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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Jan 13. 2020

하노이 쪽으로 지다

두 번째




출발 당일 아침, 미주는 연실에게 논문 수준으로 정리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공항리무진이 어디에 위치한 정류장에 몇 시에 정차하며, 내리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공항 내의 어느 창구로 가면 되는지 같은 세세한 것들을 놀랄 만큼 자세하게 적어두었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한 이후의 것들까지 모두 적혀있었다. 연실은 대강 훑어서 읽어두었다. 짐은 예전에 남편이 출장 다닐 때 쓰던 낡고 작은 검은색 패브릭 캐리어에 싸둔 상태였다. 더운 나라로 가는 여행이라 옷들이 얇아 가진 여름 옷을 거의 모두 주워 담았는데도 여유 공간이 남았다. 남는 공간에는 혹시 몰라 컵라면 몇 개를 채워 넣었다.


공항은 꽤나 붐볐다. 미주가 알려준 창구에 가서 줄을 섰는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노이에 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싶었다. 늘어선 줄에는 연실과 비슷한 또래의 부모를 모시고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부모들이 색색의 등산복 브랜드 바람막이와 뭉뚝한 운동화를 신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으면 미주 또래의 자식들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엄마 아버지 여기 서 계셔. 이리로 와서 줄 서셔. 이거 이따 보여줄 거니까 잘 들고 계셔. 반말과 존댓말이 어지럽게 섞인 특유의 말투로 유치원 선생님처럼 컬러풀한 어른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연실은 입고 있던 얇은 여름 카디건을 벗어 새삼 팔에 걸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권 보여주시겠습니까?”

맑은 목소리의 항공사 여직원이 올려다보았다. 케이스도 없이 깨끗한 상태인 여권을 내밀었다. 직원은 창가 쪽 자리로 드릴지 복도 쪽 자리로 드릴지를 물었다. 비행 중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창밖을 볼 수 있는 게 덜 답답할 것 같아 창가 쪽 자리로 달라고 했다. 캐리어의 사이즈가 작아서 짐은 부치지 않아도 되었다. 연실은 탑승 시간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랗게 표시된 티켓을 받아들고 기분 좋게 돌아섰다.


타이밍도 적절하게 미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어디야? 공항 도착했어요?”

“으응. 방금 비행기 티켓도 받았다.”

“내가 보낸 메시지에 있는 대로만 하면 돼. 줄 서서 들어가면서 여권이랑 티켓 보여주고, 짐 검사할 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자동출입국 심사라 기계 화면에 뜨는 대로 하면 돼. 그러면 들어가서 티켓에 써있는 게이트에서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타기만 하면 끝이에요. 진짜 별거 없어.”

“알어, 알어. 걱정하지 마.”


그 말을 듣고도 미주의 목소리에서 걱정을 지울 순 없었다. 미주는 곧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회의에 들어가기 때문에 연락이 어려울 거라 했다. 데이터도 부족한 상태라 언제 연락이 어떤 식으로 끊길지 모르니 자기가 보내준 메시지를 꼭 읽으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했다.


미주와의 통화를 끝내고 연실은 바로 제일 가까운 출국심사 게이트에 줄을 섰다. 앞에는 출장을 가는 듯 보이는 차림의 중년 남자가 검은 배낭을 메고 섰다. 왼손에 여권과 티켓을 함께 들고 있는 것이 보여 연실도 같은 손에 여권과 티켓을 쥐었다. 짐 검사를 할 때에도 그 남자의 뒤에 섰다. 남자가 네모난 파란 바구니에 핸드폰과 노트북을 담고 또 하나의 바구니에 메고 있던 배낭을 담았다. 연실은 또 그대로 한 바구니에는 핸드폰을, 다른 바구니에는 메고 있던 작은 가방과 카디건을 담았다. 직원이 캐리어는 그대로 올려달라고 해서 연실은 마지막으로 캐리어도 올렸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서 앞 남자처럼 짐을 챙기는데 캐리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이게 뭔가요?”

