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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Feb 28. 2020

범인은 반드시 돌아온다





이 답답한 동네의 이름은 작은 산 어딘가에 매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 이 사실을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우리 동네 잘 알기’라는 여름방학 숙제로 알게 되었다. 학교 소풍으로 몇 번이나 산을 올랐지만 그 바위를 본 적은 없다.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산등성이 하나씩을 차지한 동네는 숫자로 1,2,3,4동까지 서툴게 나뉘어 있었다. 고만고만한 시기에 지어진 붉은색의 다세대 주택들이 좁은 비탈을 따라 빼곡했다. 


나의 집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부모님의 집은 바람이 잘 불어오는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교문을 빠져나와 중학생 언니 오빠들이 삼삼오오 몸을 숨겨 담배를 피우는 작고 짧은 샛길을 지나고 4차선의 큰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오래된 시장을 지나고 모퉁이 약국도 지나고 나면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에 다다랐다. 좁지 않은 언덕길이었지만 대문 앞마다 내어둔 평상 덕에 차가 지나다니려면 사파리 투어라도 하듯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길은 늘 건조했고 흙먼지가 날렸다. 여름이면 평상에 한쪽 무릎을 세워 괴고 앉아 커다란 부채로 열을 식히던 골목 아주머니들은 이따금 집안에서 한 바가지씩 물을 떠와 뿌연 길을 적셨다. 겨울에는 담벼락에 평상을 비스듬히 세워두는데 눈이 많이 쌓인 날엔 평상에 조금만 손을 대도 스르륵 새하얀 눈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즐거웠다. 평상에 쌓였던 눈을 모아 주먹만 한 꼬마 눈사람들을 만들어 담벼락에 세워 두었다. 바닥에 쌓인 눈은 흙먼지와 엉켜있어 하얀 눈사람을 만들 수 없었다.


언제나 골목에 흙먼지가 가라앉아있던 까닭은 언덕 꼭대기 반대편으로 버려진 공사현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집을 끝으로 그 너머의 땅은 마구 파헤쳐 진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난 채 나로서는 미처 세지도 못한 계절들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탈진 넓은 땅의 테두리는 녹이 슬어버린 철조망이 위태롭게 감싸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넘어가기 쉽게 구부러진 곳이나 아예 뚫려버린 곳도 많았다. 붉게 벌거벗은 언덕은 철근이나 부서진 회색 벽돌, 혹은 고물 같은 것들이 잔뜩 굴러다녔다. 나는 겁이 많아 눈앞에 뻔히 뚫린 철조망을 보고도 들어가 볼 용기는 내지 못했다. 하지만 바람이 선선할 때 언덕 꼭대기에서 철조망 앞 벽돌더미에 쪼그리고 앉아 지는 해에 더욱 붉어지는 쓸쓸한 흙더미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TV에서 본 사하라 사막이 이런 느낌일까, 불어오는 흙먼지에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상상하면서.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평지에 사는 친구가 없었다. 소연이는 유명한 정신병원이 있는 가파른 언덕 중턱의 낡은 빌라에 살았다. 효주네 집은 학교 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있는 약수터 근처였다. 예진이는 엄마의 피아노 학원에 딸린 작은 방에서 살았는데 그 학원은 우리 집 근처 시장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있었다. 간혹 언덕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친구네도 있었다. 성희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대문이 커다란 집에 살았는데, 그 으리으리한 대문이 아닌 담 옆에 돌아앉은 조그만 철문을 열고 몇 계단 걸어 내려가야 집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땅과 같은 높이에 사는 내 친구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동네 이름을 그대로 갖다 붙인 학교를 중심으로 우리는 늘 방과 후 각자의 높낮이로 흩어졌다. 어린이에게는 버거운 각도의 높은 언덕에 사는 친구들은 그나마 야트막한 곳에 사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우리 집에 존재하지 않는 세 가지에 환상이 있었다. 거실, 침대, 샤워기.


