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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Jan 06. 2020

기도





그렇게 더웠다. 입추가 지났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았는데 한낮은 눈가가 부어오를 정도로 뜨거웠다. 사원이라고 했던가 절이라고 했던가, 정확히도 모르는 목적지로 가는 길은 타는 태양에 바삭바삭 말라버린 흙이 가루처럼 흩날리는 텅 빈 길이었다. 길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멀찍이 보이는 나무들도 어른어른 일렁이는 것이 지금 이 시간 저 태양이 찾아내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


우리는 한참을 길을 따라 걸었다. 아마도 몇 시간. 아니, 사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물 한 병조차 손에 들지 않고 맨손으로 터덜터덜 나섰으니 땅을 디디는 슬리퍼가 녹을 듯 뜨거워지는 동안 목구멍도 녹을 듯해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두어 발 짝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여자는 뒷모습이 자그마하다. 가까이 서면 내 가슴팍에나 올까.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올 하나 빠지지 않게 정갈히 내려 땋았고 그 끝은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스친다. 여자는 이런 더위에 익숙한 듯 느려지거나 빨라짐도 없이 뿌연 흙길을 또박또박 뒤꿈치로 땅을 정확하고 힘 있게 밀어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마 시선도 어지럽지 않은 모양이다. 저 멀리 정면만을 바라보는 뒤통수가 흔들림이 없었다.


반면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간격도 일정치 않고 속도도 제멋대로인 걸음을 걸었다. 나만 해도 멀리 목적지가 보이지는 않는지, 잠깐 앉아 숨을 돌릴만한 그늘은 없는지,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없는지 가까스로 기운이 날 때마다 두리번거렸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걸음을 포기한 것 같았다. 풀썩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줄어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시작한 게 아까워서 걸을 뿐이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려고 했었나. 이 작은 여자를 따라나설 때 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가. 아니다. 무방비로 내놓은 목덜미가 따갑고 아플 지경으로 태양이 내리쬐는 이 길에서 아무리 되새겨 봐도 별로 바라는 것이 있어 시작했던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흐름처럼 우리는 이 날 모였고, 걷기 시작했다.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덩치가 작은 저 여자의 뒤통수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힘든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면 슬리퍼를 버려야겠다 생각이 들 때쯤 문득 고개를 드니 저 앞에 검은 숲이 보였다. 그래, 사원인지 절인지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도 검은 숲 안에 있다고 했었다. 이렇게 뙤약볕을 걸어야만 나타나는 숲인 줄은 몰랐지만. 숲을 저 앞에 두자 한 번도 뒤를 확인하지 않았던 작은 여자가 힐끗 고개를 돌려 우리를 봤다. 인원을 체크한 건지 상태를 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뭘 파악하기에는 짧을 텐데 싶을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다. 바로 뒤에 있던 나와는 눈 마주칠 새도 없었다.


숲은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누가 칼로 경계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뚜렷하게 어느 순간 선명한 풀이 돋아나 있었다. 시간차를 두고 하나 둘 도착했고 우리는 신고 온 달아오른 신발을 숲 입구에 벗어두고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걸어온 흙길은 어디서 출발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목덜미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한 게 저기쯤이었을까. 슬리퍼 밑창 일부가 바닥에 눌어붙어 포기할 뻔했던 게 저어기 쯤 이었을까. 심장까지 닿는 숨이 열기로 꽉 찼다가 이제야 조금씩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앞서가던 여자는 선 채로 지친 숨을 고르는 우리를 등지고 숲만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출발하자는 신호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엉덩이를 두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여기서부터는 맨발로 걸을 참인가 보다. 나도 슬리퍼를 모아 길 경계에 가지런히 두고 꼬질한 맨발로 일어섰다.


이 지역은 원래 습하다고 들었다. 아까의 해는 하늘에 닿을 듯이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를 조금도 파고들지 못해 조금 전 지나온 길이 숨이 막히는 더위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걸 잊어버릴 듯했다. 무슨 생각이었던지 용기 내어 내 앞을 걷는 작은 여자에게 물었다.

- 이곳은 이렇게 종일 저녁 같고 으슬으슬한가요?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공손하고 신중한 목소리가 나왔다. 여자는 침묵한 채 돌아보지 않아 괜한 질문이었구나 멋쩍었는데 잠시 후 의외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답변이 단정한 뒤통수 너머로 날아왔다.

- 여기 있다 보면 그래도 낮과 밤이 비교적 느껴져요. 우리가 밟고 있는 풀들이 낮에는 그나마 따뜻하고 부드럽거든요.


