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지난주
입장 立場 [명사]
- 당면하고 있는 상황
일본어 투 생활 용어로 국립국어원에서는 ‘처지’로 순화하여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전면에 이 어휘를 내세움은 각 음절을 이루는 한자어의 조응을 빌어, 가장 일차원적인 의미를 물고 늘어지고자 함이다. 단순히 한자어 그대로 뜻을 살피자면, ‘마당(場)’에 ‘서다(立)’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입장’은 곧 ‘마당에 서는 것’이며, 굳이 주어와 호응하면 ‘누군가’의 ‘마당에 선다’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이렇게 보자면, 누군가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당에 서는 일일 게다. 물론 그 이전에 각자의 마당이 있다.
마당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마당이 지면에 의탁하듯, 우리의 마당도 어디엔가는 기대고 있다. 본디 제 마당이라는 것이 ‘신세(身世)’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한 것이다. 특히, 나의 마당이 드높아졌을 때, 이에 기여한 타인은 그 자체로 부채로 인식된다. 나의 지위가 기대받는 목적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나의 마당을 받치고 있다고 여기는 애틋한 타인에게 하해와 같은 은총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를 또렷이 증빙한다. 여기에 더해, 나의 성장에 대한 위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베풂을 이용되는 지경에 이르면, 적절치 못한 은총의 행사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변했다는 흔한 진단은 기실 그 사람의 배경이 변했음을 이른다. 우리는 마당을 달리했을 때, 지금껏 견지하던 신념을 더는 유지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하곤 한다. 단순히 수직적인 위계의 측면만 보자면, 만화 <송곳>의 그 유명한 대사,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를 빌려와도 되는 지점이다. 새롭게 편입된 이해관계 속에서, 소위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없는’ 당사자와의 마찰을 줄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라도 통용될 공통의 심상 일지다. 그리고 좀 더 애틋한 차원도 있다. 드높아진 마당에 서서, 빠져드는 상념의 시간을 보내자니 힘들었던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자가 눈에 밟히는 것은 또한 어찌하기 힘든 노릇이다. 그저 주어진 모습만 놓고 보자면, 우리는 영락없는 입장의 노예이다.
우리의 마음은 따로 신경을 곤두세워 애를 쓰지 않으면, 기대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가족, 선후배, 팬클럽과 같이, 입장을 의탁한 존재에 대한 보답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부상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입장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마음의 제어가 요구된다. ‘좋은 게 좋은 것’, ‘사람이 너무 그러는 것 아니다’라는 오래된 변명을 의심하는 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부적절한 은혜를 베푸는 자가 공직에 몸담고 있다거나, 심지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리에 있다면, 단지 당사자 양심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게 된다. 일반적인 개인이 마주할 수 있는 입장의 자유와는 결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비용의 그릇된 사용이라는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정의(正義)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으로 힘들여 쌓은 것을 무감각한 개인이 무너뜨리는 일은 흔하고도 쉽다.
한 자연인이 국민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겠다는 엄중한 선택은 유권자가 그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실체화된다. 두 선택이 맞닿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가족, 선후배, 팬클럽이라는 존재를 위해, 위임받은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다. 어긋난다. 누군가를 국회의원으로 선택한 사람은 국민이자, 유권자이다. 결코, 친인척이 아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과 의무의 에너지를 어느 방향으로 흘려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는 무거운 배지를 달고 있다. 덧붙여, 그 선택의 어긋남조차, 일자리라는 것이 희박해진 사태 속에서 취업이라는 성전(聖殿)을 두고 벌어졌다는 이 웃지 못할 풍경의 2016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갔다.
<숫타니파타>는 불교의 초기 경전에 속한다. 길이가 아주 짧으며, 문답식의 일반 경전과는 달리 시 형식을 취한다는 특징이 있다. 소설가 공지영의 소설 제목으로 일반에 친숙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은 바로 <숫타니파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구이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고, 어떤 권위에도 주눅 들지 말 것이며, 오직 자신의 주인으로 당당히 살 것을 권하는 부처님의 말씀인 것이다. 몇몇 의원들의 친인척 채용 뉴스가 터져 나온 지난주, 유독 이 말씀에 귀가 기운다. 친인척의 청원을 단박에 거절할 수 있는, 선후배의 청탁에 단호히 대응할 수 있는, 나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기에 공식적인 팬클럽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치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그저 욕심일까? 2천500여 년 전,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¹ ²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법정스님 譯, p.34 중 ³
참고
¹
- 한겨레신문, 2015년 5월 10일 자 사설, “[김선우의 빨강]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hani.co.kr/arti/opinion/column/690520.html
²
- 오마이뉴스, 민병도 기자, 2005년 4월 11일 자, “'무소의 뿔처럼...'에서 무소는 물소인가, 코뿔소인가?”
- 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8349
³
- <숫타니파타>, 법정스님 譯, 2005.09.15, 이레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가족 채용 논란에 휩싸인 더민주 서영교 의원이 30일 열린 당무 감사원 회의에서 논란을 소명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더민주 당사로 들어가고 있다. 오대근 기자 inliner@hankookilbo.com
- 한국일보, 서상현, 송은미 기자, 2016년 7월 1일 자, “[단독] 국회 내 만연한 '가족 채용'… 서영교 파문 후 24명 사표”
- hankookilbo.com/v/35af3fd52dd4423fb6fcc314a567ae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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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투데이, 김태은 기자, 2016년 7월 1일 자, “'친인척·보은·품앗이 채용'… 보좌진 채용 천태만상”
- mt.co.kr/renew/view.html?no=2016063012367656472&MVJ#_ad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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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신문, 성연철, 김남일, 하어영 기자, 2016년 6월 20일 자, “여의도 보좌진 열흘새 20명 ‘증발’”
- hani.co.kr/arti/politics/assembly/7504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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