엄마 아빠가 마련한 이 자그마한 집에는 거실이라 부를만한 공간이 없었다. 해가 잘 드는 큰 안방이 거실의 역할과 침실의 역할을 둘 다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밥도 상을 펴고 안방에서 먹었으니 다이닝룸도 겸하고 있는 거였다. 엄마는 늘 부엌과 방 사이의 작은 공간을 ‘마루’라 부르며 ‘마루’에서 신문지를 펴고 마늘을 까거나 내게 ‘마루’에 있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오라 시키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루’는 ‘거실’과 같은 의미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TV에 나오는 거실은 소파와 TV가 마주 볼 만한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대. 피아노 학원에 딸린 예진이네 작은 방은 미닫이문을 열면 거대한 사이즈의 침대가 방을 꽉 채우다 못해 문 앞까지 차지하고 있어 들어가려면 이불이 깔린 침대를 꼭 밟아야만 했다. 방 전체를 침대로 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침대 너머 빈 공간은 예진이 엄마와 예진이의 옷가지들로 발을 디딜 수 없었고, 책상이 없는 예진이는 피아노 학원에서 모르는 아이들과 같이 숙제를 했다. 하지만 나는 예진이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폭신한 침대에 나란히 다리를 펴고 앉아 과자를 먹으며 만화영화를 보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나긋나긋한 엄마와 단둘이 매일 이 포근한 침대에서 자고, 아침마다 이불을 개 서랍장 위에 낑낑대며 올리지 않아도 되는 예진이가 무척 부러웠다. 


소연이네 집에는 한 번 가봤다. 낡은 빌라인 소연이네는 이상할 정도로 가구가 없어 방방마다 운동장 같았다. 소연이와 언니가 같이 쓰는 방에는 앉은뱅이책상 두 개가 구석에 나란히 놓여 있었고, 언니의 책상에는 워드프로세서라는 기계가 있었는데 그날은 그걸 구경하러 간 것이었다. 타자기만 써본 나에게는 조그만 화면에 내가 치는 글씨들이 채워지는 게 신세계였다. 정확히 타자기보다 뭐가 더 좋은지는 몰랐지만. 그 방 옆은 화장실이었다. 밑자락이 잔뜩 썩은 나무문을 열면 욕조와 샤워기가 정면에 보였다. 비록 욕조에 널따란 나무판자를 올려두고 그 위에 덩치 큰 세탁기를 얹어놓아 그림에서 보던 것 같은 거품 목욕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옆에 서서 샤워는 가능한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커다란 빨간 고무통에 따뜻한 물을 미리 받아두고 바가지로 물을 퍼 끼얹어가며 샤워하는데, 내 손이 수고하지 않아도 씻을 수 있는 샤워기가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소연이네에 갔다 온 이후로 한동안 나는 뭐에 좋은 지도 모를 워드프로세서와 샤워기 노래를 불렀고, 그 무렵 일기장에는 ‘거실이 있는 집에서 살고 서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서 잘 수만 있다면 좋겠다.’라는 거창한 희망사항을 적어 엄마의 눈에 띄기 좋은 책상 정중앙에 놓아두었다. 


혜미는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였다. 쌍꺼풀진 큰 눈에 약간 밝은 색의 곱슬머리를 늘 단정히 하나로 올려 묶었다. 뽀얗고 오동통한 볼살에, 말을 하기 전엔 잠깐 숨을 들이켜고 나서 작은 입을 오물거려 천천히 말했다. 윗입술 언저리에 말할 때마다 함께 움직이는 톡 튀어나온 갈색 점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예뻤다. 혜미는 위로 언니가 셋이나 있었다. 심지어 제일 큰언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입고 온 옷이 예뻐서 칭찬하면 혜미는 항상 언니한테 물려받은 거라고 대답했다. 자고 일어나면 키고 발이고 쑥쑥 자라버려 좋아하던 옷도 얼마 입지 못하고 금세 동생에게 물려줘야 하는 내 처지를 생각하면 물려받는 입장의 혜미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혜미와 나는 가을쯤 급속도로 친해졌다. 하굣길을 늘 함께했던 예진이가 갑작스럽게 멀리 떨어진 동네로 전학을 가게 되어 헛헛한 마음으로 육교를 건너던 어느 날, 저만치 앞에서 실내화 가방을 발로 툭툭 차며 걷는 혜미를 발견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실내화를 갈아 신으며 서로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갔다. 가는 길엔 박자에 맞추어 실내화 가방을 한 발씩 번갈아 차며 걸었고, 며칠에 한 번씩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성에가 잔뜩 묻은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걸었다. 


