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지난주
어떤 가치는 남용되었다. 그런 것들은 좋게 들리는 작용을 위해 분별없이 소비되다가, 낯섦이 감소하자 익숙함 속에서 소멸해갔다. 이런 굴레를 방관하다가, 펜을 들었다는 명분으로 죄책감 없이 참전하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조심스럽다. 그래서 약간 비켜서서, 조금만 빌리고자 한다. 이토록 선뜻 다가서기 힘든 첫 번째 가치는 바로 ‘다양성’이다. 이것이 생물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온 확증에 기대어, 수많은 획일성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논고에서 소모되었기에, 필자는 본고에서 다양성으로부터 파생하는 바를 대여하는 정도로 갈음하려 한다. 타인에 관한 그 어떠한 것도 함부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섬세하게, 더 섬세하게 바라봐야 한다.
「김태은의 지난주」가 주목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한 장의 사진만으로 프레임 밖에서의 모든 관계를 알 수는 없으나, 보는 이로 하여금 심정적 불편함을 유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언론을 통해 전해진 사실관계는 대충 이러하다. 두산그룹 계열사인 두산모트롤은 유압·방산업체로, 회사는 지난해 12월경 사무직 10%에 해당하는 20여 명에게 명예퇴직을 통보했고 이를 거부한 사무직 이 아무개(47)씨의 자리는 사무실 한쪽으로 배치되었다. 책상 앞에는 사물함이 벽처럼 놓여 있다. 별다른 업무를 주지 않으면서 온종일 벽만 바라보게 하는, 이른바 '면벽(面壁) 책상 배치'였다. 이런 상태로 1~2주 정도 있었고, 그 뒤 이씨의 자리는 원탁으로 옮겨졌다.*
*3월 21일 자 「충격적인 이 사진 "명퇴 거부자를 원숭이처럼"」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기사 발췌 및 재구성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92174
사측에서도 나름의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이에 힘을 실어주듯 지방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낸 결과 '회사의 조치가 부당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근로기준법상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할 수 없는 것으로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등이 있는데, 일반적인 대기발령은 이것에 포함되지 않고, 사측이 수행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인사권 중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오히려 명예퇴직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직원의 월급을 깎거나, 전혀 상관없는 부서로 옮기는 등의 사례를 부당행위로 본 법원 판례는 존재하나, 일반적인 대기발령은 해당하지 않으므로 비롯했다고 전한다.**
**3월 24일 자 JTBC 뉴스룸 ‘김필규의 팩트체크’「 '면벽 대기발령' 법적 문제없나? 확인해보니」 발췌 및 재구성 http://bit.ly/1UOHabK
법적 하자를 물을 수 없다면,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따져보자. 물리적 자리 배치 외에도 시간표와 일종의 행동요령도 주어졌다. 이씨는 아침 8시 30분까지 이 자리로 출근해 온종일 벽만 보고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다. 10분 이상 자리이탈 시 팀장에게 보고해야 했으며, 흡연이나 전화를 위해 자리를 이탈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졸거나 취침 금지', '사적인 개인 전화 금지', '스마트폰을 통한 게임이나 카톡, 인터넷 등 사용 금지', '개인 서적 탐독 금지', '어학 공부 금지' 등이 세부 조항으로 첨부되었다. 대체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타인이 고통스러울 것임은 그 누구로부터 배운 것일까? 어째서 섬세함보다 잔인함이 더 빠르게 진화한 것일까?
이상의 사실관계에 기반을 둔 채, 이씨의 입장이 되어본다. 앞서 설파한 것처럼 최대한 섬세한 시선을 견지한다. 고통스러웠을 몇 주간의 시간을 견뎌낸 것으로 그가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 분쟁에 뛰어든 것과 맥이 닿지 않는다. 도리어 그토록 심한 모욕을 이겨내어야만 했던 무언가의 존재나 상황을 유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일 수도 있고, 아니어도 괜찮다. 어차피 그의 것이다. 그가 저 극심한 모욕에도 지키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씨 앞에 놓인 벽은 단순한 벽이 아닌 어떤 절벽은 아니었을까? 한 걸음 물러서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낭떠러지 앞의 생과 같은 것 말이다. 벽 앞에 세워 둔 이는 모르는 바로 그 지점, 마치 VR 체험을 하듯 이씨 눈에만 보였을 절벽의 끝, 타인의 절벽, 자본이 내리누른 시간은 이 섬세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상황은 문제를 인지하는 와중에도 급변한다. 이제는 절벽에 세워두는 시간조차 부여되지 않을 수 있음이 그것이다.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하는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노동개혁법'은 그것이 하부에 두는 소위 노동 5 법에 대한 문제도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양대 지침 중 하나인 '공정인사 지침'이 가장 뜨거운 감자로 거론된다. ‘일반 해고 지침’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정리해고나 징계해고는 물론, 업무능력의 결여, 근무성적 부진과 같이 사용자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는 사유까지도 '정당한 해고'에 포함한다.* 이른바 ‘쉬운 해고’가 가능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문자 그대로 혼란을 줄이기 위한 ‘지침’ 일 뿐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으나,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기업 CEO 들을 만난 자리에서 올해 임금 단체협상 시, 일반 해고 지침을 반영하라고 주문을 한 바 있어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이토록 심한 모욕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 덜 잔인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역설일까? 절벽 위의 위태로움조차 낭만이 되어버릴 미래의 어떤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 ** 위 두 기사 각각 일부 재인용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 절벽 끝에 선 책상은 타인의 것이지 내 책상은 아니다. 명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혹은 그러고 싶지 않은- ‘내가 저성과자가 될 확률’로부터 이탈하여, 어떤 책상이 절벽 끝으로 내몰린 사무실의 공기를 짐작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책상이 사무실의 절벽 끝에 놓였을 때의 나’는 상정하기에 상대적으로 무리가 덜 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타인의 책상이 절벽 끝에 놓인 공간을 공유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타인의 절벽에 무감각해지지 않고서는 나의 일상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음에 익숙해질 우리를 본다. 그것은 타인의 절벽일지언정 곧 우리의 절벽일 것이다.
어찌 모든 사람이 미래이겠나. 기업이 제 이미지를 위해 붙인 문구임을 모르지 않는다. 기업의 입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미래를 함께할 수 없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와 같은 거대기업의 횡포가 원망스럽기는 하되, 잘못을 따져 물을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이윤만 좇다가, 섬세함을 잃었을 수 있다고 –100번쯤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기업마저 조금이나마 더 섬세할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존재로 향해야 한다. 외부에서 규정을 단단하게 매어두면 세금 내는 기업이 제멋대로 하기는 힘들 터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절벽 끝의 책상이 나의 것이건, 남의 것이건 절벽 아래에 어떤 완충재라도 튼튼하게 마련해 두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절벽 아래의 세상은 그토록 사랑하시는 대한민국이 아닌지, 필자의 경우만 해도 너무나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내 앞의 땅이 꺼져 절벽이 된 날에, 이 공기에 익숙해진 타인들이 대신 질문해주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은 내가 타인이 된들 자신이 없는 문제이다. 이것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절벽 앞의 책상들을 붙잡고 있어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