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부꾸미 Feb 21. 2020

그립지 못한 계절





더위는 혼자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옛날을 떠올려보아도 이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의 여름은 더위보다는 함께 오는 습기가 더 문제였다. 진숙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낡은 시외버스를 타고 몇 십 분은 더 들어가야 했던 경기도였다. 띄엄띄엄 집들이 자리한 작은 동네는 여름에 해를 피할 우거진 나무그늘도 변변치 않을 만큼 황량했지만 그곳에서의 여름은 그래도 겨울나기보다는 덜 혹독했다. 결혼과 함께 서울에서도 집값이 낮아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없는 신혼살림을 차려볼까 하는 이들이 빽빽하게 모인다는 동네에 자리 잡았을 때에도 지금처럼 여름이 습하고 텁텁하진 않았다. 진숙은 에어컨 바람을 쐬면 머리가 아팠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도 냉기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양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진동과 소음이 선풍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3명 정도 누울 공간이 남은 자그마한 방에서 한쪽 벽에 매달린 누렇게 변색된 작은 에어컨을 켜면 사이즈가 맞지 않는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렸다.


남편이 이 방에서 4년 남짓 되는 투병생활을 버텨내는 동안의 여름에는 머리 위의 낡은 에어컨이 꺼질 줄을 몰랐다. 심지어 여름뿐만 아니라 더워지기 시작하는 늦봄, 열기가 채 식지 못한 초가을에도 에어컨은 밤낮으로 웅웅거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북서쪽의 야트막한 산을 향해 정직하게 돌아앉은 이 집은, 앞뒤로 비슷한 사이즈의 다세대 주택이 꼼꼼하게 가로막고 있어 곰팡이에 취약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었던 남편은 눅눅하게 가라앉은 매트리스에 깔아둔 빨간 담요 위에서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진숙의 손길에 의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이 전부였다. 곰팡이도 습한 환경도 환자에게 좋을 리 없어 진숙은 자주 이불을 잘 마른 것으로 바꿔주고 쉼 없이 에어컨을 돌려 서늘한 보송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축축한 늦여름, 오랜 시간 껍데기만 남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던 남편이 떠나며 동시에 할 일을 다 한 에어컨은 힘겨운 작동을 멈췄다.


진숙은 자잘한 물집이 빼곡하게 잡힌 손등에 연고를 바르며 무기력하게 돌아가는 뿌연 날개의 선풍기를 쳐다보았다. 이 선풍기는 남편의 짐을 정리하면서 서랍장 위에 김장 비닐로 싸서 잘 보관해 두었던 것을 꺼낸 것으로 회전 버튼을 누르면 오른쪽으로 최대한 돌았을 때 ‘끼긱’ 거리는 소음과 함께 딸꾹질을 하듯 잠시 멈칫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원래도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진숙도 선풍기가 끼긱 거릴 때마다 한 번씩 멈칫하며 눈길을 주는 버릇이 생겼다. 그럼에도 딱히 수리를 맡기러 간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밥그릇 하나에 접시 하나, 물을 마시고 연이어 맥심 커피 두 봉지를 타 마신 컵 하나. 단출한 설거지를 휘리릭 끝내 엎어두고 말리지 않은 머리 덕에 뒷부분이 축축해진 옷을 갈아입었다. 선풍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두어 번 머리를 흔들며 털었다. 아직 남아있던 물기가 여기저기 얼룩진 바닥에 흩뿌렸다.








“어머님. 다음 주부터는 지호 안 봐주셔도 될 것 같아요.”

며느리는 쭈그리고 앉아 수십 마리 공룡들을 바구니에 정리하던 명화의 등에 조심스러운 한 마디를 던졌다. 명화는 갑작스러운 말에 목이 긴 초식공룡 하나를 손에 쥔 채 며느리를 돌아보았다.


내년이면 지호도 학교에 가고요. 그전까지는 아파트에 하원 도우미 해주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께 부탁드리려고 해요. 근처 같은 나이 아이들 몇 명 모여서 입학 전에 공부 겸 놀이 겸 영어랑 이것저것 배우게 할 생각이라서요. 지금 어머님 왔다 갔다 하면서 쓰시는 방을 아예 지호 공부방으로 꾸미는 게 어떻겠느냐고 애비가 그러기도 하고요. 어차피 학교 가면 공부할 환경이 제대로 조성이 되는 게 좋으니까요. 지호 요새 떼도 많이 늘고 그래서 학교 들어가기 전에 좀 다잡을 필요도 있고요. 간식이랑 지호 먹는 거 많이 챙겨주시고 하지만 요새는 소아 비만도 문제가 되고 그러니까 약간 조절할 필요도 있을 것 같고요. 뭐 무엇보다도 지호가 너무 어머님께 의존적이라 저희 둘 훈육이 잘 통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게 좀 걱정이기도 해서요.


