터의 따뜻함과 두 사람의 반가운 감정이 섞여 차안은 후끈했다.
저녁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맨하탄 내 창민의 집에 도착했다.
“배 고프지? 뭐 먹고 싶어? 따뜻한 한국식 국물? 이탈리안 음식, 중국.......”
수민은 손으로 창민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 그냥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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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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