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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뒤하늘 Mar 13. 2020

[소설] 돌아가는 길

Way Back - 집으로 돌아가는 길







20년, 자그마치 20년이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이 되기까지의

역사가 담길만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실제로 20년 전, 파리를 떠난 그다음 주 바로 태어난 조카, 그러니까 오빠의 아이는 생일을 맞을 때마다 유쾌하지 않은 알람처럼 내가 사랑하는 도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상기시켜주었다. 조카가 10살이 되던 해에는 노트르담 앞에서 ‘10년 안에는 다시 돌아오겠다’ 다짐했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씁쓸한 감정을 위안하려 조카의 선물과 함께 나를 위한 선물도 하나 함께 구매했었다. 그 후, 진한 약속을 나눈 노트르담이 불타오른 소식을 들으며 숭례문 방화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고, 전혀 다른 공간에서 잘 자라준 - 감사하게도 - 조카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술을 사달라며 조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두 도시를 동시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파리를 향한 사랑을 마음 한 모퉁이에 꾹꾹 눌러 담아 숨겨 놓고는 이따금씩 워홀이나 어학연수라는 이름표를 붙인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또 마중 나오기 위해 오는 곳이 되어버린 인천공항은 왠지 처음 오는 것만 같이 설렜다. 길지 않은 한 달의 여행이었지만, 잠시 머무는 것으로도 왠지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출국하는 건 처음이네.'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본 것이 20년 전, 한국으로 들어오는 그 비행기는 김포 국제공항에 내렸었다. 그 후로 해외라고는 일본을 몇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고, 단지 멀다는 이유로 인천공항 대신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을 선택했었다. 유학을 가는 친구를 따라 처음 와 본 인천 공항의 웅장한 스케일에 경악과 감탄이 동시에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공항에 갈 때마다 거대한 전광판 앞에 서서 습관적으로 하나의 이름을 찾곤 했다.


    > 14:00  파리     K901


    '내가 저걸 타야 하는데'라며 속으로만 되뇌던 그 비행기의 편명이 지금 내 손에 쥔 티켓에 적혀 있다.  


    노트북과 필요한 물건들만 담은 자그마한 핸드캐리어를 끌고 카페로 들어갔다. 공항의 한가운데에 한옥처럼 지어진 카페는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가게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키오스크 앞에 선 줄의 끝을 차지했고, 줄은 빠르게 줄어 내 차례가 되었다.


    > 아메리카노(HOT)     4,800원


    보통은 얼어 죽어도 아아 - 아이스 아메리카노 - 를 먹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니까, 따뜻한 이 마음에 어울리는 따뜻한 음료를 선택했다. 결제를 마치고 빈자리에 가 앉으려는데, 키오스크 작동법을 몰라 알바생과 씨름하는 할아버지의 고성이 뒤에서 울렸다. 기계로 커피를 주문하다니.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많아 바뀌었음을 새삼 느끼며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마침, 고등학교 졸업 앞둔 그때 한창 거리를 걸으며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남짓이었던 파리에서의 생활은 꿈처럼 황홀했다.


    처음 이름도 모르는 프랑스의 시골 도시로 유학을 갔을 때만 해도 무섭기만 했는데 - 엄마는 이제 겨우 열 살이 넘은 여자 아이를 무슨 배짱으로 한국 사람 하나 없는 도시로 보낼 생각을 했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대학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며 파리로 전학을 왔던 날에는 정반대의 감정들을 느꼈다. 예술, 문화, 낭만. 파리라는 도시에 사람들이 붙이는 수식어들이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마음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내가 가장 사랑한 것은 에펠탑 같은 조형물이나, 루브르와 오르세이 같은 박물관도 아니었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름도 기억하지 않을 거리들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인 도시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고, 음악이 바뀔 때마다 흐르는 서정적인 멜로디는 도시를 새로운 빛깔로 물들이듯 색칠했다. 심지어 그런 감정들에 취하는 것이 사랑하는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어떤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등학생의 어느 평범한 귀갓길일 뿐이었다. 평범한 골목 하나, 울퉁불퉁한 돌로 만든 길, 안장도 없이 녹이 슨 채로 버려져 펜스에 묶인 자전거,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가로수. 내가 사랑하는 파리는 특정한 이름이 없는 평범함 들이었다.