명화는 다소곳하게 긴 말을 늘어놓는 며느리의 어딘지 수척해진 말간 얼굴을 빤히 아래로 그리고 위로 바라보았다. 처음 아들놈이 저와 나이 차이도 꽤 나는 이 예쁘장한 아이를 데려왔을 때가 떠올랐다. 지 애비 성격을 똑 닮은 아들놈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가씨 하나를 제대로 꼬드긴 건가 싶어 걱정이 앞섰었다. 더군다나 귀한 외동딸이라는데. 내가 아는 아들놈 성격이라면 음식물 쓰레기 갖다 버리는 데에도 입부터 내밀게 분명한데. 시키는 걸 안 한 적은 없어도 게으른 데가 있어 한 번을 웃는 표정으로 움직인 적이 없는 놈인데. 말수도 적고 무뚝뚝해 제 곁의 사람을 외롭게 만들 그런 놈인데. 내가 알던 그런 아들놈은 의외로 부드럽고 편한 얼굴로 얌전한 이 아이를 소개하고 확신이 느껴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결혼 준비는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엄마, 라며 명화의 불안한 표정을 다독였었다.


또 하나 의외였던 것은 여린 꽃잎처럼 바스라질 것 같아 오로지 걱정뿐이었던 며느리가 생각보다 덤덤히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결혼하고 정확히 일 년 만에 지호를 낳았다. 집안의 첫 손주고 어린 며느리의 출산이라 동동거리며 수선을 떨었던 건 명화뿐이었다. 며느리는 침착하게 아기 물건들을 준비하고, 큰 탈 없이 임신 과정을 조용하게 보냈으며, 출산 때에도 공부한 범위의 시험을 착실하게 풀어내는 수험생처럼 의연했다. 둘의 육아가 걱정스러워 아기를 봐 주겠다 나서면서도 한편으로는 친정 엄마도 아닌 시어머니가 이런 일을 자청하는 게 며느리에게 부담이려나 싶어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라고 했지만 며느리는 그 제안도 덥석 고맙게 받아들였다. 저희 엄마는 아기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타입이에요 하면서. 지호를 돌보겠다고 자청한 마음의 반 정도는 게으른 아들을 길러낸 죄책감이 자리했다. 나중에 장가보낼 걸 생각해 이것저것 시켜보려 했지만 인상 찌푸리고 굼뜨게 시작하는 게 꼴 보기 싫어 명화의 몸이 먼저 움직였던 적이 아무래도 많았다. 그게 미안해 손을 거들어주고 싶었다.


얼마 전부터 지호는 유난히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선 어디서 자전거나 자동차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항상 할머니 손잡고 다니자는 말도 어디론가 내팽개쳤다. 그러다가도 고집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 약한 할머니부터 찾았다. 그것 때문에 명화도 아들 내외의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다. 저희들이 생각한 훈육방식이 있을 텐데 명화와는 그런 부분까지 완벽하게 공유되기는 어려웠다.

그래, 그러는 게 낫겠지. 며느리의 긴 말에 비해 너무도 간결한 대답만을 마른 입술로 뱉어내고 명화는 목이 긴 공룡도 바구니에 넣었다.










