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지아이야기
“저는 진지아라 해요.”
사람의 호의에 이름조차 꽁꽁 숨기는 것은 매너가 아닌 듯하기도 했다. 악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대놓고 무안하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지아는 손을 슬쩍 가져다 댔다. 지혁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악수했다. 남자의 손이 생각보다 컸다.
”진지아. 그래서 진지하시나 봐요. “
학창 시절 수도 없이 들었던 이름 관련 별명이었다. 진지하다에 진지, 식사의 높임말 진지. 그의 농담이 웃기진 않았지만, 옛날 학창 시절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카푸치노네요? 필명이 뭐예요? 지아씨 글 읽어보고 싶으네요.“
보고싶었던 만큼 지혁은 그녀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 필명은 없어요. 독자로서 <모닝커피> 글을 읽어요. 가끔 글을 쓰긴 하지만 일기 수준이고, 작가활동은 하지 않아요. “
“그래도 아이디는 있을 거 아녜요”
“...모찌러버예요.”
“아 저도 모찌 좋아해요! 자주 드세요?”
“아뇨. 제 아이디에 모찌는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에요. ”
“아 그렇군요... 많이 좋아했던 강아지였나 보군요.”
지혁은 그날따라 지아와의 대화에 여러번 땀을 삐질 흘리는거 같았다.
“네, 제 생일날 선물 받은 첫 강아지인데......”
동생같이 지내던 사랑하던 강아지였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얼마나 울었는지.
“왜 필명을 트러블 JJ라고 지으셨어요?”
죽은 모찌 이야기가 하기 싫어 지아는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질문을 던졌다.
“하하 단순해요. 원래 트레벌(travel)JJ로 하려 했는데, 입력할 때 트러블(trouble)이라 적은 거 있죠. 오타였죠. 잠시 정신이 어디로 갔었는지 원. 그때 수정했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냥 트러블 JJ가 됐네요. 회사 관두고 여행만 다니니 우리 어머니가 볼 땐 트러블메이커라, 틀린 말도 아니네요. 하하”
황당한 이유였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트러블JJ도 나쁘진 않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오히려 여행 가서 온갖 재미있는 사건을 만들 거 같아 어울렸다. 그러고 보면 유명 여행 유투버 '빠니보틀'도 평범한 이름은 아니다.
“어쩐지 어울려요. 그때 원하던 책은 찾았나요?”
“누구 때문에 못 찾았지요?”
“네? 설마 저 때문 아니죠? 전 거기 직원도 아닌데.”
지아는 괜히 미안했다. 그 묘사관련 파란책을 줄 걸 그랬나.
지혁은 그냥 빙긋 웃었다. 한눈에 반한 당신을 쳐다보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급히 나간 후 여유롭게 책을 찾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는 말을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대신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오늘 날이 정말 이쁘네요.”
창 밖 가을하늘은 여전히 청아하고 높아 보였다. 그 푸른 하늘 아래 노랗게 굼실대는 키 큰 은행나무와 금빛 시냇물 같은 은행잎 가득한 골목길. 그리고 곁에 청초해 보이는 지아. 지혁의 날이 이쁘다는 그 말에 지아와의 만남이 포함되어 있음을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혁이 보는 쪽으로 지아도 시선을 옮겼다. 둘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아무말 없이 가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찌러버님 혹시 등산 좋아하세요? 가을 동영상 찍으러 북악산 갈 건데 함께 갈래요?”
사실 지혁은 팀과 함께 내장산이나 설악산 같은 장거리 지역으로 단풍 관련 콘텐츠를 찍으러 갈 예정이었으나, 그런 곳은 지아가 분명 가지 않을거 같아 서울시내 당장 떠오르는 북악산으로 물었다.
지혁의 질문에 지아는 당장 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은행나무 거리를 보고 있자니 가을 단풍구경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유부녀라 말을 해야할지, 순수하게 작가로서 함께 가자고 했을 수도 있는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혼자 유부녀라 무턱대고 커밍아웃하는 게 맞는지. 혹은 신분을 밝히지 않고 등산 갔다가, 아무 남자나 따라오는 이상한 아줌마처럼 보이지 않을까도 염려되었다. 조언해 줄 <맛키> 세 친구가 갑자기 그리웠다.
