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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Dec 24. 2019

오후, 손님



그들은 초록빛이 많은 방향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붙잡고 종이 귀퉁이가 흐물해질 지경으로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고요하게 오렌지색 햇살이 내려앉은 정원은 부드러운 천으로 슥슥 문지르면 지워져 버릴 것처럼 희미하게 빛이 번져있었다. 


땅 쪽으로 몸을 잔뜩 구부린 조심스러운 자세의 그 둘 중 한 쪽은 어머니, 한 쪽은 누가 봐도 같은 눈을 한 그녀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단정하고 어디에나 어울릴 법한 톤의 얇은 코트를 걸쳤다. 어린 딸 쪽은 계절과는 전혀 상관없는 빳빳한 재질의 검고 작은 모자를 썼고, 같은 재질과 색의 코트 밑으로 두툼한 흰 스타킹까지 신고 있었다. 모녀는 눈이 아주 동그랗고 컸으나 원래 큰 눈인지 겁에 질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은 그렇게 내 눈앞에 나타나서 더 다가오지도 않고 공손한 자세로 고쳐 서서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펴두었던 책을 덮어 자그마한 나무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떻게 오셨나요? 대문으로 들어오신 게 아니라 정원 옆쪽으로 들어오신 걸 보면 혹시 다른 집을 찾아가시려다 잘못 들어오신 건가요?”

아이 쪽이 조그마한 입을 겨우 떼며 한 발 앞으로 나오려하자 어머니는 손으로 아이를 잡아 세웠다. 

“이 동네 집들이 비슷비슷하긴 해요. 다들 오랫동안 산 집들이라 정원이 많이 우거져서 대문을 찾기 힘든 집도 많죠. 집 사이에 담을 확실하게 높여 두질 않아서 한 번 골목을 잘못 들면 헤매기 쉬워요. 어디를 찾아오신 건지 말씀해주시면 길을 알려드릴게요.”


내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그들은 미동이 없었다. 어머니가 움찔거리는 아이를 한 번 막아서고 나자 아이도 조용히 숨죽인 상태로 큰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이었다. 꽤 시간이 흐르고 그 둘이 나를 가만히 살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모녀라고는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떤 미치광이들이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나 범죄를 목적으로 해코지라도 하면 집 안에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

“저...저기, 길을 잃으신 게 맞나요? 아니면 저희 집에 볼 일이 있어서 오신건가요? 일단은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느린 움직임으로 앉아있던 낡은 나무의자에서 일어나 약간 뒤 쪽으로 물러섰다. 둘이 동시에 공격해온다고 하면 내 주변에는 의자와 테이블, 책 한권, 마시던 찻잔뿐이다. 둔한 나로서는 이걸로 충분한 반격을 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나, 그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내 긴장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지 왠지 어머니 쪽은 태도를 바꿨다. 두 손을 공손히 앞쪽으로 모으고 발도 가지런히 모아서 고개를 약간 숙여 섰다. 아이는 그런 엄마를 뒤로 고개를 돌려 흘끔 보더니 자기도 공손히 작은 두 손을 모았다.


그제야 모녀의 행색을 자세히 살폈다. 어린 딸이 신고 있는 흰 스타킹은 군데군데 더러운 진흙 같은 것이 묻었다. 아마도 풀숲 쪽을 거쳐 오느라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모자도 코트도 예쁜 검은색이었지만 손질할 여력이 안 되었는지 표면이 거칠게 일어나 있었고, 모자 밑에 숨겨진 머리는 말할 것도 없이 헝클어진 상태였다. 어머니 쪽도 언뜻 봤을 때 굉장히 깔끔한 차림새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요즘엔 찾을 수도 없는 구식 코트였고 낡고 닳아 얇아져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빗었다 뿐이지 얼굴이며 손등이며 꺼칠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아마도 굉장히 오랫동안 같은 차림새로 힘겨운 생활을 해왔던 것 같았다.


“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말씀을 해주세요. 이 동네 안에서만 헤매셨다고 해도 한참은 헤매신 것 같은데 많이 피곤하시겠죠. 더군다나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계시니까요.”


