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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Feb 10. 2020

장미의 별명




휴우. 장미는 반 년 동안 우현의 메인 타깃이었다.


우현은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맑지만 톤이 높지 않고 적당해서 한 번 말하면 금세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망할 성장기를 겪느라 완성되지 못한 중구난방 비율을 가진 것에 비해 그녀는 팔다리가 길쭉하고 얼굴도 작았다. 사춘기 여드름도 피해 간 피부는 매끄럽고 까무잡잡했으며, 화려하진 않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꽤나 청초했다. 턱 선에서 정확히 끝나는 단발머리는 애써 드라이로 끝을 말지 않아도 항상 안쪽을 향해 단정히 오므라져 있었다.


성적은 반에서 딱 중간, 때때로 그보다 약간 아래. 그럼에도 그녀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갈 때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체육대회 때였다.


우현은 항상 스타트가 느렸다. ‘땅’ 소리가 나자마자 엉덩이라도 얻어맞은 듯 튀어나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녀는 소리를 다 듣고 나서 ‘아, 이제 달려볼까?’하는 느낌으로 여유를 부리며 달려 나갔다. 긴 팔과 다리를 깔끔하게 흔들면 어느 순간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 앞서가던 모든 아이들을 제쳐버렸다. 응원하던 아이들은 목이 쉬어라 열광했다. 모두들 광분해서 시합에 나간 우현보다 얼굴이 더 빨갰다. 장미처럼 100미터를 23초에 달리는 타고난 나무늘보들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남자아이들과 달리기를 해도 진 적이 없었다고. 이마 주변의 머리가 땀에 젖어 진한 색으로 반짝이고 피곤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며 우현이 돌아오면 반 아이들은 영웅을 맞듯 경외심으로 그녀를 맞았다. 우현이 있는 반이 그 해 체육대회 우승이었다. 중학교 3년 동안 한 번도 아닌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수업 시간 동안 신생아 수면시간을 채우는 그녀를 곱게 볼 리 없는 선생님들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우현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어린애처럼 해맑고 시원시원한 그녀는 장난기가 많았고, 주도적으로 재미있는 상황을 잘 만들었으며, 카리스마가 있었다. 우현의 말 한마디에 아이들은 반에서 메이저 그룹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마이너 그룹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우현에게 타깃이 된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었다. 장미는 운이 나빴다. 3학년 봄 소풍 가던 버스에서 뒷주머니에 작은 초콜릿 하나를 넣어둔 것을 잊은 채 앉아있다 내린 장미는 그 이후로 우현에게 똥장미라 불렸다. 녹아서 배어 나온 초콜릿의 위치가 좋지 않았다. 초등학생도 안 지을 법한 유치한 별명이었지만 아이들은 배를 쥐고 나자빠지며 웃었다. 소풍 내내 입고 있던 겉옷을 허리에 둘러 바지 뒷부분을 가리고 있어도 장미와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포복절도했다.


우현에게 딱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모두가 웃는 상황을 좋아했다. 학교로 돌아온 이후에도 장미 곁을 지날 때마다 킁킁거리며 “아니 왜 장미인데 똥 냄새가 나. 진짜 이상하네.”라며 별명 굳히기를 하는 바람에 멀쩡했던 장미를 순식간에 온 반의 놀림거리로 만들어버렸다.


학년이 바뀌고 절친을 만들기도 전에 무방비로 당한 일이라 장미는 속수무책이었다. 아이들은 친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똥장미’라고 한 번 부르고 싶어 장미 곁에 다가왔다. 분한 일이었지만 딱히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사실 아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우현에게는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모두가 알지만 입 밖에 낼 수 없는 굉장한 놀림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믿기지 않을 만큼 혀가 짧다는 것이었다. 그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재밌는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 무슨 얘긴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혀가 짧아 미묘한 텀을 두고 아이들끼리 잠시 눈짓을 주고받은 후에 웃음이 터지곤 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에 서로의 약점을 건드리는 것은 못할 짓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아무도 우현이 혀가 짧다는 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심지어 체육대회 영웅이자 반의 분위기 메이커인데 누가 그녀를 놀리는 모험을 하겠는가. 장미도 그래서 입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슬픈 몇 개월이 흘러갔다. 큰 반격 없이 무기력하게 참아내는 장미가 재미 없어진 우현은 몇몇의 작은 타깃도 함께 만들었다. 그 유치한 별명이 잠잠해지나 싶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우현은 잊지 않고 반드시 깨야 하는 퀘스트처럼 장미의 속을 한 번씩 뒤집었다. 일차원적이고 더러운 장미의 별명은 가끔씩만 불러도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다. 처음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던 탓이다.