     특히 비라켐 다리 - 인셉션에서 엘렌 페이지가 처음 도시를 설계할 때, 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만들어지는 - 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까지 3-4개 정도의 다리에 걸쳐 센느강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였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1살이 많은 선배와 샤를르 미쉘역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숙제를 하고, 소화시킬 겸 걸어 나온 센느강은 마침 불어오는 가을의 은은한 바람과 잘 어울렸고,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은 채 그 산책로를 걸었다. 지금 돌아보면 왜 손이라도 한 번 잡지 않았을까, 벤치에 앉아 키스를 했다면 어땠을까 답답함이 들기도 할 정도로 우리의 모든 걸음과 분위기, 호흡마저 로맨틱했으니까. 아마 평소와 다르게 말수가 적어진 그 오빠는 손을 잡을까 말까 수 백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한 것임을 이제는 알 수 있다. 20년 전의 나는, 또 우리는 참 순수했구나 싶다. 그 오빠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렇게 자꾸만 이어지는 생각들을 굳이 막지 않으며 즐거운 추억에 빠져 커피를 다 마신 후, 여유로운 걸음으로 게이트를 향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선 줄을 기다려 보안검색대를 빠져나온 후, 커다랗게 놓인 전광판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누가 보면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라도 된 듯, 호흡을 가다듬고 비장한 표정으로 공항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비행기 티켓이라는 특권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이곳. 친구들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사기 위해 면세점을 돌아다니며 더 일찍, 더 자주 올 걸 하는 후회의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들었다. 파리에 가는 여행의 설렘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순간에 든 아쉬움은 사실 면세품의 말도 안 되는 가격을 향해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밖에.






친구들에게, 회사에서, 나는 언제나 '프랑스에서 온 파리지엔느'라며 나를 소개했다.

    

    사랑하는 도시라며 그토록 자랑했던 이 곳으로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들은 지금 돌아보면 - 당시에는 생사가 갈릴 듯 중요해 보였지만 - 하찮기만 했다. 현실. 그 놈의 현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생길 줄 알았던 여유는 오히려 더 찾기 힘들었다. 기근의 시대에 예술은 사치라고 누군가 말했다는데, 나에게 파리는 예술이었고, 당장 오늘 잘리지 않기 위해 부장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에게는 사치일 뿐이었으니까. 당장 내 앞에 닥친 내가 해야 하는, 적어도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들을 쳐내다 보면 매년 ‘파리에 가면 할 일’ 목록을 업데이트하며 다음 해를 기약해야만 했다. 그냥 티켓을 사고, 공항을 찾아가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반나절 만에 도착할 텐데... 용기를 내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현실'에 갇혀 살던 지난날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 사람과 종종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신혼여행은 꼭 파리로 가고 싶다고 조르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면 도시 구석구석을 걸으며, 이름 모를 동네 빵집에서 산 빵을 잔뜩 들고 흥얼거리는 상상을 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자연스레 멀어진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났어도, 천진난만하게 상기된 미소를 가득 머금고 그와 나누었던 파리에 대한 대화는 잊히지 않았다.


    자꾸 머리에 맴도는 장면들. 처음에는 몇 마디 단어일 뿐인 그 풍경과 거리들은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으로 <인셉션>되었고, 점점 자라 선명해지고 있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던데, 나는 다른 사랑의 대상이 떠나버린 그를 잊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을까?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충동적인 결정이었든, 아니면 지워지지 않는 파리 생각이 만드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든, 나에게 ‘현실’은 이제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야만 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쨌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내가 선택하면 될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알 나이가 되었으니까.






샤를르 드골 공항에 내려 미리 예약해놓은 픽업 기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RER(교외 철도)을 타고 파리지엔의 멋을 힘껏 뽐낼 수도 있었겠으나, 현실은 냄새나고 붐비고 지저분한 지하철을 굳이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나름 돈도 잘 버니까. 이 정도 호화는 누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4번 정도 울리고 나서야 친절하고 당찬 목소리의 여자 기사님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저 지금 게이트에서 나왔는데요.

    정진경님 맞으시죠? 어디 계시죠? 팻말을 들고 있는데 보이시나요?

    아니요, 안 보이는데. 혹시...