검색대 직원은 엑스레이로 캐리어가 투과된 화면을 연실에게 보여주며 구석의 동그랗게 검은 부분을 가리켰다. 연실은 당혹스러워서 뭘 넣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 음, 저기 그게 뭐더라... 음...”

“짐 열어서 확인 좀 하겠습니다.”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연실이 보는 앞에서 캐리어를 펼쳤다. 낡은 비닐봉지로 둘둘 싼 여름 샌들이며 구석구석 빈 곳을 메꿔둔 컵라면이 활짝 드러났다. 연실은 민망함에 카디건을 쥐고 입가를 가렸다. 직원이 캐리어 밑바닥에 깔려있던 꽃무늬 파우치를 열자 동그랗고 검은 물체의 정체가 확인되었다. 딱 손바닥 사이즈의 동그랗고 매끈한 돌이었다. 연실은 돌을 보자마자 묻지 않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아! 그거 그거! 우리 신랑이 옛날에 낚시 갔다가 주워온 돌인데... 아이고, 그게 내가 뒷목이랑 어깨 있는데랑 항상 아파가지고. 그거 쥐고 문지르거든요. 그냥 손으로 해서는 힘이 영 안 실려가지고. 잡기가 딱 좋은 사이즈라 조금 무거워도 일부러 챙겼는데, 아이고.”

직원은 다시 돌을 연실의 파우치 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파우치는 펼쳐진 캐리어 위에 올려둔 채 연실 쪽으로 캐리어를 슥 밀며 말했다.

“이게 돌 같은 경우에는 엑스레이 상에서는 가루 형태로 보이기 때문에 오인될 수 있어요. 가셔도 됩니다.”


연실은 허둥지둥 파우치며 컵라면을 제 위치에 끼워 넣고 캐리어를 닫으면서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쬐그만 마사지용 돌인데 이런 게 엑스레이에서는 그렇게 보이네, 아이고.”

이미 뒤에 섰던 두 사람이나 검색대를 통과하고 연실 옆에서 짐을 집어가던 참이었다.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앞에 섰던 출장 가는 남자는 이미 출국심사를 끝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다시 줄을 서고 순서가 되자 눈치껏 다른 사람들처럼 기계 앞에 섰다. 화면에 뜬 방향대로 여권을 펼쳐 기계 위에 올려두자 작은 자동문이 열렸다. 발 모양의 스티커 위에 서서 손가락 지문을 대고 카메라를 바라보라는 설명에 따라 그대로 했는데 다음 자동문은 열리지 않았다.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해봐도 소용없었다. 뒤쪽에서 바라보던 작고 마른 직원이 다가와 표정 없이 “두 번째 손가락 대시면 됩니다.” 하고 말했다. 연실은 엄지 대신 검지를 갖다 대고 카메라를 다시 바라보았다. 미동 없던 두 번째 자동문이 열렸다. 게이트를 빠져나와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면세점이 죽 늘어선 걸 보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티켓에 색연필로 체크된 탑승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남았다. 연실은 비행기들이 늘어선 게 보이는 창가 쪽으로 가서 ‘후’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가방에서 돋보기안경과 핸드폰을 꺼내 미주가 보내왔던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자동출입국 순서 부분에 ‘오른쪽 검지를 기계에 살짝 대고 있어요.’라고 꼼꼼한 미주는 써놓았다. 뭐, 엄마가 평소에 쓰던 마사지 돌을 챙겨 오리라는 건 예상 못 했을 테니 그런 부분은 적혀 있을 리가 없었다. 보안 검색대에서 돌이 문제가 되었더라는 얘기를 미주에게 하면 어떤 반응일까. 미주는 ‘거봐, ~하지 그랬어’ 같은 말은 하지 않는 타입이니 아마도 큰 반응이 없을 것이다.