혜미는 다니는 학원이 없었다. 언니들이 공부해야 해서 자기는 학원을 다닐 수 없다고 했는데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예진이네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웠지만 예진이네가 이사 가면서 흐지부지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둘에게는 시간이 참 많았는데 주로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상을 펴고 같이 숙제를 하거나, 언덕에 함께 쪼그리고 앉아 새우깡을 먹으며 해가 지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우리는 보통 ‘나중에 커서’라는 주제의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커서 꼭 기둥이 있는 커다란 침대에서 잘 거야. 나중에 커서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살 거야. 나중에 커서 하루에 한 번씩 양념치킨을 먹을 거야. 나중에 커서 되게 높은 아파트에서 살 거야.


겨울이 일찍 집을 나섰는지 서둘러 목도리를 둘러 감아야 했던 어느 늦가을 하굣길, 여느 때처럼 실내화 가방을 차며 수다를 떨다 혜미의 꿈이 요리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라면도 잘 끓이지만 밥도 할 줄 알고, 심지어 된장찌개랑 김치찌개도 끓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그럼 오늘은 너희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 먹고 숙제하자고 방방 뛰었는데, 혜미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듯하다가 마지못해 그러자고 천천히 말했다.


늘 시장 앞에서 헤어져서 몰랐지만 혜미네 집은 처음 가 보는 길에 있었다. 아니, 길이라기에도 좀 석연찮았다. 시장을 통과해 끄트머리에 난 작은 틈을 따라 한참 가면 우리 집 너머 언덕처럼 붉은 흙이 드러난 공터가 나왔는데 공터 건너편엔 건물들이 죄다 등을 보이고 돌아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건물과 시장 끝 길 사이의 버려진 터인 것 같았다. 집은 그 터 중앙 구덩이가 파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에 덩그러니 처박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컨테이너였던 것 같다. 단단한 철판으로 된 그 집은 구덩이 아래에 있어 아마도 혜미네 아버지가 흙을 다져 만들었을 울퉁불퉁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야 문이 있었다. 집 옆면 한 쪽과 구덩이 테두리 사이에는 두꺼운 천막이 단단히 지붕처럼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 밑에는 자그마한 수돗가와 헐거워진 나무 문짝의 화장실이 있었다.


현관이랄 것도 없는 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는 정직한 직사각형이었다. 창문이 없어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이곳에 들어오자 금세 밤이 된 것 같았다. TV와 팔 하나 정도 길이의 작은 책상, 냉장고, 부직포 재질의 옷 수납장과 구석에 쌓인 이불들을 제외하고는 길고 텅 빈 방이었다. 한 쪽 벽에는 혜미 언니들의 이름표가 달린 교복들이 걸려 있었다. 공간은 하나인데 혜미를 포함한 딸 넷에 엄마 아빠까지 여섯 명이 일렬로 누워 자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어렴풋이 혜미가 나를 집에 데려오기 꺼렸던 마음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혜미는 언제 작은언니가 올지 몰라 오래는 못 있는다며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냉장고 위에 있던 작은 휴대용 버너와 냉장고 속 계란 두 개를 챙겨들어 수돗가에서 끓여 오겠다며 나갔다. 먼저 숙제라도 하고 있을 요량으로 상을 펴고 앉았던 나는 괜스레 일어나 혜미 언니의 빳빳한 교복도 만져보고 그 옆에 걸린 거울 밑 손바닥만 한 선반에 있는 로션도 들여다보고 그랬다.


TV 위에는 손뜨개로 만든 하얀 레이스가 덮여 있었고, 그 위에 몇 개의 액자가 겹겹이 서 있었다. 사진 속 혜미 언니들은 다 예뻤다. 엄마 아빠가 둘 다 눈이 아주 컸다. 여섯 식구 중 눈이 나처럼 작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오늘 혜미가 입은 연분홍색 바지에 갈색 스웨터를 그대로 입고 있는 혜미 언니 사진도 있었다. 환하게 웃는 표정이 혜미와 똑같았다.


액자 옆에 간장 종지 같은 흰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혜미네 엄마 것인지 귀걸이며 목걸이며 반지 같은 액세서리들이 담겨 있었다. 가장 위에 빨간 보석이 박힌 두툼한 금반지가 보였다. 왜 그랬을까. 나는 갑작스럽게 홀리기라도 한 듯 태연히 그걸 집어 바지 주머니에 쑥 넣어버리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상 앞에 앉아 숙제를 끄적였다.


