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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verly지아 Oct 24. 2024

#9 스쳐간, 스치는, 스칠

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지아 이야기

상담을 마치고 나온 지아는 기분이 좋았다. ‘잠자고 있는 너의 재능’ 이란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모든 재능이 사라진 채 밥하고 청소하는 중년 아줌마로 여겨지던 자신이 조금은 값지게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아이들 하교 시간이 조금 더 남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근처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앞 카페에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사서 도서관으로 들어가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한 남자가 커다란 캠핑배낭을 메고 도서관을 향했다. 막 여행을 마치고 공항을 나온 분위기의 그 남자는 성큼성큼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책을 찾는 듯 곳곳을 기웃거리다가 지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서 벗었다.


지아는 오늘 글쓰기 관련 책 섹션에서 이런저런 책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요즘 에세이 형식의 글을 틈틈이 적고 있었다. 그림책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스토리텔링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독학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 그 책이 있을 법 한데...”


얼마 전 자주 들르는 글쓰기 플랫폼 <모닝커피>에서 한 작가가 추천한 묘사 관련 책을 찾고 있었다.



그때 아래쪽 선반을 보느라 쭈그리고 앉은 지아와 가까운 거리에 커다란 캠핑 배낭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보기만 해도 이미 몇 주동안 온 데를 돌아다니다가 온 흙먼지 가득 묻은 배낭이었다. 배낭이 커서 웬만한 어린아이 키만 해 보였다.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한 남자가 책을 찾고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배낭주인 같았다. 먼 오지를 탐험하고 막 돌아온 사람처럼 허름한 차림에 먼지 투성이 바지와 신발을 신고 있었다. 뒷주머니에 꽂은 모자가 보였다. 지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선반으로 눈을 돌려 이런저런 책을 들여다보았다. 오분쯤 흘렀을까.  


“무슨 책 찾으시는데요?”


지아는 본인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고개 들어 목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아까 그 배낭주인 말고는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네. 뭘 열심히 찾는 거 같길래.”


남자는 지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책을 고르며 무심한 듯 말을 툭 내뱉었다.


‘뭐래 이 사람. 친절함은 전혀 없는 친절함? 먼지구덩이 배낭이나 저리 좀 옮겨주시지.’


지아는 힐끗대며 예의상 대답했다.


“아 괜찮아요. 제가 찾을 수 있어요.”


남자가 지아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햇볕이 가득 들어와 그 역광 때문에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180센티 정도의 키에 마른듯한 체구,  살짝 긴 더벅머리에 두건을 쓴 그의 실루엣만 그림자처럼 지아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그쪽 거죠?”


위 선반에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 텀블러를 내밀었다. 아래쪽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찾다 보니 지아가 커피를 잊고 있었다.


“아 네, 고마워요.”

“여기 자주 오세요?”

“네. 집이 이 근방이라.”


‘어머어머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집이 이 근방이라니. 이 단순함 어쩌니.‘


“여긴 글쓰기 책 관련 섹션인데, 저도 글쓰기 책 찾고 있는 중이에요. 저한테 책 좀 추천해 주시겠어요?”

“네?”

“막 긴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당분간 쉬면서 글쓰기 공부 좀 하려고요. 작법이니 그런 어려운 책 말고, 초등학생에게 말하듯 쉽게 설명된 그런 책 좀 추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기 계시는 사서분이 더 잘 알 거 같은데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답하기 불편해서 지아는 일어섰다. 오른쪽 다리가 살짝 저린 듯했다. 그 때 역광에 실루엣만 보이던 그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헐!! 이런 훈남이 우리 동네 살았던가?‘


“왠지 저기 직원분 보다 더 잘 아실 거 같길래. 제가 실례했나요.”


시건방져 보이게 말을 툭툭 내뱉는데 어쩐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 저도 글쓰기 초보라.”

“ ’아’를 자주 쓰시군요. 버릇인가 봐요?”

“아 제가 그랬나요..?”


그런 버릇 없었다. 아니 그런 버릇이 있었나? 지아도 몰랐다. 지아가 골라 둔 몇 권의 글쓰기 관련 책을 그가 보았다. 파랗고 얇은 묘사 관련 책을 손가락질하며 그가 물었다.


“그 책 제가 빌려가면 안 될까요?”

“네?”