카디건을 다시 챙겨 입고 여권 사이에 티켓을 끼워 메고 있는 가방 안쪽에 잘 넣어두었다. 딱히 살 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면세점 구경을 해 볼 참이었다. 반짝거리고 큼직한 캐리어들 사이로 연실은 자신의 오래된 캐리어를 요리조리 조심스럽게 움직여가며 가장 가까운 면세점부터 들어갔다. 선글라스 매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백화점 행사장에서 샀던 선글라스 하나를 가방 안에 챙겨오긴 했다. 그땐 옅은 컬러의 렌즈가 유행이라 테 부분이 두텁고 금색 장식이 가득한 옅은 갈색의 선글라스를 큰맘 먹고 샀었다. 진열된 선글라스들 중에 그와 비슷한 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요즘 스타일은 아닌가 보다.


연실은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세워두고 선글라스 몇 개를 써봤다. 하얗고 적나라한 조명 아래 군데군데 기미가 올라온 연실의 맨얼굴에 올라앉은 선글라스는 그 어느 것도 이질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날렵하고 가벼운 모양의 선글라스를 두어 개 더 써봤을 때쯤 근처에 서있던 직원이 “알 사이즈가 좀 더 크고 약간 각진 형태가 어울리실 것 같아요.”라며 다가와 하나를 골라 건넸다. 연실은 받은 선글라스를 쓰고 한참을 앞이며 옆이며 거울을 올려다봤다. 만족스러운 직원의 표정에 연실도 살짝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고 다시 직원의 손에 건넸다.

“안 써봐서 그런가 뭐가 어울리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직원은 더 권하지 않고 선글라스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천천히 돌아다녀 봐도 딱히 필요한 건 없었다. 남편이 양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굳이 나 좋자고 온 여행에 무거운 남편 짐까지 만들 이유는 없었다. 향수를 뿌려본 적도 없고 액세서리는 원래 하지 않는다. 명품 지갑을 살 정도의 배짱은 안 되었다. 그러다 문득 연실은 뭔가 떠오른 듯이 뒤로 돌아 화장품 매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익숙한 로고가 그려진 샤넬 매장에 들어섰다. 새 립스틱을 구경해 볼 참이었다. 가지런히 꽂혀있는 립스틱은 개수를 셀 수도 없었다. 연실은 막연해져서 그 앞에서 한참 서성이다 단발머리의 직원에게 가방 안에서 여권을 꺼내 펼쳐 보였다.


“저기, 이 사진에 입술 색깔 있잖아요. 약간 다홍색 같은 거. 이런 비슷한 색 립스틱이 있을까요?”

직원은 여권 속 연실의 얼굴을 미간을 찡그리며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없이 척척 립스틱 세 개를 집어 들고 자기 손등에 그어 보였다.

“이거는 거의 전형적인 레드인데 인기가 제일 많은 컬러구요, 이거는 조금 전 것보다 채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고객님 정도 연세 분들이 많이 찾으시는 컬러고, 이거는 약간 핑크기가 있어 보이는데 입술에 발색했을 때는 사진이랑 비슷하다 느끼실 거예요.”

연실은 무표정한 얼굴의 직원의 손등에 그어진 세 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니까 요 세 번째 거는 입술에 바르면 사진처럼 보인다는 거죠?”

“입술에 한 번 발라봐 드릴까요?”


직원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연실의 입술을 리무버를 묻힌 화장솜으로 기계처럼 몇 번 닦아내고 브러시에 세 번째 립스틱을 묻혀 꼼꼼하게 발라주고는 커다란 손거울을 비춰줬다. 연실은 펼쳐진 여권을 손거울 옆에 갖다 대고 비교해봤다. 얼추 비슷한 것 같았다.

“이걸로 하나 주세요.”


투명한 봉지에 밀봉된 립스틱을 가방 안 깊숙한 곳에 챙긴 뒤 연실은 티켓에 적힌 번호의 탑승구로 걸어갔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탑승구 주변에는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연실은 창가에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두고 서서 미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엄마 조금 있으면 비행기 타. 많이 바쁜 것 같은데 엄마 걱정하지 말고. 내리면 알려준 대로 택시 타고 호텔로 바로 갈 테니까. 연락 가능할 때 다시 통화하자.


