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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정신 잃고 하사불성




 살면서 겪은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이었을까. 유치원을 다니던 꼬맹이 시절 딸기 농장 근처에서 1박을 하고 오는 현장학습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곤히 잠들어버린 아이들 틈에서 난생 처음 엄마아빠 없이 잔다는 게 무서워 소리 없이 찔끔찔끔 울었던 기억이 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기분은 공포보다는 서러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스트레스가 많던 고3 때 몸이 아파 조퇴하고 약기운에 쓰러져 자다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다. 벽 쪽에 바싹 등을 대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는데 분명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벽과 나 사이 틈에 누군가 앉아있었고, 내 등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때의 기분도 돌이켜 생각하면 공포보다는 처음 눌리는 가위에 신기함이 더 컸다.


 최고로 꼽을만한 공포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건 도전 정신이 턱없이 부족한 성격 탓에 경험하지 못한 일에는 무조건 소소한 두려움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매트 위에서 하는 앞구르기가 그랬고, 바닷물에 머리까지 푹 잠기는 게 그랬고, 운전면허시험의 도로 주행이 그랬다. 이런 자잘한 공포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말하자면 이미 장편 소설이 하나 나왔다.


 호기롭게 수술 날짜를 받아들고 처음 했던 생각은 ‘드디어’였다. 드디어 치료를 받는구나.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벗어나는구나. 안타깝게도 수술까지의 대기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드디어’로부터 출발했던 잔잔한 내 감정은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몇 개의 험준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며 널뛰기를 해댔다.


 어느 날은 과연 이 수술로 해결이 되긴 하는 걸까, 비관주의자가 되어 아무도 떠밀지 않은 절망의 늪에 발장구를 쳤다. 또 어느 날은 그래 이보다 더 큰 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이겨내잖아, 내 수술은 손끝에 박힌 가시 빼내는 수준이지 하며 억지로 기분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급기야 공포에 대한 일종의 회피 증상의 일환으로 아주 이상한 데에 꽂히기 시작했다 자궁 내막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그게 병증의 명칭이기도 하다는 것. 그 사실이 얼마나 단조롭고 게으르며 열받게 하던지. 이를테면 그건 엄지발가락증, 관자놀이증 같은 것 아닌가. 



 그러다 수술 전 정밀한 상태 파악을 위해 MRI검사와 CT검사가 잡힌 뒤로는 오로지 두려움 밖에 남지 않았다. 검사 시 들어가는 조영제 부작용에 대해 무시무시한 설명을 듣고 간호사가 내미는 종이에 사인을 할 때에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


- 이런 부작용이 있다고 알려주시는 건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기 때문인 거죠?


 간호사는 스머프처럼 파랗게 질린 나 같은 환자는 처음 보는 일도 아닌 양,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짧게 다독였다. 


 검사 당일에도 마음을 비워야지 머리를 비워야지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조영제가 들어갈 바늘을 꽂아둔 것만으로도 공포였다. 대기실은 왜 그리 조용하고 잠깐 문이 열릴 때마다 훔쳐본 기계들은 왜 그리 크고 깨끗한지. 감정에 휘둘려 징징거리는 사람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은 그 분위기 속에 앉아 애써 의연한 척을 했다. 


 우려했던 조영제 부작용은 없었다. ‘조영제 들어갈 때 열감 좀 있으실 거예요.’ 하는 안내를 들었지만 상상했던 후끈거림이 아니라 내가 지금 오줌을 싸고 있는 건가 하는 복잡 미묘한 열감이었다. 그 생경함 말고는 막연히 두려워했던 상황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50분 동안 지속된 MRI검사의 기계 소음도 의외로 견딜 만했다. 폐소 공포증도 없고 소음에는 원래 무딘 편이라 앵앵 뚜뚜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소리에 무념무상으로 귀를 기울이고 시간을 잘 보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어떤 수술들이 진행이 될 것인지 설명을 들었다. 배에 네 개의 구멍을 뚫는 복강경 수술. 자궁내막증으로 확인되는 부분은 다 긁어낼 것. 심한 생리통을 유발하는 걸 막기 위한 신경차단술. 자궁 주변 장기와 유착된 부분 떼어내는 수술. 왼쪽에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정맥류 클립 폐쇄술. 흔히 들어왔던 ‘작은 물혹 하나 떼어내는 거야.’ 정도의 수술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처음 듣는 단어들에 다시 팔뚝에 솜털들이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이게 과연 나 같은 울트라 쫄보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인가.






 수술 전날 입원하러 가는 차 안에서 급기야 나는 공포에 질려 실어증에라도 걸린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운전하는 남편이 계속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몇 마디 말을 걸었지만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분당에 있는 이 병원으로 가려면 병원 근처에서 서울 방향으로 도로 유턴을 한 뒤 오른쪽으로 빠져야 했다. 신호를 확인하고 유턴을 한 남편이 물었다.


- 지금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어떻게, 서울로 질러?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른아홉에 수술이 무서워서 입도 못 떼는 여자와 그걸 달래겠다고 도로 집으로 도망갈까 하고 달래주는 남자. 어디 이걸 창피해서 얘기나 할 수 있을까. 긴장이 조금 풀리니 약간 힘이 났다.


- 수술해야지. 무서워서 기절해도 병원에서 기절해야지. 나 정말 너무너무 무섭긴 한데 아픈 게 싫어서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마음먹은 덕분이었을까. 수술 전 몇 번이라도 울 것만 같았던 공포를 잠시 얇은 천으로 덮어두고 꽤나 담담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6인실에 입원하는 바람에 무서워 대성통곡하기에는 분위기가 뒷받침이 안 되었던 탓도 있다. 입원 무렵 자궁적출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온 옆 환자분이 아프다고 밤새 울며 끙끙 앓는 통에 순간순간 다시 두려움이 밀려오긴 했지만, 항생제 반응 테스트다 제모다 관장이다 수시로 커튼을 열어젖히는 간호사들 덕에 마냥 두려워할 틈이 없었다.


 내가 터득한 공포에 맞서는 방법은 정신을 살짝 놓는 것이다. 누군가는 생각을 비우라는 식으로 고상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만 정확한 뉘앙스는 아니라고 본다. 말 그대로 정신을 살짝 놓고 맥없이 상황을 따라가다 보면 이미 가장 걱정하던 무서운 순간은 지나쳐있다. 심지어 반복적으로 그런 상황에 놓이면 자유자재로 정신을 놓는 요령까지 생긴다. 


 물론 이건 자잘한 공포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공포에 직면했을 때에는 쓰면 안 된다. 그런 때에는 아마도 반대로 정신을 꽉 붙들고 낼 수 있는 힘을 다 끌어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이른 아침 이동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하며 긴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이 방법은 유효했다. 내 정신은 반쯤 찾을 수 없는 곳에 가 있었다. 반 남은 정신으로 가까스로 했던 생각들은 이랬다. 수술실은 듣던 대로 정말 춥구나.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는 대체 뭐지. 수술하는 동안에 남편보고 밥을 먹고 오라고 미리 말할 걸 그랬나. 이 많은 인원이 배에 뚫린 구멍 네 개만 바라보고 있게 되는 건가. 생각보다 간단한 수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나는 수술 후기 같은 것도 하나도 안 찾아봤네. 약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뭔가 차가운 느낌이... 혹시나 마취가 빨리 안 되는 건 아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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