“저.. 결혼했어요. 아이도 있구요.”
“.......”
“그저 같은 일을 하는 동기로 봐 주신다면 함께 가보고 싶어요. 저도 다음글 소재로 단풍을 적어보고 싶어요.”
“얼마든지 함께 가면 좋죠!”
막상 아무렇지 않은 지혁의 반응에 지아는 뭔지 모를 서운함이 생겼다. 은근 이성으로 관심 있기를 바랐나. 그래도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은 편했다.
지혁은 사실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 본 이후 도서관에서 지아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을 들른 지아를 본 적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가 유부녀일 수도 있을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확인 사살 당한 기분이라 가슴은 쓰라렸다.
그는 사살당한 가슴을 한손으로 슬쩍 쓸어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바깥 풍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커피잔을 다시 들었다. 창 밖 은행잎 하나가 나풀나풀 공중에 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발소리가 좋았다. 서울 안에서 이렇게 갖가지 색상의 예쁜 낙엽과 자연 풍경을 직접 볼 수 있을지 몰랐다. 영상으로 이곳을 본 적 있지만, 함께 올 사람이 없었다. 등산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남편, 매일 학원 가기 바쁜 아이들, 회사일에 바쁜 친구들.
전망대에서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나무에 둘러싸인 경복궁과 병풍처럼 뒤에 펼쳐진 서울 마천루 풍경이 장관이었다. 한쪽은 큰 고급주택이 모여있는 성북동으로 큼직한 나무들이 곳곳에 있고 낙엽에 물들어 있었다.
가슴이 탁 트였다.
그때 찰칵찰칵, 지혁이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문 사진작가 같았다. 저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었구나. 그를 처음 도서관에서 본 후 트러블 JJ를 찾아 그의 여행견문록을 읽어나갔다. 글 한편에 사진은 몇 개 없었기에 저렇게 많이 찍을지 몰랐다.
찰칵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지아씨는 항상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거 같아요.”
‘그 모습이 이뻐요.‘라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선을 넘으면 지아가 부담스러워할지 모른다.
“풍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다행히 오늘도 날이 좋으네요.”
“공기도 좋고,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히네요.”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 지아를 보니 지혁이 기분 좋았다.
“우리 조금 더 올라가 볼래요?”
조금 가파른 곳에서는 지혁이 지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여전히 생각보다 더 큰 그 손은 따뜻했다. 편평한 곳에서는 천천히 걸으며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주로 지혁이 갔던 여행지에서의 해프닝들이었다. 그의 자유로운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지아는 간접경험만으로도 즐거이 만족했다. 깔깔대는 그녀를 보니 지혁은 신이 나 더 많은 썰을 풀었다. 덕분에 지아는 인생에 갈 일 없을 것만 같은 오지탐험 이야기도 들었다. 그녀는 지혁이 이야기꾼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쉽지 않았을 결정이었을 텐데.”
“번아웃... 이 왔었죠.”
지혁은 물통을 꺼내 물 한 모금 들이켰다.
“회사를 그만 다니고 싶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선호하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사직하기 쉽지 않았어요. 조직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번민이 오기 시작했고, 그냥 떠나고 싶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다잡으려고 독서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죠. 부모님의 만족뿐만 아니라 그 동안 그곳에 입사하기 위해 노력했던게 아까워 버티고 싶었어요.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오히려 떠나라고 알려주는 듯했어요. 무작정 사직서를 냈죠. 그리고 배낭 메고 그냥 떠났어요. 인도로. 그게 시작이었어요.”
“인도였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어요?”
“아뇨.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삶과 죽음을 생각하니 인도가 떠올랐어요. 다시는 배낭여행을 하고 싶지 않을만큼 엄청 고생하고 왔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심장이 뛰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기행과 느낌을 트러블JJ 필명으로 올리기 시작했던 거예요. 지아씨는 떠난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요?”