여름방학이 지나는 동안 장미는 나름의 심기일전을 했다. 일단 학교에 가지 않으니 언제 그 끔찍한 별명으로 불릴지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한 학기만 지나고 나면 고등학교로 다들 갈릴 텐데 이제 와서 절친을 만들겠다고 애틋함을 부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개학하면 남은 시간 동안 마냥 참고만 있진 않을 것이라 몇 번을 다짐했다. 딱 세 번만 더 참자. 그다음에는 자비란 없다.


맑아진 기분으로 맞이한 개학 날,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니 서너 명의 아이들과 떠들고 있던 우현은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큰 소리로 장미를 맞았다. “아이고! 똥장미! 어쩐지 어디서 스멀스멀 냄새가 다가온다 했어!”

한 번.


2학기 첫 조회를 하며 담임선생님이 반장선거 전에 후보로 추천하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생각들 해보라고 했다. 우현은 손도 들지 않고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선생님, 똥장미 시켜요! 공부 되게 잘하잖아요!”

두 번.


며칠 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은 1학기부터의 상습 지각생 몇 명을 언급하며 한 번만 더 지각하면 화장실 청소를 시키겠다고 했다. 우현이 또 놓치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 나는 화장실 청소는 똥장미 담당인 줄 알았는데?”

세 번.


반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피식했다. 됐다. 자비는 여기까지다.

장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웃음소리를 뚫을만한 큰 소리로 말했다.


“응? 뭐라고? 에데데 에데데거리면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줘. 나도 같이 웃게.”


웃음이 멈췄고 교실은 급속도로 식었다. 일부는 놀란 표정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선생님은 ‘자, 자. 시끄럽다.’라며 종례를 어영부영 마무리하고 경례를 시킨 후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서로 눈치만 봤다. 장미는 아예 우현 쪽으로 돌아앉은 채 싸울 기세로 더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잔뜩 화난 표정으로 장미를 노려보다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또르르 뺨 위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책가방을 낚아채 교실 밖으로 쿵쾅거리며 사라졌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장미가 ‘똥장미’로 불리는 일은 없었다. 우현은 장미와 눈을 별로 마주치지 않았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목을 끌며 반 전체를 웃기는 일도 없었다. 우현은 눈에 띄게 얌전해졌고, 수업 시간에도 책을 펴고 깨어 있으려 애썼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설전이 있었다. 똥장미처럼 우현이 지어낸 유쾌하지 않은 별명으로 웃음거리가 되어 속앓이를 하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조심스레 장미 편을 들었고, 아무리 그래도 인신공격은 좀 아니지 않냐며 정색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잃을 게 없어 당당해진 장미에 비해 우현은 티가 날 정도로 확 숫기가 줄어들어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은 더 이상 우현에 동조하지 않았다. 다행히 장미는 나머지 학기는 비교적 평온하게 보내고 고등학교에 올라갈 수 있었다.


우현의 타깃이 되었던 그 반년을 제외하고는 장미에게 그런 근본 없는 별명이 붙은 적은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 일도 자연스럽게 잊힐 줄 알았으나 의외로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똥장미!’하고 부르던 우현의 해맑은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마도 그 기억이 진하게 남은 것은 쪽팔림도 쪽팔림이었지만, 우현에게 깊은 악의가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 게 더 깊고 힘들게 남았다.


성인이 되고 오지랖 넓은 누군가의 활약으로 반창회가 열렸다. 고등학교 동창도 모이기 힘든 마당에 중 3 때의 아이들을 모으다니 대단한 열정이라고 장미는 생각했다. 어른으로 변해버린 얼굴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추억에 대한 기대 덕분인지 예상보다 사람이 꽤 모였다. 장미는 우현과 화해하고 싶었다. 네 장난이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으로 대신해버려서 미안하다고.


띄엄띄엄 반가운 얼굴들이 등장할 때마다 장미는 목을 빼고 우현인가 했지만 술자리가 한 시간을 지나가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반창회를 주최한 친구에게 물었다. 우현이는 안 오냐고.

“걔? 연락처를 아예 못 찾겠던데? 같은 고등학교 간 애들도 졸업 이후에는 소식 모른다고 하더라고. 어느 대학을 간 건지, 가긴 간 건지도 모르고.”

친구는 술기운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주변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누구 말하는 거야?

우현이?

아, 연락 안 된대?

누구라고?

정우현! 그 왜 달리기 잘했던 애 있잖아.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장미의 귀에 날카롭게 와 꽂혔다.


“걔 있잖아. 혀 엄청 짧은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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