쇼핑몰은 냉장고 문을 연 것 같은 한기로 가득했다. 익숙해지지 않는 매정한 차가움이었다. 진숙은 입고 온 반팔티를 벗지 않고 그 위에 그대로 반팔 작업복을 겹쳐 입었다. 이 층의 화장실은 모두 진숙의 담당이었다. 진숙은 휴지통을 비워 쓰레기를 한데 모으고 바닥을 대걸레질하고 변기나 세면대, 거울, 핸드드라이어를 각각의 걸레로 닦았다. 다음 화장실에서도, 그다음 화장실에서도 이 작업을 하고 처음의 화장실로 돌아와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그래도 오늘 같은 평일 오후에는 비교적 여유 있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진숙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 그녀만의 의식처럼 으레 진통제 두 알을 삼키곤 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약으로 눌러두지 않으면 일하는 동안 종일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인상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진숙은 젊었을 때 눈웃음이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목구비가 잔잔하여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잘 웃고 또 예쁘게 웃는 법을 알았다. 여고시절 단짝이었던 명화와 다닐 때에는 각시탈과 토끼이빨로 불렸다. 아마도 잘 웃지 않게 된 것은 남편의 투병 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30대, 40대, 50대, 그리고 갓 60이 된 지금까지 모든 게 수월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진숙은 엄지손톱만 푹 찔러 넣어도 귤이 신지 단지 감이 오는 영민한 여자였는데 끝까지 살아보지 않아도 모를 리 없었다, 제 인생이 쓴지 단지. 그래서 웃을 일이 적어졌다. 적어지다 못해 언젠가부터는 미간에 보기 싫은 세로 주름이 굵게 두 줄 패였다. 명화는 제 아들놈 친구 누나가 피부과 의사인데 보톡스 같은 걸 맞으면 주름이 펴진다 더라며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정작 사막처럼 버석거리는 명화의 얼굴도 봐줄 만한 처지는 아니었고 심지어 소개받아 왔다기에 관계를 설명하기도 힘든 그 피부과가 이 넓은 서울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몰랐다.


빈 파우더룸의 거울을 닦을 때마다 진숙은 집에서는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던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여자 화장실에 끄트머리에 딸린 파우더룸 조명은 세면대 위에 달린 조명과 달라 얼굴에 금빛이 내려앉는 것처럼 세련됐다. 이곳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은 진숙의 맨얼굴도 뭐라도 바른 양 부드럽게 반짝였다. 자꾸만 시선이 향하던 미간의 주름도 훨씬 옅게 보였다. 진숙은 마른 걸레를 쥐고 얼굴을 양옆으로 위아래로 천천히 돌리며 모르는 게 많아 각시탈같이 곱게 웃었던 시절을 곰곰이 찾았다.


파우더룸 선반 구석에 누군가 깜빡 잊고 두고 간 빨간 립스틱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립스틱이 아니라 요즘 아가씨들이 많이 바른다는 틴트다. 색이름이 ‘레드정주행’이다. 무슨 색이름이 이런 식인가. 정주행은 뭐야 대체. 이따가 고객센터에 가져다줘야겠다 싶어 작업복 주머니에 챙겨두었다. 생각보다 파우더룸에 서서 화장을 고치고 깜빡 빠뜨리고 가는 것들이 많다. 물론 그것보다는 쓰고 나서 옆의 휴지통에 제대로 버리지 않은 티슈, 기름종이, 더러워진 면봉 같은 것이 훨씬 많지만. 진숙은 손에 든 마른 걸레로 선반 위도 한 번 쓱 야무지게 훑고는 다시 주머니에 든 틴트를 꺼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다시 살펴봤다. 투명한 통에 담긴 빠알간 액체는 잉크처럼 묽다. 남은 양이 많지는 않은 것이 왠지 다시 찾으러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꼬질한 뚜껑을 돌려 열어보니 끄트머리에 달린 자그마한 스펀지에 레드정주행이 푹 묻어 나온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옮겨 묻혀본다. 피라도 난 것처럼 선명한 빨간색이 닿은 손가락은 노란 불빛 아래에서도 평소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까무잡잡하던 명화의 피부에 비해 진숙은 원래 이렇게 하얀 편이었다. 그것도 잊고 있었나 보다. 겨우 떠오르는 걸 보면.


진숙은 네 번째 손가락에 묻은 빨간 액체를 꺼슬한 아랫입술에 살살 문질러 발랐다. 남은 양으로는 윗입술에도 톡톡 두들겼다. 희미해진 입술산과 내려앉은 입꼬리 부분에도 둔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꼼꼼하게 두드려주고 나니 거울 안에 젊은 시절의 진숙이 언뜻 보였다. 거짓말이다. 그 어느 때에도 진숙은 이렇게 과감한 빨간색은 바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상할 수 있었다. 앵두처럼 빨간 입술로 세상을 향해 예쁜 웃음을 짓는 20대의 자신을. 소박하지만 진숙이 좋아하는 흰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건강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30대의 자신을.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책을 읽으며 하교할 아이들을 기다리는 40대의 자신을. 남편의 손을 꼭 잡고 해 질 무렵 잔잔한 바다 곁을 산책하는 50대의 자신을.