     서로의 인상착의와 캐리어의 색깔, 머리스타일 등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 <시월애> - 아니면 드라마 <시그널>? -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분명 서로가 같은 곳을 보고 있으나 만나지 못하는 기이한 상황이었다. 20년 전, 파리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고 쭉 살아온 평행 세계에서의 나를 만난 것이라면 좋겠다는 즐거운 상상마저 했지만, 현실은 그저 현실스러웠다. 최근 샤를르 드골 국제공항에 제3터미널이 생겼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등 한국에서 오는 항공편은 그쪽으로 착륙하도록 바뀐 상황이었고, 마침 내가 탄 비행기가 처음으로 제3터미널을 방문한 인천발 비행기였던 것이다. 제3터미널이 생긴 것을 알았지만 인천에서 오는 비행기는 제2터미널에 내린다고 생각한 그녀와 제3터미널이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대륙을 건너 날아온 나는 그렇게 10분이 넘는 미궁을 헤쳐 나온 후에야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어떡하죠. 죄송해요. 제가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잘 몰랐는 걸요. 천천히 오세요.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 옆 스타벅스에 가서 이제는 더듬거리게 돼버린 프랑스어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커피가 나올 때쯤 진동벨과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20분쯤 걸릴 것 같다는 기사님의 카톡이었다.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 나의 손짓이 순간 이질적이게만 느껴졌다. 주문을 하며 오랜만에 입 밖으로 뱉은 프랑스어 때문일지, 아니면 프랑스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전염이 된 것일지, 내 마음은 순식 간에 20년 전 그때의 파리로 돌아간 듯했다.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고, 인터넷도 지금처럼 빠르지 않던, 한국에 전화하기 위해서는 무려 <국제전화 카드>를 사서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메일 서비스가 있었지만 손편지를 주고받는 게 더 애틋했던, 발렌타인 데이나 친구 생일이라도 다가오면 소포를 정성스레 준비해 미리 국제우편으로 부쳐야 날짜에 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노란색 네모 하나만 눌러도 부모님과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차에 타 기사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까 잠시 상상했던, 소심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는 나와 달리 씩씩하고 밝게 웃는 자신감 넘치는 평행 세계 속의 나와 꼭 닮아 있어 피식 웃고 말았다. 터미널 사건으로 늦어진 출발 탓에 퇴근 시간과 맞물려 교통체증에 갇힌 우리는 자연스레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에 대해 더 알아갈수록 남자라면 반하겠다 싶을 정도로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 한 편을 보고,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파리라는 도시에 반해 비행기 티켓을 편도로 끊었고, 파리를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프랑스어를 알파벳부터 공부했다고 했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지금은 ‘내가 행복하면 뭐든 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는 그녀의 표정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뚜렷한 직업은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여유와 즐거움이 넘치는 일상을 늘어놓는 그녀를 보며, 어쩌면 정말 내가 바라고 상상했던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럽기도, 가슴 한 켠이 쓰리기도 했다.


     조용히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BTS의 곡이 소개되었다. 기사님은 파리에서도 방탄 소년단 때문에 난리라며, 자기도 아미라며 흥분된 목소리로 라디오 소리를 키웠다. 처음 유학을 왔을 때,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North or South (Korea)?”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던 그때와는, 여러모로 참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나도 스마트폰도 케이팝과 한국에 대한 인식도, 모든 것이 20년 전과 달라져 버린 세상이 아쉬웠다. 아마 한없이 짧기만한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나를 가두었던 현실로 회귀하겠지. 온 세상이 변해가는 데, 변하는지 조차 모르는 채 나 또한 변해가겠지. 그런 마음이 드니 혀끝에서 괜한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내가 향하고 있는 이 도시만큼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기를 마음으로 되뇌었다.


   

    1시간 반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숙소에 도착했지만, 지연 언니 - 한 때 기사님이었던 - 덕에 지루하지 않게 올 수 있었다. 언니와는 다음 주에 만날 약속을 잡고, 다시 혼자가 되어 에어비앤비로 잡은 숙소 문을 열었다. 천 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지켰을 낡은 벽 가운데, 나무로 된 사각의 창문 밖으로 내가 사랑했던 파리가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고, 이제 더는 같을 수도 없는 도시에서, 너무 길어버린 20년의 시간에 대한 후회 가득한 마음을, 창 밖 풍경만은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속삭이듯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파리에 있다.









글을 마친 후,


    오랜만에  빠져서  책을   읽고 나서 글이 쓰고 싶어졌다. 소설이랍시고 써놓은 글은 사실 나의 감정 쓰레기통에 가까웠다.  마음  구석에 처박아두고 애써 쳐다보지 않는 - 마치 장류직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탐페레 공항> 나오는 할아버지의 편지처럼 묻어두었던 감정을 꺼내었고, 글로 배설하였다.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내가 살던 파리를 추억하였다. 실제로 내가 살았던 그 도시의 황홀함을 담아내고 싶었다 - 십 분의 일도 묘사해내는데 실패했지만. 그리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고향 같은 그곳을 다시 머릿속으로 살아내며 글을 이어갔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왜 마침내 다시 비행기에 올랐는지, 다시 찾은 파리는 어떤 모습일지는 사실 안중에 없었던 것 같다.


    글을 끝내고 나니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우울함이 부드럽게 마음을 휘감는다. 그 포근함과 어울리게 스웨덴 세탁소의 <두 손, 너에게>(feat. 최백호)가 노이즈 캔슬링을 해놓은 적막 사이로 흐른다. 최백호 선생님의 목소리만큼 지금의 이 감정에 어울리는 음색이 또 있을까? ‘걱정 말아라. 너의 세상은 아주 강하게 널 감싸 안고 있단다’라는 한 문장은 내 마음의 우울함을 따스한 위로의 온기로 바꿔줄 뿐 아니라, 소설의 끝자락에 묻어두어야 했던 나의 씁쓸한 감정들마저 해소해주는 듯하다.


    눈물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우울과 위로 사이의 어떤 감정들 위에서 어느새 해가 진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는 파리의 낭만은 없음이 분명하지만, 그 나름대로 살만한 현실도 나쁘지 않음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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