떠난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디론가 혼자 떠나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고,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해 보면 떠난다기보다 사라지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독박육아를 하다 보면 난감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온몸에 전기가 돌고, 머리털이 다 뽑힐 거 같고, 숨이 가빠졌다. 그때 펑 하고 그냥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홀로 여행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간다면 이집트를 가보고 싶어요. 어릴 때 역사책을 읽거나 미술사 공부 할 때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어요. 고대문명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기원전부터 살았던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데 직접 가서 보면 상상의 나래가 감당 못 할거 같아요. 그 오래전에도 문명이 있었다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책에 기록된 사건들은 얼마큼 진실일까. 그런 역사가 어떤 기호로 쓰여 내려온 것도 신기하고.......”
평소 그녀와 달라 보였다. 항상 진지하고 말을 아끼던 지아였다. 이렇게 눈을 반짝이며 조잘대는 지아는 도대체 어디 있었을까.
지혁은 그런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귀담아 들어주었다. 가끔 리액션도 하고, 질문과 답도 하고 감탄사도 쓰면서.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항상 흥미로왔고 그는 본인도 모르게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지아가 싱글이었다면 지혁은 다시 사랑할 생각을 했을지 몰랐다. 그러면 더 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고 정착할 수 있을텐데.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지아는 오랜만에 '대화‘가 즐거웠다. 요즘은 모든 이야기가 지루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상담의와의 대화도 즐겁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몸속 독소들이 빠져나간 듯 몸이 가벼웠다. 가벼운 산행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와의 진솔한 대화 때문이었을까. 지아는 오랜만에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희미해져 있던 자신의 자아가 그로 인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 진짜 맛있는 유명한 손만두집 있는데. 먹고 갈래요?”
어느덧 산을 내려온 듯했다. 둘은 아쉬웠다. 지아는 마치 상상 속 신비한 판타지 나라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바스락거리던 흙길을 벗어나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밟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주변은 온통 회색빛으로 비뀌었다.
띠디디딕 띠디디딕...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휴대폰 알람이 울려댔다.
“미안한데 다음에 가야 할 거 같아요.”
“다음... 있는 거죠?”
지혁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알람이 울리면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책임져야 할 어린 존재들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 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되었다.
모찌러버.
찾았다.
’ 안녕하세요. 아까 잘 들어갔어요?‘
지혁이 플랫폼을 통해 DM 보냈다. 사실 아직 지아의 전화번호는 몰랐다. 단풍산행은 카페에서 두 사람이 약속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했었는데, 당시 지아가 유부녀라 말을 한 순간 그녀 연락처를 먼저 묻기 어려웠다.
세 시간 후에나 지아로부터 답장이 왔다. 저녁시간, 아마도 아이들 육아로 바빴겟지.
’ 아까 급히 와서 죄송했어요. 차가 막히면 안 되니......‘
함께 맛집을 못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면 자신이 다음 만남을 또 기대할 거 같아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했다.
지혁은 남의 말을 참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다정함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안 될 거 같았다.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에요. 걱정했어요.‘
’ 고마웠어요 오늘.‘
’ 저도 함께여서 감사했습니다.‘
두 사람은 더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참았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소울메이트 같은 느낌이랄까. 지아와 지혁은 서로 닮은 점도 통하는 점도 많았다.
’ 다음... 에 또 볼 수 있을까요.‘
손만두국 혼자 먹었다며 너스레 떨고 싶었지만 참았다. 혹시 그녀가 농담마저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러면 아예 연락을 차단할까봐.
’.......‘
역시 지혁은 여전히 그녀 전화번호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건 지아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에 대해 감정이 일도 없다면 물었겠지만, 둘 다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010.0000.0000. 또 글감 찾고 싶을때 언제라도 연락해요. 잘자요.'
번호를 바라본 지아는 저장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기도 싫었다. 그냥 그렇게 DM창을 닫았다.
지혁은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컴퓨터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때 카페 안에 앉아있던 지아의 모습이 모니터에 떴다. 그는 왼손으로 곁에 연필을 무심히 집어 작은 스케치북에 그녀 얼굴을 그려보았다.
휴대폰 진동이 울리면 그는 얼른 확인했다. 혹시 그녀에게 연락 왔을까봐.
