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 우리 이야기
금세 쌀쌀한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 10월도 거의 지나간다.
지아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혼자 걸어 단골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쌀쌀한 바깥 날씨 때문인지 카페 안은 훈훈했다. 커피를 받아 항상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인해 금빛 은행잎 시냇물은 어디론가 흘러 사라지고, 축축이 젖은 누런 은행잎만 덩그러니 남아 거리를 뒹굴고 있었다.
얼마 전, 그림 같았던 창 밖 가을 경치를 그와 함께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웠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지아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펜과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고 아까 쓰던 글에 이어 스토리를 적어 내려갔다.
지아는 밑줄이 그어지지 않은 하얀 공백의 스케치북을 좋아했다. 비록 그녀의 손글씨 문장들은 바른 행간을 유지하지 못하지만, 밑줄이 없기에 그 하얀 페이지 위를 온전히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다. 푸른 신호등일 때 굵은 선이 그어진 횡단보도 위를 건너야 한다거나, 규칙이 정해진 놀이에서 그 선을 넘으면 죽거나, 아파트 아래위층 층간 선을 넘으면 욕지거리가 오고 간다거나. 그 선이 나를 지키는 긍정적인 의미든 나를 옭아 매는 부정적인 의미의 선이든 지아에게 '선'은 답답했다.
아이가 눌러쓴 글씨들은 층간에 끼어 아등바등 아우성치는 듯했다. 선을 넘고 삐져 나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자유로워 보였다. 연습이 거듭되면 점점 글씨들은 그 선 간격에 맞춰 줄지어 생활하기 시작한다. 가끔은 이쁜 글씨체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적응해 가도 된다. 그런데 지아는 그게 답답했다. 선이 없어도 이쁜 글씨를 쓸 수 있고, 선이 없다면 다양한 글씨도 쓸 수 있으며 그림도 그려 넣을 수 있다. 그러면 더 편하게 생각을 쏟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지아는 하얀 공백의 스케치북에 아이디어를 옮겨 담고, 거기서 출발한 이야기를 스케치북 한장한장 백지에 펼쳐나갔다.
또 다른 선. 지아는 그와의 선을 넘을 수 없었다. 선을 넘지 않고 착한 글씨인양, 아니 착한 글씨로 예쁘게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틈틈이 야금야금 글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조금 커서 그런 자투리 시간이 생긴 것만도 사실 감사하다. 불만이 있다면 글에 몰입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색을 하고 그 기운을 문장 속에 고이 우려 넣어야 하는데 매일 알람이 울리면 후다닥 뛰쳐나가고, 아이들과 실랑이하면서 웃고 잔소리하고 밥 먹이고 나면 혼이 나간다. 쓰던 글에 여운을 담고 하루를 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띵
문자알림 소리가 났다.
혼자 끄적이고 있던 지아가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맛키> 친구들 단체톡이었다.
[ 얘들아 우리 맛키 모임에 중요한 발표가 있어~
2024년 11월 00일 00시 <맛있는 키스>로 빠짐없이 참석해 주길 바래.
PS: 드레스 코드는 화이트. 이쁘게 하고 와. 완전체로 단체사진 찍을 거야. (작가 섭외 중)
또 PS: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우리가 항상 궁금해하던 사람 ]
혜연이 보낸 메시지였다. 밑으로 줄줄이 댓글이 달렸다.
‘누군데?’
‘모야? 무슨 일이야? 50살도 아닌데 재혼식은 아닐 테고’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이왕이면 뽀샵 능력자로 섭외바람.’
혜연의 미국 출장 직후 완전체로 모였던 8월 모임 이후에도 친구들은 여전히 삼삼오오 <맛키>에서 자주 만났다. 그녀들의 아지트인 만큼.
한 달 반 전쯤인가, 그 모임에서 세희는 정훈과의 이별을 친구들에게 통보했다.
세희는 그날 혜연의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연과 정훈의 관계를 모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훈에 대한 사랑으로 세희는 참고 결혼을 감행하려 했었다. 정훈이 지연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겠다며 약속도 했었다. 어쩌면 정훈이 그녀 생에 마지막 연인이 될 수 있기에, 그 사랑에 최선을 다해보려 했던 거 같다. 그를 믿었다.