탑승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탑승구 주변의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섰다. 연실도 재빨리 줄에 합류했다. 티켓 확인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타 좌석을 찾았을 때엔 이미 연실의 옆자리, 그러니까 복도 쪽 좌석의 주인이 앉아있는 상태였다. 사십 대 초반의 남자였는데 아까 출국 심사 때 연실의 앞에 줄을 섰던 남자와 아주 비슷했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연실이 캐리어를 머리 위 보관함에 넣느라 끙끙거리고 결국 스튜어디스가 달려와 도와주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안쪽이 내 자리라는 의미로 티켓을 흔드는 듯 보여주며 어깨를 톡톡 두드렸을 때에야 남자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깜짝 놀란 듯 복도 쪽으로 일어서며 비켜주었다. 연실이 쿠션을 허리 뒤에 받치고 포장된 담요를 뜯어서 무릎 위에 사뿐히 올리고 안전벨트를 매는 등 분주할 때, 다시 자리에 앉은 남자는 너무나 익숙한 듯이 아까와 똑같은 상태로 편안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의 탑승은 계속되었다. 옆자리 남자와 비슷한 또래, 비슷한 스타일의 남자가 꽤 많았는데 뒤 쪽 좌석을 찾아 걸어가던 그런 남자 중 하나가 옆자리 남자를 툭툭 치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오늘 나가십니까?” 하면서 싹싹한 목소리로 고개를 굽혀 인사했다. 아마도 같은 회사에서 같은 날 출장을 가는 사람이 꽤 많이 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노이 근처에 우리나라 대기업이 큰 공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모든 사람의 탑승이 끝나고, 짐도 다 정리되었을 때쯤에는 옆 남자는 이미 잠든 건지 핸드폰을 배 위에 두 손으로 모아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연실은 계속 창밖을 내다보았다. 맑은 날씨는 아니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긴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스튜어디스가 복도를 서성이며 승객들에게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연실은 생각난 듯 앞 좌석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비행기 모드로 변경하고는 다시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비행기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고 기내 방송에서는 산소마스크 착용법, 구명조끼 위치, 바다에 착륙 시 안전 수칙 등의 설명이 이어졌다. 연실은 낯설기만 한 창밖 풍경과 귓전에서 울리는 와닿지 않는 방송에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살면서 이토록 불안정한 내 자리에 앉아 본 일이 없었다.








스튜어디스도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래고, 이륙까지가 이렇게 오래 걸리나 이상하다 싶을 무렵 다시 기내 방송이 나왔다. 이륙 준비는 끝났으나 비슷한 시각 이륙하는 비행기가 많아 20분 정도 더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연실은 앞 좌석 주머니에 꽂힌 기내 면세품 카탈로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달러로 가격이 표기된, 꽃 모양으로 보석이 꽉 들어찬 목걸이 팔찌 반지 세트를 보며 어떤 사람이 이 비싼 보석을 비행기에 앉아 ‘이거 하나 사갈까’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했다. 탑승할 때 지나친 널찍한 비즈니스 석에 앉을 법한 자기 나이 또래의 우아한 여자를 떠올려 보았다.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에 잘 관리된 나이답지 않은 피부, 결이 좋은 캐시미어 원피스를 입었을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준 작은 잔에 담긴 샴페인을 마시며 카탈로그를 뒤적이다 보석을 보고 멈춘다. 손짓으로 스튜어디스를 불러 ‘이거 한 세트 가져다주세요. 착륙하면 바로 하고 싶네요.’하고 말한다. 이건 영 아닌 것 같았다. 연실은 나라면 이런 비싼 보석을 사는 데 제대로 돈 쓰는 기분도 안 나는 이런 곳에서 살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이걸 사려는 사람은 온갖 경로로 힘겹게 알아보니 이곳에서 사는 게 가장 싸다더라는 말을 들어 벼르고 사는 사람 외에는 없지 않을까. 이름 모를 누군가의 그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딱히 부러울 것도 없었다.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있을 때 묵직한 진동이 일며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에 작은 빗방울이 하나 둘 묻어났다. 활주로로 이동하는 동안 연실은 생각보다 비행기가 땅에서 움직일 때에는 진동이 꽤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흔들림 속에서도 옆 남자는 잠이 푹 들었는지 핸드폰을 쥔 손 중 하나가 허벅지 쪽으로 늘어졌다. 비행기는 활주로에 도착하자 얼마간 멈춘듯하더니 갑자기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연실은 몸이 뒤로 쏠리기 시작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탑승할 때 보았던 앞쪽 자리의 어린 아기가 떠올랐다. 아까는 칭얼거리는 소리도 꽤 들렸었는데 지금은 조용하다. 너무 놀라 칭얼거릴 수도 없나 보다 싶어 안쓰러웠다.