아이는 몇 번이나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그 때마다 어머니가 조용히 아이를 제 쪽으로 당겼다.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아까보다는 편안한 눈빛이었다. 덕분에 혹시나 해코지를 하려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껏 경계했던 내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차와 함께 먹으려고 어제 구워둔 쿠키가 조금 있어요. 급하신 게 아니라면 잠시 쉬었다 가셔도 되니까 제가 쿠키를 가져올 동안 기다려주시겠어요? 이 시간이면 아이가 꽤 허기질 것 같아서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더욱 공손하게 땅 쪽으로 고개를 숙였고, 나는 마시던 찻잔과 책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큼직한 쟁반에 아끼던 예쁜 접시를 꺼내 올리고, 구워둔 채 손대지 않은 쿠키를 일렬로 정리해 담았다. 차도 같이 대접하는 것이 좋을 듯해 물도 새로 끓였다. 식탁에 기대서서 들썩이는 물주전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가 이웃에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 동네에서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다. 혹시나 얼마간 밖에서 지냈던 것은 아닐까. 정돈된 외모로 보아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인 것 같긴 하지만 거친 공간에서의 힘들었을 생활까지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었다. 초면인데 이런저런 사연까지 물어보기에는 무례한가? 오히려 무례라고 한다면 다짜고짜 내 집에 들어와 설명조차 없는 그들 쪽이 해당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머릿속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물이 끓어 부드러운 수증기를 내뿜었다.


준비된 차와 쿠키를 들고 나가자 어머니는 서 있던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고, 아이는 정원 구석구석을 춤추듯 뛰어다니며 꽃이랑 풀이랑 동그란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지친 기색의 눈으로만 아이를 좇다 내가 나오자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제가 솜씨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요. 그래도 먹을 만 할 거예요. 레시피는 확실하게 지키거든요. 차도 같이 준비했으니 같이 드세요.”

나무 테이블에 내려놓은 쿠키와 차를 보고 아이는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어머니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아이는 함박웃음으로 쿠키를 먹으러 달려왔다. 의자에는 앉지도 않고 테이블 주위에 선 채로 부스러기를 잔뜩 흘리며 쿠키를 먹는 데 열중했다.

“맛있니? 남은 게 아직 많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


어머니는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더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머리도 조금 더 매만지고 코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신발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여기저기 매무새를 확인했다.


“저기...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혹시 지내실 곳이 없으신 거라면... 제가 남편과 한 번 상의해 볼 수 있어요... 아기가 생길 걸 대비해 큰 집으로 이사 온 지가 몇 년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서 남는 방이 좀 있거든요. 당분간 지내시는 데는 문제없을 거예요. 아마 남편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아이는 그 사이 내온 쿠키를 부지런히 다 먹었다. 접시에 남았던 크고 작은 부스러기까지도 깔끔하게 해치웠다. 

“다행이다. 입에 맞았나 보구나? 조금 더 가져다줄게. 혹시 쿠키말고 더 먹고 싶은 건 없니?”

아이는 크고 맑은 눈으로 그저 나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부숭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입가의 쿠키 부스러기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빈 접시를 들고 집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일렬로 정리하지 않고 접시에 수북하게 쿠키를 담아서 나왔다. 내가 집에 들어간 잠깐 동안 어머니는 테이블로 와서 차를 조금 마신 모양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젊은 얼굴에 놀랐다. 아직 어린 어머니에 어린 딸이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차도 얼마든지 더 드릴 수 있어요. 아, 해가 넘어가려고 하네요. 해 떨어지고 나면 이 동네는 꽤 추워요. 나머지 쿠키랑 차는 집 안에서 드실래요? 이따가 저녁식사도 함께 하셔도 좋구요.”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도 어지간히 배가 찬 듯 쿠키를 집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쓰다듬고는 데리고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이와 똑같은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 보다 눈동자가 훨씬 더 까맣게 맑고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걱정하는 마음과 그녀의 충만한 고마움이 서로 충분히 오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둘은 여기 묵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눈을 깜빡였고, 나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그 둘은 나타났던 풀숲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쪽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쿠키 하나를 손에 쥔 아이를 재촉했다. 아이가 먼저, 그리고 뒤를 이어 어머니가 낮은 담장을 소리도 나지 않게 폴짝 하고 뛰어올랐다. 오렌지색으로 물 들었던 정원은 어느 새 빛을 거두고 더 고요한 어둠의 색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오늘 밤 바람은 부드러울 것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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