그런데 세희가 신혼집에서 지연과 정훈의 관계를 우연히 알게 된 후, 지연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세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훈의 마음을 쥐락펴락 뒤흔들고, 우유부단한 그는 또 지연과 실수를 하고, 세희에게 줄곧 사과를 하면서도 세희와 결혼하려 했다. 결국 세희는 파혼을 결정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연도, 그녀에게 끌려다니는 정훈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저리 났다.
하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의 마음은 찢기고, 멍이 들었다. 그때 친구들은 세희를 위해 함께 울어주었다.
며칠 전 모임에서는 지아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더 이상 정신과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의 주부 우울증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자신을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키워주기 위해 스스로 보살피기 시작했다.
매주 가던 정신과 상담 대신 지아는 글쓰기 수업을 등록하고, 독서를 하고, <모닝커피> 플랫폼에 글을 쓰며 조금씩 자존감을 높이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글이라고 여기는 자신의 글에 그곳 작가들이 ‘좋아요’ 하트 하나만 눌러줘도 그녀는 흥분되고 행복했다. 바닥 저 밑 어두운 지하 10층 정도 아래 처박혀 있던 자존감은 그렇게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다시 붓도 들기 시작했다. 지아는 출간작가라는 목표가 생겼다.
친구들은 그런 용기 내는 지아를 응원하고 지지했다.
세 친구는 그녀 가슴속에 따뜻하고 강한 긍정 에너지를 발산하는 작은 핵이 생긴 것을 느꼈다. 불과 한 달 전 지아는 그렇지 못했다. 인생에 지쳐 공기 중에 흩어져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 그녀였다. 출산 후 오래도록 앓아온 주부 우울증을 친구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녀들은 지아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물밑에서 조용히 지지하고 있었다.
반면 지아는 그녀 속에 새로 생긴 에너지가 뭔지 조용히 혼자만 알고 있었다.
그녀 존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그녀를 들여봐 주고, 사랑해 주고, 마음 깊숙한 곳을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 존재가 지아의 자아를 어두운 동굴 속에서 끌어내 주었다.
친구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미안했다. 하지만 연인에게서 받는 사랑은 결이 조금 다르다. 노의사는 지아가 그 존재에 대해 마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여 그녀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언해 주었다. 인생에 한 명쯤 그리운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 그리움은 마음속에서 어떤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그 한줄기 빛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를 이용해 나와 내 가정을 잘 꾸려 나간다면, 더 좋은 거라고. 죄책감 같은 감정을 가지지 말라고 지아에게 일러주었다.
같은 날 모임에서 수민도 민민커플의 장거리 연애에 대한 괴로움을 마지막으로 전했다. 창민이 한국으로 이사 온 것이다. 그동안 여러 오해와 갈등이 있었고, 창민은 그녀를 위해 한국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 직업상 여전히 출장이 잦지만, 적어도 함께 생활할 수 있으니 만족스러웠다. 결혼? 두 사람은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다. 한 집에서 동거하며 오롯이 둘만의 사랑을 더 즐기기로 합의했다.
그날... 도 혜연은 자신의 혈액암 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병원 통근 치료는 이미 시작했고, 곧 입원해서 항암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제 친구들을 더 속일 수도 없다. 볼륨 있는 웨이브로 한껏 멋을 내고 다니던 긴 머리는 곧 다 빠져버리고 사라질 테니 말이다. 민둥 해진 머리는 비니나 모자를 눌러쓰겠지. 원래 마른 체형이지만 투병 중에 더 쇠약해질 것이 틀림없다. 얼굴도 퀭해질 테고. 그런 환자의 모습을 보인다면 친구들이 가슴 아파할 것 같았다. 그전에 미리 알려야지.
하지만 지아의 용기와 새로운 시작, 수민의 사랑 성공기에 자신의 암 소식으로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친구들의 밝은 미래만 응원하고 싶었다.
혜연은 생각했다.
언젠가는, 곧, 친구들이 서운해하지 않게 즐겁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행복한 모습으로.
2024년 11월 00일
혜연이 앞이 파인 흰색 원피스를 입고 먼저 와서 기다렸다. 잠시 후 세희, 수민, 지아가 줄줄이 도착했는데 그녀들도 흰 옷을 입고 나타났다.
”언니가 입으래서 입고 왔는데, 우리 무슨 날이야? “
”흰색으로 통일하고 단체샷 찍으면 이쁘잖아. 더구나 여기 우리 아지트에서 찍으면 추억도 되고. “
그러고 보니 아지트, <맛키>에 다른 손님들이 없었다. 세명은 어리둥절했다.