‘아 모야. 훈남이면 다야? 어디서 새치기를.’


사실 하마터면 줄 뻔했다.


“ 아 네, 아마 이 도서관에 몇 부 더 있을 거예요. 저기 직원분께 가시면 남은 도서 부수도 알려주시고, 대여 및 도서 예약까지 해주세요.”

“하하 농담이에요. 이렇게 정색하시면 제가 그 책 더 궁금해지잖아요.”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아를 내려다 보며 그가 웃었다. 지아는 낯선 남자가 지아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었다. 남편과 결혼하고 유부녀가 된 순간부터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온 적 없었다. 손가락에 껴 있는 결혼반지는 마치 ‘이 여자는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적혀있는 사인 같다.

그의 미소에서 자유로움과 순수한 영혼이 느껴졌다. 매력적이었다.   


“글 쓰세요?”


그의 질문을 받을 때 갑자기 지아의 머릿속에 그와 비슷하게 생겼던 사진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지아가 대답대신 반문했다.  


“혹시 <모닝커피> 플랫폼에 글 쓰세요? 모로코?”

“어? 거기 작가님이세요?”

“작가라고 하기엔. 그냥 끄적이는 수준이죠.”


지아가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오 반갑네요. 필명이 뭐예요?”


지아의 기억이 맞다면 그의 글을 읽어본 적 있다. 얼마 전 모로코 여행에 관련된 글이었는데, 상당히 독특한 장소들을 다녔고, 그 글이 메인화면에 떴다. 그래서 읽어본 적 있었는데 당시 첨부된 사진 속 작가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지아는 귀로 들은 이름은 냉큼 잊을지언정 시각적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때 띠디디딕 띠디디딕...


신데렐라의 열두 시 시계종이 울리  듯, 세시델라의 휴대폰 알람이 울려댔다. 지아는 서둘러 세시까지 아이들 학교로 향해야 했다. 그와의 만남이 아쉬웠지만, 유리구두를 남겨둘 수 없는 유부녀이기에 그냥 목인사만 까딱하고 그를 지나쳐 나왔다. 그리고 데스크로 가서 얼른 책을 대여한 후 도서관을 나왔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남자는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하루는 글쓰기 섹션에서, 하루는 여행 섹션에서, 또 하루는 소설책 섹션에서 책을 읽었다.


한편 지아는 주부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 중이었다.

결혼 권태기와 갱년기 전조 증상으로 말미암은 우울증은 지독했다. 의사 말처럼 동네 산책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스포츠센터에 가서 가벼운 덤벨도 들었다. 필라테스나 요가 수업에 들어가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고, 운동 후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도 했다.


운동가지 않는 날은 도서관이나 카페에 들러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힘이 되는 자기 계발 관련 콘텐츠나 책 관련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유튜버 동영상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넷플릭스에서 나온 인기 드라마를 보며 빨래를 갰다. 하루하루 어두운 그림자를 내치려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정신과 상담도 꾸준히 받았다.


그러던 어느 맑고 화창한 가을날, 지아는 그날도 독서를 위해 카페를 향하고 있었다.

거리에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 지어 있었다. 가을이 다가왔고, 낙엽의 계절이 시작되었음은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금빛 은행잎이 한두 장 보였는데, 걷다 보니 푹신한 노란 카펫처럼 바닥 가득 떨어져 있었고, 그중에 빨간 단풍도 섞여 있었다. 지아는 마치 노란 세상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여느 계절보다 높고 푸르르며 청아한 가을 하늘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흰색 구름이 동동 떠있다.


그런 동화 같은 세상을 밟고 지나 즐겨가던 카페로 들어섰다.  

지아는 풍경을 보기 위해 바깥쪽을 향해 있는 창가 쪽 긴 테이블에 앉았다. 그 자리는 혼자 온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단지 불편한 점은 가끔 지나가는 행인과 눈이 마주친다는 거.

카페에서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지아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그 노란 가로수 길을 감상했다.


갇힌 자유로운 영혼.

문득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얼마 전 지아는 직장을 알아봤다. 직접 돈도 벌고 싶었다. 그런데 경력 단절녀로 십여 년 지내다 보니 덕분에 자신감은 뚝 떨어져 있었다. 직접 회사로 이력서를 제출하기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포트폴리오를 제작할 최근 작품도 없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적어도 15년 이전 그림과 디자인이었다.