지혁은 곧 해외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전에 지아를 한번 더 만나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녀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얼마 후 날은 금세 쌀쌀해졌다. 지혁은 집에서 입던 편한 반바지에 스웨터, 그 위에 패딩쟈켓을 무심히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떠날 여행지 관련 정보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냥 동네 도서관에서 여행 에세이를 찾아보거나 글쓰기 책을 좀 더 뒤적거리기 위해서였다. 지혁은 그 이유라고 스스로 명분을 만들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며 도서관내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그녀가 있을까. 입구가 잘 보이는 구석 자리에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글도 끄적이며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그녀를 한동안 기다렸다. 그러다 잠시 졸았을까.
지혁은 인기척에 화들짝 깼다. 누군가가 책상 위 그의 곁에 작은 종이가방을 두고 있었다. 지혁은 잠결에 본능적으로 재빨리 그 사람 손목을 낚아챘다. 여행 중 소매치기 당하면 큰일이기에, 이런 방어적인 행동은 생존 본능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가늘고 부드러운 여린 손목이 잡혔다.
지혁은 그 손목을 꽉 잡은 채 잠을 깨기 위해 다른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눈에 초점이 맞춰지며 희미하게 보이던 그 손목의 주인이 또렷이 보였다.
거기에는 당황해하는 지아가 서 있었다. 마치 덫에 걸린 토끼같은 얼굴이었다.
“지아씨“
그냥 가려했던 건가.
”아 곤히 주무시길래 잠시 이것만 두고 가려고. “
지혁이 종이백을 열어보니 두건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행용 스카프가 담겨있었다.
”전에 여행 때 두건 쓰는 거 같길래. 잘 다녀오세요. “
지혁은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 품에 안고 싶었으나 참았다. 대신 용기내어 한마디 했다.
"날도 추운데 따끈한 우동 먹을래요?"
의외로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은 가까운 근처 코너 지하 작은 일본 가정식 백반집에 들렀다. 지아는아기자기한 그릇들이 귀여워 식당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머 동네에 이런 숨겨진 곳이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귀엽죠?"
지혁은 지아를 의식해서인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코너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제서야 이곳이 동네라는 걸 깨달은 지아는 살짝 불안했다. 혹시라도 동네 사람들이 들어와 낯선 남자와 밥을 먹는 지아를 본다면 입방아에 오릴것이 틀림없었다. 그런걸 눈치 챘는지 지혁이 안심시켰다.
"걱정말아요. 이 곳 아직 영업전이에요. 이곳은 점심과 저녁시간에만 열어요."
"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지혁이 빙긋 웃어보였다.
"이 곳 사장이 친한 동생이에요. 아 입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이니 걱정말구요. 이곳은 이 우동과 저 백반이 맛나요. 먹어볼래요?"
지혁은 메뉴판에 그림을 가리키며 주문했다. 두 사람의 테이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이 먹음직 스러워 보였다. 몇가지 음식들과 따끈한 정종도 한도쿠리 준비되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은 보기와 다르게 올망졸망한 작은 일본 가정식 음식들을 가지런히 정성들여 요리했다. 음식 준비가 끝나자 사장은 장보러 가니 지혁에게 가게 좀 봐달라며 조용히 가게를 나갔다.
지혁과 지아만 남았다. 의외의 장소에 둘이 앉아 있으니 지아는 지난번 단풍산행때 마냥 신비한 나라에 온 듯했다. 둘만 있는 조용한 공간에 은은한 음악마저 없었다면 무척 어색했을 거다.
"혹시 마법사세요?"
지아의 엉뚱한 질문에 지혁은 또다시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먼저 우동그릇을 들고 후루룩 국물을 마셨다. 지아가 따라서 했다.
"자 이제 먹어볼까요? 저 그때 혼자 손만두국 먹으며 얼마나 울었는데."
"미안해요. 그 때 서둘러 가야해서......"
"그 중 반은 맛있어서 울었던 거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럼 우리 오늘 맛있게 먹어요. 짠!"