”우리 언니, 설마 여기 통째로 빌린 거야? 내 왕자님이 되어주오. “
"내가 왕자라면 삼천궁녀를 받아들일지언정 수민 낭자는 사양하오."
”아 또 설정개그. 근데 역시 손이 커 언닌. “
지아는 여전히 아..로 시작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대박! 언니 어디가? “
세희의 '어디가'냐는 말에 혜연은 뜨끔했다. 역시 네 명이 다 모이니 수다스러운 대화의 끝이 없다.
”우리 일단 사진부터 찍자. “
혜연은 친분이 있는 포토그래퍼를 섭외했다. 그러고 보면 15년간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들인데 한 번도 제대로 된 단체샷이 없었다는 게 아쉬웠다.
우선 그녀들은 즐겨 앉던 테이블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입술사진과 그림 앞에서도 촬영하고, 카페 공간 곳곳에서 사진촬영 했다. 마치 결혼식에 들러리들끼리 사진 찍는 모습이었다.
포토그래퍼는 단체샷뿐만 아니라 커플, 혹은 개인 초상화도 찍어주었다.
박물관 느낌의 카페라 그런지 사진이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나왔다. 그렇게 한 시간여 사진 촬영 시간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았다. 목이 말라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들이켰다.
”재밌네. 15년 전에도 찍을걸. “
”지금이라도 찍은 게 어디니. 오늘이 앞으로의 가장 어린 날이라 하잖아. “
혜연의 대답에 모두가 키득거렸다.
” 얘들아 손님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같이다. 소개할 분들 불러도 될까? ”
"그럼요, 누구실까요?"
모두들 얼른 부르라는 눈빛이었다.
혜연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현준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왔다. 역시 패션디자이너답게 장난스레 모델워킹을 하며 마치 나풀나풀 날아오는 나비처럼 이쪽으로 걸어왔다. 반면 그 뒤로 한 세련된 중년 남성이 쑥스러운 듯 따라 나왔다.
“이 두 분은 한재준, 한현준 형제 셔. 우리가 궁금해하던 바로 그 <맛있는 키스> 사장님!”
바 쪽에서 일을 하던 훤칠한 매니저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두 형제의 조카로 올려 묶던 머리를 최근에 단발로 잘랐는데 인물이 산다.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거 같았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현준과 멤버들은 가끔 혜연의 생일이나 행사 모임에서 만났기에 안면이 있었다. 사교성이 뛰어나 다양한 사람들과 소셜 하느라 바빠도, 구석에서 조용히 칵테일만 들이키던 혜연의 친구들을 항상 살뜰히 챙겨줬던 현준이었다. 멤버들의 눈이 커졌다.
“대박. 여기가 현준 오빠 카페였다고요?”
“우린 어떻게 지난 3년 동안 전혀 몰랐죠?”
“우리가 단골인 거 몰랐죠? 알았어요? 언니는 알고 있었어?”
다들 한 마디씩 했다.
“나도 얼마 전에 우연히 알았어.”
혜연이 현준과 재준을 보며,
“내 말 맞죠? 다들 까무러칠 거라고. 어떻게 3년이나 속일 수 있어? “
“단골인 거 당연히 알고 있었지. 미리 말 못 해 쏘리. 사실 처음 혜연이를 여기서 봤을 때 인사하려고 다가갔었어. 그런데 네 사람이 프라이빗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하길래 비밀 이야기인가 싶어 조용히 모른 척 돌아 나갔지. 낮에는 거의 카페에 오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면 내가 여기 사장인걸 모르는 게 낫게다 싶더라고. 편히 수다하고 가라고 안 알렸지.”
“혹시 그래서 저희한테 음료 무한리필 해주고, 음식도 서비스로 해주신 거예요?”
현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준을 다시 소개했다.
“ 혜연이는 이미 알지만, 이 분은 내 친형이야. 형은 건축가인데, 이 공간은 형과 나의 놀이터라 보면 돼.”
감각적이고 시크해 보이는 현준과 달리 재준은 말끔하고 세련돼 보였다. 머리도 왁스를 발라 단정하게 빗어 뒤로 넘겼고, 일상복으로 티셔츠에 항상 쟈켓을 입는 신사였다. 올해 50세라고 하지만,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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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