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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움 Nov 09. 2023

"공주처럼 사셔야겠어요."

저혈압, 빈혈에 흰 머리

80/45mmHg, 나의 평균혈압. 이것보다 더 낮게 나올 때는 놀라는 간호사 선생님도 계셨다. 그러고는 두 세번씩 재 주시기도 했다. 




2019년 건강검진 결과지를 들고 동내 내과에 갔다. 정상이던 수치들에 재검이 뜨기 시작한 첫 해인 데다가, 목 옆이 부어오른 게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살짝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행복이가 친구네 놀러가 잠깐 틈에 진료를 보러 간 날이었다. 허름한 골목에 있는 작은 병원이었는데 대기 환자가 엄청났다.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이 추천해 주셔서 온 거였는데, 대기가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 다른 병원으로 가려다 그냥 있기로 했다.


  

"이 정도 혈압에 빈혈이면 상당히 힘드셨을 텐데, 어지럽거나 앉았다 일어설 때 핑 돌고 그러지 않았어요?"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아니요, 별 다른 증상은 못 느꼈어요. 그냥 잠깐씩 어지러운 적은 있었고, 생리할 때 기운 없고...그 정도요."

"피곤한거는요? 목 옆에 볼록한 건 임파선염 때문에 그래요."

"아침부터 활동하니, 저녁때쯤 되면 피곤하죠. 요새는 지쳐 잠들어요. 제가 원래 잠이 많아요."

"아이가 몇 살이에요?"

"8살, 4살이요,"

"힘드시겠구나, 요즘 학교를 못 가니."

"네,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죠." 

"저혈압도 그렇고, 다른 수치들도 보면 최대한 쉬셔야 해요. 무리하지 마시고요. 쉽지 않겠지만." 





2020년 4월이었으니, 아이가 둘, 코로나가 피크인 시절이라 손꼽아 기다리던 입학식도 등교도 못하던 안쓰럽고 짠한 행복이와 24시간을 붙어 있었고, 거기에 '9 to 4'의 재택근무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회사와 팀장님이 많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내 일정에 최대한 맞춰서 유연 근무까지 할 수 있었으니, 업무상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나의 고마움을 표현하는 길이라 생각했었다. 일을 마치고는 하루라도 안 놀면 큰 일이 나는 줄 아는 나의 '놀이터 죽순이' 자매와 함께 거의 매일을 저녁 먹기 전까지 놀았다. 어느샌가 나는 '놀이터 이모'가 되었다.   

그러니 공주는 커녕 무수리 중에서도 상(上)무수리의 삶을 사는 중이었다.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던 날들이 이어지면서 흰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Oh, my God!!!!

흰 머리는 눈에 보이기라도 했지만 다른 증상들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건강검진 수치들은 정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새벽에 운동까지 시작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등산을 하고 집에 돌아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여느 집들의 아침과 비슷한 그 풍경. 새벽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한다는 건,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다. 미라클 모닝으로 새벽 4시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널린 이 세상에, 6시면 그냥 모닝 아니겠냐 할 수 있겠지만 '신생아'만큼 잠이 중요한 '프로수면러'인 나에게 6시 기상은 단연코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운동도 하냐고 물어 말씀 드리니,

"당분간은 운동도 하지 마시고 공주처럼 사셔야겠어요, 틈나는 대로 쉬세요, 그래야 회복하십니다."

선생님의 위트 있는 멘트에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진료실을 나왔다.

내과 선생님인데 심리 상담을 받은 것 처럼 꽉 찬 위로를 받은 하루였다. 

그 후로 나는 이 내과만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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