따끈한 우동국물로 속을 덥힌 후 따뜻한 사케 한잔 들어가니 추웠던 몸이 풀렸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행복한 그 느낌이 통했다. 다시 정종 한잔을 들이켰다. 이번엔 새콤한 장아찌를 먹고 쫄깃한 우동면을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이 집 정말 맛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이렇게 먹어도 되는건가요?"
작은 어묵을 오물오물 씹으며 지아가 물었다.
"네 전혀 괜찮아요. 이 친구도 여행을 자주 떠나는 편이라, 그런 사장을 아는 사람만 오는 식당이라 해야하나. 그래서 잘 알려져있지 않아요. 홍보도 하지 않고 손님 많은것도 달가워하지 않아요. 평소땐 묵직한 요리 장인같은데, 가게 닫고 일이주 훌쩍 떠나기도 해요. 그러니 어떻게 일반 손님을 받겠어요."
"그러면 오셨던 손님들은 허탕칠 일이 많겠군요."
"아뇨. 비공개 커뮤니티가 있어서 미리미리 일정 알려줘요. 자리도 몇개 없어서 가끔 예약해야 할 때도 있답니다. 이쪽에선 나름 유명한 친구에요. 하하하"
세상에는 참 많은 다양한 삶이 있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자주 보는 사람처럼 둘만 있는 공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두사람은 단풍 산행에서 못다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지혁은 이번에 떠날 새 여행지에 관해서 알려주었다. 여러명이 함께 가지만, 추운지역으로 떠난다고 했다.
지아는 그의 안부가 염려되었지만 입밖에 내지 못했다. 대신 남은 정종을 털어넣었다. 디저트로 작은 일본식 찹쌀떡을 먹었고 녹차 한모금 마셨다.
"가기전에 밥 한끼 함께하고 싶었어요."
"......."
저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아는 입을 다문채 그가 말하는 입만 쳐다 보았다.
"당신을 알게 되서 기뻐요. 글도 간간이 올려줘요. 내가 읽을 수 있게."
"네?"
"우리 진지한 진지아님. 또 놀랜다. 그냥 나 멀리가니 한국 이야기 가끔씩 글로 올려달란 말이예요."
지혁은 아까 지아가 선물해줬던 두건을 보며
”고마워요. 이번 여행에 가져가서 잘 쓸게요. 저...는 항상 지아씨 응원할게요. 주저하지 말고 당신으로 돌아가요. 당신은 충분히 그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 글도 읽어줘요. 구독, 좋아요?“
지아가 웃었다. 그녀가 혹 부담스러워할까 지혁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다가 결국 농담으로 마무리 지었다.
뭐... 그녀가 웃으면 그만이었다.
지혁은 그녀를 지긋히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내 글 꼭 읽어줘요."
마지막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은 더 이상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서로가 얼마큼 통하고, 만남을 원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을 넘지 않고 상대방의 삶도 소중히 아끼는 거 또한 진실한... 사랑일지도 몰랐다.
그 후 지아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아주 가끔 트러블JJ 글을 찾아보았다. 사진 속 그는 항상 같은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두건으로 쓰거나 혹은 목이나 손목에 감고 있었다. 지아가 준 바로 그 스카프였다.
에세이속 사진 풍경을 보면 마치 지아가 그의 곁에 서 있는 듯 했다. 그의 카메라 시선이 가는 쪽으로 그녀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동화 속 같았던 바스락 거리는 산행이 떠올랐다. 가을 색상으로 마구 칠해진 물감 속 세상에 한가로이 걸어다녔던 둘만의 짧은 추억.
일본 어느 시골 골목에 있을 법한 작고 귀여운 일본식 식당. 그 공간에서 그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밥을 먹고 따스한 악수를 나누웠던 그 시간과 공간도 현실이 아닌 동화책 어느 한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그의 글 끝자락에는 항상 JJ에게 글이 한 줄 남겨져 있었다. 안부인사도 응원의 글도, 그립다는 말도 그 몇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 글을 볼때면 지아는 가슴이 뭉클하고, 앞으로 절대 만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올라왔다. 그 한 줄이 누구를 향한 글인지 지아는 알고 있었다. 그녀 이름 이니셜도 JJA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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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