혜미는 물은 좀 많았지만 계란이 잘 풀어진 그럴싸한 라면을 끓여냈다. 나는 주머니 속 반지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는데 혜미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언니 때문에 나보다 더 마음이 불안했던지 덤벙거리는 젓가락질을 하며 연신 시계를 쳐다봤다. 결국 우리는 라면 냄비를 다 비우지도 못하고 시작하다 만 숙제는 대강 가방에 쑤셔 넣고는 구덩이 속 집을 나서야 했다.


늦가을 해는 짧았다. 어둑한 시장 앞까지 데려다준 혜미와 손을 맞잡아 흔들며 헤어지고 나서야 서늘한 추위와 함께 두려움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주머니 속 반지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행여나 잃어버릴까 주머니 밖에서 반지가 흔들리지 않게 꼭 쥐고 집까지 내달렸다. 어쩌자고 이걸 훔쳤을까. 금은방에 팔아 돈으로 만들 수도 없는 나이인데. 엄마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디서 났는지 설명할 수도 없는데. 혜미네 집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라면 어떡하나. 나는 열한 살의 나이에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 어둠이 내려앉은 야트막한 언덕길을 악마가 따라오는 것만 같은 두려움을 안고 나는 울 듯이 달렸다. 


그날 밤, 잘 준비를 하고 눕기 전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손바닥을 오므려 최대한 가리고 다시 한번 살펴봤다. 내 엄지손가락에도 헐렁할 정도로 컸다. 손으로 가린 어둠 속에서도 빨간 보석은 반짝반짝했다. 오밀조밀한 장식이 가득한 반지는 손가락에 닿는 안쪽 면이 많이 까져 검은색 속이 드러났다. 오래된 반지인 것 같았다. 뒤늦게 이게 혜미네 엄마 아빠 결혼반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적으로 반지를 주머니에 넣었을 때에는 이보다 더 굉장한 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었는데,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다. 온몸을 감싼 죄책감에 눈물을 겨우겨우 삼키며 내일 혜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반지를 돌려주거나 혜미네 집에 다시 놀러 가 몰래 있던 곳에 돌려놓자고 다짐했다.


다음 날 만난 혜미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여전히 깔끔하게 묶인 갈색 곱슬머리로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심지어 어제 엄마에게 친구가 놀러 와서 라면 끓여줬다는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왔는데 엄마가 일하느라 챙겨주지도 못했다고 언제 다시 한번 데리고 오라고 초대를 하셨다고 했다. 내심 엄마의 결혼반지가 없어진 걸로 혜미가 어두운 표정으로 학교에 올까 봐 걱정했는데 아직 반지가 없어진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조마조마한 하루를 더 벌었다.


그 다음날에도 혜미는 똑같았다. 아니, 똑같은 건 아니고 오래간만에 집에 오신 아빠가 사줬다는 예쁜 핀을 꽂고 왔다. 머리를 묶지 않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엉덩이가 빵빵한 귀여운 노란 벌이 달린 핀은 혜미의 갈색 머리에 찰떡처럼 어울렸다. 혜미는 내가 예쁘다고 칭찬하자 “네가 훨씬 더 예쁜 핀이 많잖아.”라며 얼굴을 붉혔다.