그래도 사회에 나가 무슨 일이든 해보자며 주위 지인들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던 중 또 좌절했다.


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만 일을 할 수 있었다. 등하교 시간을 맞추다 보니 결국 출근은 남들보다 늦고, 퇴근은 빨라야 하는데 그런 직원을 그것도 십 년 경단이었던 사람을 굳이 뽑을 회사는 없었다. ’ 나라도 안 뽑지.‘ 지아는 당연하다 여겼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 해도 쉽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도 지아의 자녀와 비슷한 시간에 하교하니 말이다. 지아는 세 아이를 둔 엄마라 태권도, 농구팀, 미술학원, 무용학원, 영어학원 등 방과 후 활동을 데리고 다니기 바빴다. 그래서 최대한 오전시간 근무를 원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해도 주부가 할 수 있는 시간대의 일자리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발목 묶인 파랑새가 된 느낌이었다.


’괜찮아. 대신 나를 필요로 하는 예쁜 아이들이 있잖아.‘


지아는 스스로 위로하며 카푸치노 한 모금 들이켰다.

가방에 펜을 꺼내 들고 수첩에 끄적였다. 지금 보는 거리 풍경이 이뻐서 펜으로 그림을 끄적끄적 그리고, 느낌을 글로 썼다. 글쓰기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온 시간을 바쳐 할 수 없었다. 오전에 집안일을 하고, 글을 좀 쓰다 보면 금세 아이들 픽업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지아는 미래를 위해 노력했던 20대의 지아에게 미안했다.

그녀가 고생하며 쌓아 올려 논 커리어를 육아 핑계 대고 망쳐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괜찮아. 아무렴 어때. 그래도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나고 있잖아. 잠자는 지아를 깨워보자. 분명 이전의 나라면 뭔가 해낼지 몰라. ‘


거품이 가라앉고 있는 카푸치노 잔을 다시 들어 입에 대려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아아님 드디어 다시 만났네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지아는 얼굴을 돌렸다. 한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낯익다. 아 도서관에서 봤던 그 배낭주인!


“아아님, 저 기억하죠?”

“아....... 네.”

“그때 그, 아 <모닝커피> 여행 작가요.”


지아가 기억을 못 하는 줄 알고 그는 열심히 처음 본 그때를 설명했다.


“아까부터 뭘 열심히 적고 있어요?”


'아까부터? 뭐야 계속 보고 있었다고? 그래도 <모닝커피>에서 글 쓰는 작가니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지아는 낯선 남자를 경계하다가도 <모닝커피>에서 약간의 인지도가 있는 작가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했다.


사실 금빛 은행잎이 이뻐 지아가 넋 놓고 보던 그 시간,  남자는 그 은행잎을 밟으며 가로수 길을 혼자 산책하고 있었다.

한 손에 광각렌즈가 장착된 고급 사양인듯한 카메라를 두 손에 쥐고 뽐내는 가을을 담고 있었다. 그도 금빛 은행잎들에 이끌려 이곳저곳 찍다가 우연히 카페 통유리 창문안쪽에 앉아있는 지아를 보았다.

그는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참 관찰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수첩에 뭔가 끄적이다가 먼 곳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지아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찰칵.


그의 눈과 카메라에 그녀 모습이 각인되었다.  


“아아님, 저는 정지혁이라 합니다. <모닝커피>에서 트러블 JJ가 제 필명이에요. 최근에 유튜브도 시작했어요. 우리 정식 인사하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지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또래 같았지만 참 순수하고 맑아 보이는 훈남이었다.


“제가 왜 아아님이죠?“

”그때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계셨잖아요. 이름도 필명도 모르니 아아라 할 수밖에요. “


낯선이가 지어준 별명일 뿐인데, 지아는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묘했다.


”저 손이 곧 무안해질 거 같은데요. “


지혁은 아까 내민 손을 계속 허공에 두고 있었다.


“저는 진지아라 해요.”


사람의 호의에 이름조차 꽁꽁 숨기는 것은 매너가 아닌 듯하기도 했다. 악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대놓고 무안하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지아는 손을 슬쩍 가져다 댔다. 지혁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악수했다. 남자의 손이 생각보다 컸다.



Copyright   2024. Beverly Story (BS, Agnes) All rights reserved

*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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