“혹시 여기서 틴트 굴러다니는 거 못 보셨어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투른 화장에 반짝이는 귀걸이로 고등학생임을 감춘 여자아이 둘이 동그랗게 말린 앞머리를 매만지며 파우더룸에 들어왔다. 요상한 색의 렌즈로 눈동자를 덮어놔도 이 아이들은 맑았다. 진숙은 바쁘게 웃으며 들고 있던 틴트를 내밀었다. 빨갛게 물든 왼쪽 손가락은 엉덩이 뒤로 감추고, 아이와 같은 색의 입술은 애써 힘을 주어 안으로 말아 넣으면서.











며느리는 현관까지 명화를 배웅하며 쇼핑백 하나와 흰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다. 어머님 집에서 입으실 편한 원피스 하나 샀어요. 내일 생신이시니까 이것도 같이 받으세요. 더 챙겨드렸어야 하는데.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요. 주말에 같이 식사해요 어머님. 그리고 지호가 할머니 생일이라고 만든 건데 집에 가서 보세요. 쇼핑백에 같이 넣었어요. 명화는 그래 더 챙겨갈 짐은 차차 조금씩 가져가마 하고 앙상한 며느리 팔뚝을 잡아 집 안으로 떠밀어 들여보냈다.


명화의 집은 아들네에서 버스로 40분을 가야 하는 서울 북서쪽 끝자락이었다. 이곳에서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들어가면 예전에 진숙과 이웃했던 동네까지 갈 수 있었다. 진숙은 결혼하며 연고도 없는 서울 맨 아랫동네에 터를 잡았지만, 명화는 무슨 일인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남자와 결혼해 이곳에 정착해 버렸다. 결혼하고 이사는 딱 한 번 했다. 그것도 같은 동네였다. 거실이랄 것도 없는 다세대 주택에 살다가 남편의 복사기, 프린터 대리점이 상승세를 타며 번듯하게 새로 지어진 네 동짜리 빌라로 옮겼다. 짙고 울퉁불퉁한 회색 벽돌로 지어진 이 빌라는 당시에는 근방 어디를 찾아봐도 이런 고급스러움이 없었다. 빌라 사이에 위치한 널찍한 공용 마당은 볕이 따뜻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았고, 건물 바로 앞에 한 걸음 정도 폭으로 자리 잡은 텃밭은 입주민들이 가꾸는 작은 채소며 꽃이 빼곡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의 마당은 빌라 뒤편의 주차장이 모자라 어거지로 흰 금을 긋고 세워둔 차들로 꽉 차버렸고 텃밭에는 말라죽어 처리하기가 마땅치 않아 내어둔 칙칙한 화분들이 들쭉날쭉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명화는 현관 센서등조차 고장 나버린 낡고 어두운 빌라로 부은 다리를 옮겼다.


거실 불이 꺼진 채로 밤이 되는 것도 모른 채 바닥에서 잠이 들었던 남편은 괴고 있던 팔에서 머리만 겨우 일으키며 “왔어?”하는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넨다. 어둑한 거실에 소리가 들릴락 말락 낮춰진 TV가 번쩍이고 약풍에 다이얼이 맞춰진 선풍기가 TV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식탁 위엔 아마도 점심 겸 저녁이었을, 라면을 끓인 냄비를 받친 자국이 남은 신문이 남편이 앉았을 자리 앞에 고스란히 놓여있다.