그럴 만도 한 것이 타는 더위를 헤치고 그늘에 들어선 몸은 미처 적응하지 못해 피부에 물이 맺힐 듯 냉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좁은 풀밭 길을 맨발로 걷는 내내 발바닥은 따뜻한 물 위를 걷는 듯했기 때문이다. 숲길을 걷는 것은 처음이다. 새소리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며 아름답겠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숲은 걸어온 흙길보다도 더 고요했다. 풀들도 마른 부분이 없이 축축해 걷는 동안 바스락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앞선 여자는 마음이 편해졌는지 허리 위로 뒷짐을 지고 속도를 늦췄다. 덕분에 나도 몸이 정상체온을 찾아가는 동안 모아둔 예민함을 간신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렇게 우거진 숲속에 최소한의 나무만을 베어내고 길을 낸 탓인지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이 좁은 길은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넋을 놓고 걷다 보면 출발지로 돌아갈 것처럼 심하게 구불거렸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디디는 걸음마다 다음 걸음을 예측할 수 없어 나는 여자의 뒤꿈치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워낙 나무가 우거진 좁은 길이라 시야가 막히기도 했지만 주변을 감상할 만큼의 여유는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균형을 잡느라 평소보다 많이 움직인 발목이 시큰해질 때쯤 위태로워 보이는 붉은 나무 계단이 나타났다. 얇은 나무판자가 길이에 비해 가는 기둥 몇 개에 겨우 의지하고 있는 계단 틈 사이로 꽤 넓은 트인 공간이 보였다. 계단은 두 번 방향을 틀며 꺾어졌다. 여자는 몇 번이나 이 계단을 오르내렸는지 난간도 잡지 않고 까치발을 디디며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뒤를 따르는 나는 겁이 많아 너무 조심을 떨어 약간의 정체가 생겼다. 어릴 때에도 계단을 올라갈 땐 무서워서 발을 계단 안 깊숙이 넣고 나서야 다음 발을 디뎠었지.


위층에 먼저 도착한 여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경회루 같은 구조의 이 건물 위층은 검은 숲 한복판에서 비교적 뻥 트여있다. 여자가 가리키는 대로 난간에 바싹 다가서서 내려다보니 우리가 올라온 계단과 같은 색의 붉은 정사각형 바닥 공간이 운동장만 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닥의 일부는 어지러운 문양으로 가득 차있다. 전통 문양 같기도 했고 절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기도 했다. 문양은 약간 그림자가 져서 드러나는 것이 아마도 음각으로 조각된 형태인 것 같았다. 가만히 보면 각진 부분 없이 한없는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맴도는 가는 선들이 꽃으로도 보였고, 칼처럼도 보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서 그 넓은 공간을, 그 마음 설레는 문양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다시 돌아서 계단을 내려간다. 길게 땋은 머리가 팽그르르 따라 돌았다.

- 아름다운 건 직접 경험해보셔야죠.

우리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 얕은 턱으로 아까 내려다 본 붉은 바닥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 정도 굵기의 조각칼을 나누어 받았다. 정면에서 날을 보면 직각 정도로 구부러진 뾰족한 삼각칼이었다. 칼자루는 맨질맨질하고 반짝이는 흰 돌이다. 여자는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나는 초조함 한 톨까지 다 털어버리고 몇 발짝 떨어진 바닥에 절하듯 엎드렸다. 어둡고 붉은 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눈에 보일 듯 말 듯 서툴고 자신감 없는 가는 선으로 밑그림이 그려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는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과감한 기세로 조각칼을 가는 선 위에 갖다 대고 스윽 밀어냈다. 작은 조각칼은 엄청나게 날이 섰다. 나무라고 생각했던 붉은 바닥은 의외로 석고처럼 가루로 부서지며 부드럽게 밀린다. 촘촘한 붉은 가루가 부서지고 난 길에는 좀 더 어두운색의 속이 드러났다. 어느 정도 깊이와 폭으로 파야 위층에서도 보이는 문양이 완성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거나 하지 않고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어차피 시험이 아닌 이상 깊이도 폭도 적당히 내 뜻대로 하자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이니.


그렇게 한동안 눈앞에 바스러지는 가루와 앞으로 이어진 가는 밑그림에만 집중했다. 무엇을 떠올리려 하는 것도 부질없었다. 불과 얼마 전이었지만 아까의 더위도 숲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서늘함도 처음 느꼈던 순간만큼 생생하게 똑같이 떠올릴 수는 없다. 어떤 순간들은 다 지나가버렸고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좋을지도 모른 채 엎드려 있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출발지로 되돌아간다는 보장도 없다. 내가 남고 싶으면 남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 내려놓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나는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 기어가기도 하고 왼쪽, 오른쪽으로 돌기도 하면서 그렇게 어깨 사이가 뻐근하게 조여 오는 느낌이 날 때까지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머리를 땋은 작은 여자가 색색의 천 더미를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가까이 다가온 기척을 느끼고서야 나는 온 마디마디 두둑 소리를 내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둘러보니 내가 조각칼로 파낸 면적만 해도 어지간한 방 하나 크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한 발짝 물러서서 턱을 당기고 실눈으로 바라보니 거대한 거북이 모양이 보였다. 여태까지 나는 거북이 밑그림 위에 엎드려 예쁜 등짝이며 힘찬 앞발이며 날카로운 꼬리며 내 손으로 조금씩 깎아내고 있었다. 지금의 느낌 또한 생생하게 기억해내진 못하겠지만 나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내 눈에 담아두었다.