며칠이 지나도록 반지가 없어진 게 사건이 되지 않자 나는 죄책감이 수그러들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반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이때 들었다. 반지 안쪽이 까져서 검게 드러난 걸 보면 내 생각처럼 금이 아닐지도. 톡톡 두드렸을 때 속이 빈 것 같은 소리가 난 걸 봐서는 가짜일지도. 어쩌면, 내가 반지를 몰래 없애버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될 수도 있었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내내 어떻게 반지를 없앨지만 궁리했다. 왜인지 혜미가 아빠에게 받은 예쁜 핀을 꽂은 걸 본 다음부터는 사실대로 말하고 반지를 돌려주어야겠다는 선택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하굣길에 나는 굉장히 태연했다. 아무렇지 않게 반지를 쑥 주머니에 넣었던 그 순간처럼 엄청난 일을 담대하게 해내는 기분이었다. 혜미와 시장 앞에서 헤어지고 우리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도 뛰거나 경망스럽게 실내화 가방을 차지 않았다. 그냥 한 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지를 쥔 채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렇게 집을 지나쳐 언덕 꼭대기 철조망 앞에 섰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괜히 책가방에서 뭘 꺼내는 척했다. 아무도 없는걸 확인하고 나서 주머니 속 반지를 꺼내 구부러져 낮아진 철조망 위로 휙 하고 던졌다. 붉은 흙더미 저 멀리에 반지는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나는 사냥을 마친 매처럼 벽돌더미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넘어가는 해를 구경했다. 길게 저무는 해가 붉은 언덕에 가득 차자 어느 순간 반짝하고 내던진 반지의 빨간 보석이 빛났다. 내일 여기 온다면 반지가 어디쯤에 떨어졌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 반짝이는 반지에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고 해가 다 넘어가도록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듬해 우리 집은 그 언덕을 떠났다. 새 집에는 거실이 있었다. 소파를 놓을 정도의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안방을 차지하던 TV가 드디어 거실 창 아래 번듯하게 자리할 수 있었다. 살던 집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화장실에는 무려 샤워기가 있었다. 나는 팔짝팔짝 뛰며 환호했지만 세탁기 쪽에 물 튀게 하지 말라는 엄마의 엄포로 한 번도 내가 그리던 모습처럼 서서 샤워하지는 못했다. 전 집에서 쓰던 자그마한 플라스틱 의자를 구석에 놓고 앉아서 샤워했다. 새 집이 있는 곳도 언덕이었다. 하지만 이 언덕길에는 아무도 대문 앞에 평상을 내놓지 않았다. 집집마다 담을 넘어 자란 커다란 나무들이 푸릇푸릇했고 흙먼지도 날리지 않는 깨끗한 길이었다. 이곳에서 8년을 더 보내고 마침내 평지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던 날의 감격스러운 마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동생과 함께 방을 쓰던 인고의 시간을 거쳐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고 이때 비로소 침대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10년이 흐르기 전에 나는 얼추 일기장에 적었던 소망대로 살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적었던 크고 작은 희망사항들은 그렇게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아예 가망이 없어지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고 억지로 지우기도 했다. 운전을 하는 남편은 조수석에 앉아 멈출 줄 모르고 길어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혜미네 반지를 훔친 부분에서는 ‘헉’하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새로 지은 대형 쇼핑몰에 가자 길을 나섰고 핸드폰은 이곳저곳의 교통상황을 알아서 파악하더니 이 동네를 통과하는 길로 안내했다. 나는 출발하면서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 그냥 그렇다는 거야.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 동네를 지나니까 그게 또 갑자기 확 기억이 밀려오네.

- ‘살인의 추억’이 아니라 ‘절도의 추억’인 거야?

- 그렇지, 그런 거지. 범인은 항상 현장에 돌아오는 거지.


낯설어진 창밖의 풍경에 나는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켜 놓고 서둘러 창문을 내려 화면과 밖을 번갈아 봤다. 내가 기억하는 형태의 길과 집들은 온데간데없다. 소연이네도 효주네도 예진이네 학원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산의 대부분은 꼭대기 부분만 간신히 산이었겠거니 싶은 형태로 남겨두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파트 단지로 채워졌다.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서니 그곳이 그렇게 비탈진 언덕길이었다는 것도 까마득했다. 저어쪽 어디쯤이었을 텐데, 우리 집이 있던 그 언덕이.


- 와. 내가 살던 4동은 아예 없어졌어. 그냥 3동으로 통합됐나 봐.

- 그래?

- 응. 지도 보니깐 그러네. 저기쯤인가 봐도 잘 모르겠다. 언덕이고 뭐고 아파트 때문에.


허탈한 마음과 함께 알 수 없는 약간의 안도감도 있었다. 아마 붉은 흙더미에 내던져진 반지는 그대로 거대한 아파트 밑 어딘가에 영원히 묻혀버렸을 것이다. 이 아파트를 지은 사람들은 산 어딘가에 매를 닮은 바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 바위도 반지처럼 아무렇지 않게 묻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도 앱을 끄고 시선도 거두었다. 남편은 작게 웃었다.


- 이로써 완전범죄가 완성됐구만?

- 그러게. 완전히 묻혔지. 공소시효도 지났어. 나는 자유의 몸이야.


가난한 내 마음도 아파트 밑 붉은 흙에 단단히 묻혀있길 바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매연 냄새를 실컷 맡았다. 산을 깜깜하게 집어삼킨 아파트 단지가 내 곁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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