여기 지호를 돌보겠다고 자청한 마음의 또 다른 반을 차지하는 광경이 있었다. 남편은 남들보다 약간 이른 은퇴를 결정했다. 단독으로. 꾸리던 대리점이 하락세이긴 했지만 너도나도 어려운 시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덜 쓰는 게 모으는 것이라던 남편은 수입이 없어도 죽을 날까지 더 덜 쓰면 어찌 어찌 된다는 계산이 나왔던지 아들의 결혼이 끝나기 무섭게 일을 접었다. 초반에는 가끔 하던 낚시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다. 며칠씩 집을 비우거나 늦은 시간 돌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남편은 거실이 편하다며 소파를 치우고 아들 방에 있던 싱글 침대를 기어코 거실로 끌고 나왔다. 잡은 물고기는 냉장고에 던져두고 씻지도 않은 몸을 거실 침대에 모로 눕혀 TV를 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나마 낚시를 할 때에는 나았다. 평생 취미라 이름 붙일 만한 걸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저 버릇처럼 남은 것은 거실 한 켠에 답답하게 뻗어있는 삐걱대는 아들 침대에 누워 밤이고 낮이고 TV 채널만 돌리는 것이다. 겨울에는 전기요를 침대 위에 깔고 누웠고 여름에는 덮는 홑이불만 끌고 내려와 침대 앞바닥에 누웠다. 삼시 세끼를 사육사처럼 챙겨먹이던 명화는 이러다 내가 속병이 나지 싶어 아들네 집으로 피신해 지호를 돌보는 데 몰두하기로 했다. 남편은 만족도 불만족도 느낄 줄 모르는 로봇처럼 몇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생활에도 어떠한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명화는 냉장고에 있던 반쯤 남은 막걸리 병과 유리컵을 챙겨 쇼핑백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남편의 TV소리가 커진 걸 보니 본격 잠이 깬 모양이다. 바지만 시원한 잠옷 바지로 갈아입고 바닥에 앉아 침대 모서리에 기댔다. 쓰러진 쇼핑백에서 잔잔한 꽃무늬의 연둣빛 원피스가 기어 나왔다. 아마도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명화의 말을 며느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봉투는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두툼하고 묵직했다. 일일이 세어볼까 하다가 관두고 봉투 째 앉은뱅이 화장대 서랍에 넣어버렸다. 지호가 만들었다는 할머니 생일선물은 왕관이었다. 길게 오린 스케치북을 딱풀로 이어 붙여 만든 종이 왕관은 금색의 크레파스로 빈 곳 없이 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 군데군데 크레파스 찌꺼기가 뭉쳐있었다. 빨갛고 파란 색종이를 손톱만 하게 잘라 보석처럼 띄엄띄엄 붙여 놨다. 연필로 뚜렷하게 스케치한 큰 별 모양은 연필선과는 관계없는 모양으로 오려져 중앙의 뾰족한 부분 끝에 축 처지게 붙어 있었다. 왕관 안쪽에는 별을 그렸을 연필로 상형문자 같은 메시지를 적어두었다.


할 머니생신 축

하드러요

건강 하새요

사랑 해 요지호가


명화는 잔에 남은 막걸리를 탈탈 따랐다. 걸쭉하게 내려앉은 한 모금을 들이켜기가 무섭게 며느리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지호였다. 핸드폰 화면 한가득 얼굴을 들이민 지호는 할머니 내 선물 봤어? 머리에 썼어? 내 편지 읽었어? 왜 나 오기 전에 갔어? 의문문만 쏟아냈다. 명화는 옆에 둔 납작한 왕관을 둥글게 펴 머리에 썼다. 무거운 종이 별 장식이 자꾸만 이마 쪽으로 인사하듯 수그러졌다. 한 손으로 별을 세워 잡고 명화는 지호야 고마워 너어무 고마워 할머니가 내일 갈게 일찍 자. 너무 늦었어. 엄마 괴롭히지 말고 일찍 자. 하고 몇 달 못 본 사이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차가운 막걸리 잔을 둔 바닥이 흥건해졌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이다. 명화는 바짓단으로 슥 물을 훔치고 몇 모금 더 들이켰다. 밤 10시가 훌쩍 넘어갔다. 아마 진숙도 퇴근했을 시간이다. 명화는 진숙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아직 퇴근을 안 했나, 어디 걸어가는 중인가 싶어 핸드폰을 내리려는 찰나 신호음이 끊기고 진숙의 얼굴이 화면 가득 떴다. 무슨 일인지 처음 보는 세상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아이고 뭘 칠한 거야 입술에? 아이고 남사스러워서. 아하하하하하하하.”

소리 높여 웃는 명화에게 진숙도 목소리를 크게 냈다.

“뭘 뒤집어썼냐 너는? 왕관이야 왕관? 생일이라고 여왕하는 거야? 아하하하하하하하.”

“아니, 뭔 꼴이냐고? 어디 좋은 데 가는 거야 이 밤에? 하하하하하하.”

“너야말로 그 꼴로 혼자 술 마시냐? 체통 머리 없이? 참나, 하하하하하하하하.”


둘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여고 시절처럼 숨이 넘어가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 웃다 보면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던 그때처럼. 여름 날 땀에 젖은 교복을 입고 황량한 시골길을 점잖지 못하게 내달리던 각시탈과 토끼이빨처럼. 하이고,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네 라면서 진짠지 가짠지도 모를 눈물을 손끝으로 연신 찍어내 가며 그렇게 웃었다.











작가의 이전글 장미의 별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