나는 여자에게서 노란 천을 받았다. 나누어 받은 천들은 모두 같은 사이즈로 키의 두 배 정도 길이가 되는 아주 긴 천이었는데 같은 색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지시대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하루 동안 몇 번의 온도차를 겪고 고단했던 몸은 꽤나 끈적거렸고 알몸으로 숲의 알싸한 공기를 마주하자 솜털들이 일제히 일어서 텁텁한 피부를 깨웠다. 여자는 한 명 한 명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몸에 맞게 천을 둘러주었다. 두르는 동안 내 몸에는 손이 스치지도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키가 커서인지 내 천을 두른 모양은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적 장식이나 주름이 없이 심플했다. 숨 막히게 부드럽고 얇은 천은 긴 원피스처럼 늘어뜨려져 그 끝은 복숭아뼈를 간지럽혔다.


마지막 남은 사람이 예쁜 산호색의 천을 두르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여자를 따라 이곳에 들어섰을 때처럼 일렬로 다시 이동했다. 처음 올라갔던 계단의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갔다. 그 길 끝에 조금 전보다 훨씬 큰 사원이 나를 맞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점처럼 늘어선 사람들은 도착한 우리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 인원인 것 같다. 이번에는 두 계단 정도 아래로 내려서야 했다.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을 때 이곳이 물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둡고 붉은색의 바닥이라 물이 차 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내 체온과 비슷한지 따뜻함도 차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물을 발목으로 저어가듯 천천히 움직여 제자리에 섰다. 물은 딱 천이 늘어뜨려진 복숭아뼈 언저리까지만 차 있다. 물은 표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천에 스며들어 어느새 허벅지 정도까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새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바구니에서 아기 주먹만 한 흰 꽃을 나누어줬다. 건네줄 때마다 꽃에 입김을 불어 줬는데, 그러고 나면 꽃은 촛불처럼 일렁이는 빛을 내며 환해졌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행여나 빛나는 꽃이 뜨거울까 봐 주춤거리며 두 손을 모아 내밀었는데 의외로 꽃은 밝게 빛나기만 할 뿐 아무 무게감도 온도도 느껴지지 않게 사뿐히 손바닥 위에 올라앉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모두가 빛나는 꽃을 건네받고, 나눠주던 사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자 이곳은 이윽고 고요해졌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몸을 구부려 꽃을 발 앞쪽에 천천히 띄워놓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이곳에서는 잔물결조차 없어 꽃은 띄워둔 곳에서 가만히 빛을 냈다. 물 위에 수많은 꽃이 띄워지자 붉고 어둡던 바닥은 화려한 문양을 환하게 드러냈다. 처음에 도착했을 때 위층에서 내려다봤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로의 발 아래서 유려하게 이어진 선들은 빛의 길로 모두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었다. 아마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행여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물결이 일어 아름다움이 흐트러질까 봐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너무 꼼짝 않고 있었더니 잠긴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아니, 발목뿐만 아니라 무릎도 축축해졌던 엉덩이도 아까부터 저렸던 어깨도 모두 다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모두가 평온해졌다.


이곳에 올 때의 나는 정말로 바라는 것이 없었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아무도 눈을 감지 않았고 빛을 내려다보는 눈은 점점 맑아진다. 뭐라도 더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빛 앞에서 오히려 간절하고 더 간절해진다. 이런 아름다움과 평온함 속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소원 같은 건 없어’라고 호언장담하던 사람들도 무언가에는 간절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는 정말로 바라는 것이 없었나. 그럴 리가! 아프고 싶지 않다. 다시 태어난 만큼은 안 되더라도 고통스럽고 싶지 않다. 잃었던 것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고 싶다. 내 간절함이 더 이상 초라하거나 구차해 보이고 싶지 않다. 이 마음에 평소에 내가 그토록 거부감을 드러냈던 ‘기도’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도 이제 뭐 어떤가.


-환자분! 수술 잘 되셨고요, 이제 곧 병실로 이동하실 거예요!

귀에 나뭇잎 여러 장을 얹어 놓은 듯 먹먹한 소리가 나를 두드린다. 내 두 발은 아직 빛나는 사원에 잠겨있다. 아직 눈앞에 환한 꽃이 아른거린다. 오히려 눈을 감으면 간절함이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 나는 눈을 더 크게 떠보려 애쓴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 기억할 필요도 없다. 나는 돌아오는 길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돌아올 수 있었다. 문득 오늘 할 일은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기억을 내뱉는 일이라고 아주 처음에 배웠다는 게 떠올랐다. 내쉬는 것부터 해보자. 그리고 나면 큰 숨은 저절로 들어와 나를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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