굉음이 일순간 작아지며 뱃속이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났다. 몸의 각도가 뒤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보니 비행기가 떴구나 싶었다. 창밖의 풍경도 모두 기울어졌다. 옆 남자는 전날 밤샘근무라도 한 걸까,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도대체 몇 번을 비행기를 타봐야 이런 소음과 진동 속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의 고도에 다다라 기울어진 느낌은 사라졌다.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지시등이 켜져도 연실은 잠긴 안전벨트를 그대로 두었다. 비행 내내 의자를 뒤로 젖히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의 화면에 뜬 현재 비행 위치만 꼼짝 않고 응시할 뿐이었다.


스튜어디스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기내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텁텁한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복도의 앞 쪽에서부터 기내식을 서빙하고 있었다. 닭고기 요리와 소고기 덮밥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는 말이 멀리서 들렸다. 연실은 좌석에 고정되어 있던 테이블을 내리고 준비했다. 카트가 연실의 좌석 순서까지 다가왔음에도 옆자리 남자는 숙면 중이었다. 스튜어디스가 연실에게 두 가지 메뉴 중 어떤 것으로 준비해드릴지 묻자 연실은 망설이다 옆 남자의 팔뚝을 톡톡 쳤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 온몸을 한 번에 움직이며 깨어나 이어폰을 뺐다. 스튜어디스는 다시 한번 메뉴를 설명했고 남자는 닭고기를, 연실은 소고기를 주문했다.


기내식을 펼치며 연실은 슬금슬금 남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주무시는 데 깨워서 미안해요. 그래도 밥은 먹고 다시 주무시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나이 먹으니 자꾸 오지랖이 늘어가지고...”

남자는 포크를 쥐지 않은 나머지 손을 과하게 내저으며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하고 싹싹하게 대답하더니 핸드폰에 연결되어 있던 이어폰을 빼서 좌석 화면에 연결하고는 다시 귀를 닫아버렸다. 영화를 보려는 듯 우물거리며 화면을 뒤적거렸다. 연실은 첫 기내식이 영 입에 맞지 않았다. 어떤 것을 먹어도 플라스틱 그릇 냄새가 음식에 밴 것 같았다. 그나마 봉지에 들어있던 동그란 빵은 원래의 맛과 비슷했는데, 빵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반 밖에 먹지 못했다.


영화를 고른 남자는 부지런히 본격 식사를 시작했다. 연실이 이것저것 깨작거리는 동안 남자는 레드 와인을 주문했고, 놓인 음식들을 자기만의 순서대로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심지어 빵은 커피가 서빙되는 것을 기다린 뒤 버터를 숟가락으로 떠서 통째로 위에 올리고 두 입에 나누어 다 먹었다. 남자는 마치 전원을 껐다 켤 수 있는 사람처럼 잘 때와 깨어있을 때가 극적으로 달랐다. 연실도 어중간한 맛의 커피를 홀짝이며 께름칙한 입을 씻어냈다.


테이블 위가 정리되고 나자 기내는 잘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듯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옆 남자가 보는 영화를 곁눈질로 슬쩍 보았다. 자막도 없고 익숙한 얼굴이 지나가는 걸 보니 한국 영화임에 분명했다. 연실은 손을 뻗어 자기 화면을 뒤적거렸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언제였더라. 영화관에 갔던 건 기억 속을 되짚기에도 이미 너무나 오래된 일이고, TV의 영화채널에서 방영하는 영화조차도 온전히 끝까지 본 기억이 없다.


시간이 없었다기보다도 언제부턴가 영화에 끝까지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젊었을 적의 연실은 책이나 영화 속 인물에 감정 이입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희로애락을 겪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와 대립하는 악역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는 현실성이라는 필터를 장착하고 감상이 아닌 관망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 저런 일이 어디 있어. 후회할 짓을 애초에 왜 했대, 그래? 저렇게 총을 쏴대는데 한 발도 안 맞는다고?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는 나와 관계없는 타인의 인생에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허구의 인물이 고통을 받든, 사랑에 빠지든, 세상을 구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잘난 척을 일삼던 이웃 여자의 아들이 아이 둘을 포기하고 이혼하게 된 이야기라든가, 평범한 아침 출근길에 신발을 신다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뒤 2달째 의식이 없는 남편 동창의 이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시큰둥하고 불행에 박수치는 못된 심보 때문은 아니었다. 힘든 상황의 사람들을 하나 둘 떠올리며 가만히 기도하다 보면 내 가족에게 돌아올 행복을 위한 제 몫을 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남편도 미주도 연실에게 성당에 가서 ‘잘 되게 해주세요’ 하고 비는 건 기복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뭐니 하지만, 다른 기도를 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남편과 미주는 뭔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다 내가 열심히 기도한 덕인 줄 알아.’라고 매번 생색내는 연실에게 작은 맞장구조차 쳐준 적 없었다. 그래도 연실은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고, 힘든 이들을 떠올렸으며, 마지막은 우리 가족 잘 되게 해주세요로 마무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화면에 미주가 일찌감치 예매해 두고 개봉일만 기다리다 보러 갔던 히어로 영화가 눈에 띄었다. 헤드폰은 연결하지 않았고 그냥 영상과 자막만 멍하니 틀어두었다. 비록 저들은 색색의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조악한 무기를 들고 있지만 보나 마나 멋지게 세상을 구할 것이다. 너무나 막중한 사명을 짊어져 저들 앞에서는 끼니도 편안한 잠자리도 하찮은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오로지 끼니와 잠자리가 걱정인 우리 같은 누군가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것이다. 연실은 괴리감에 조그만 화면 속 영웅들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남편과 자잘하게 부딪칠 일이 있을 때마다 내심 미주가 자기편을 들어줬으면 했다. 남편의 세계는 넓었다. 끼니와 잠자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연실이 항상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으므로 자기 세계의 범위를 맘껏 넓혀갈 시간이 넉넉했다. 연실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세계를 넓혀주는 것에만 평생이 동원된 것이 서러워 딸만큼은 자신의 뒤를 밟지 못하게 애썼다. 미주가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너는 이런 거 아니라도 할 거 많아.’ 하면서 고무장갑을 빼앗았다. 그렇게 키웠으니까, 그렇게 빤히 눈앞에서 내가 널 위해 어떻게 사는지 보여줬으니까 미주가 자기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미주는 그러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딸이기도 했지만 남편과의 언쟁 속에 미주가 한 마디를 거드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핸드폰에 몰두하거나 아예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것은 연실이 이 현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나마 이상적인 그림과도 거리가 멀었다. 미주가 자라는 동안 하나부터 열까지의 세심한 뒷바라지를 한 건 연실이었지만 미주가 외국에 잠시 전공과 관련된 심화과정을 듣고 싶어 할 때, 과외로 모은 돈을 털어 친구들과 유럽에 배낭여행을 가겠다고 할 때에도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턱하니 목돈을 쥐여주는 것은 남편이었다. 그럴 때마다 연실은 한없이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영웅들이 세상을 구하는 동안 집에서 수트를 다려놓는 느낌이었다. 기내의 어둠만큼이나 마음 한편도 뿌옇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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