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환도와 적응
원주에서 국민학교 1, 2학년, 서울 이사 와서 미동 국민학교 3학년, 재동/계동으로 이사 와서 계동 국민학교 4, 5학년, 겨울 피난 가서 유구 국민학교에서 나머지 5학년, 서울 환도 후에도 곧장 서울로 오지 않고 제천 작은집으로 가서, 의림 국민학교에서 6학년 졸업, 이렇게 국민학교를 5군데 다녔기 때문에, 나는 국민학교 친구가 거의 없다.
제천에서 6학년 다닐 때, 6학년생은 전부다 한 반뿐이고, 남자애들이 한 40명, 여자애들이 열명 좀 못되었던 같다. 여자 애들 중 두어 명은 내가 보기에 어른에 가깝게 컸었다. 쟤들이 나 좀 업어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것이 기억에 난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는 여자애들이 모두 얼마나 슬피 들 울던지, 이렇게 좋은 날 왜 울고 난리 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중 한 명만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것으로 학창생활이 끝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서야 왜 그리 슬피 울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었다.
작은형은 나보다 근 일 년 일찍 (1953년) 서울로 왔고, 나만 작은집에 남아서, 중학교 2학년 1학기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엄마 떠나서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서울 돌아와서, 우리 원 가족과 함께 (엄마, 두 누나, 작은형과 내가) 계동 집에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부산, 대전같이 큰 도시는 피난학교라는 임시학교가 있었고, 국가고시 성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지망하여 입학을 해서 피난지에서 이미 자기가 원하던 학교에 입학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 피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나중에 환도해서도 그 학교에 자동 입학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나처럼 제천 중학에 입학한 학생은 나중에 서울로 환도해서 자기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하여 입학을 지원해야 되는데, 나는 경복 중학교에 전학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라고는 집에서 가깝고 형이 다닌 경기중학교 말고는 알지 못했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 국민학교에서는 매년 경기중학에 100씩 입학했는데 재동 국민학교 한 반에서 15명 정도는 당연히 경기중에 합격했으니까, 나는 경기중 입학 이외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막상 환도해서 편입할려니까, 당시 경기중에서는 편입 금을 좀 과하게 달랬던 것 같다. 어찌 아름아름하여 경복중에 적당한 편입 금을 내고 들어갔던 것 같다.
그때는 경복이 어떤 학교 인지도 모르고 시켜주는 대로 그냥 들어갔다. 당시까지 경복 중학이 어디 있는지, 과거 제2고보였었는지도 모르고 들어간 거였다.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만약 계동 집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중앙 중학교에 들어가라 했으면 아마도 거기 입학했을 것이다. 들어갈 때는 경복중이 어떤 학교인지 몰랐지만 다니다 보니까 그런대로 다닐만한 학교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환도가 좀 늦은 편이라, 그때 경복중 2학년에 들어가 보니, 한 반에 학생이 100명이 넘었고, 내 번호는 112번이었다. 한두 달 지나니까 우리 반이 125명이 되는 난장판이라 정신이 없었는데, 제천 중학 조용한 분위기에서 우등생으로 공부하던 내가, 경복중 2학년 2학기 성적을 보니 평균 68점 (평생의 충격적 성적이었음)을 맞은 것이다.
아무리 공부 분위기가 나빠도 서울 놈들 공부는 시골 하고는 차이가 많이 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때였다. 그렇게 충격적인 성적을 받고는, 그래도 서울 학교 수업과정에 적응을 하여, 내 원래 성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반에서 2, 3등).
중학 2학년 입학 후, 1년 반 다니고 졸업하고 같은 교정에 있는 경복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 후 고3 때는 우리 반에서는 한 명뿐인 우등생이 되었다. 한 학년 반이 8개 반이 있었는데 다른 반은 우등생 (평균 90점 이상)이 두세 명이 되는 반도 있었지만 우리 반은 반 전체 성적은 제일 좋았지만 우등생은 나 혼자였다.
나는 내 머리가 명석하다고 생각하거나, IQ가 높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혹시 내가 일반인보다 그런 수치가 더 낮지 않나 하는 의심도 갖고 있었지), 그렇다고 공부시간외에 집에서나 과외에 공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단 학교 공부시간에는 딴생각 없이 선생의 수업에만 정신을 쏟은 것은 사실이고, 고등학교 때 까지는 이런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경복 다니면서 그런대로 우리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게 되었지 만, 처음에는 그런 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학과 공부 외에도, 중학 2학년 때 학교 교정에 있는 수평대에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원래 운동 신경도 별로 없고, 몸도 가뿐하지 못한 나는 수평대에서 기본 운동하는데도 힘이 많이 들었었다.
고등학교 가서는 철봉에 도전하여, 온 손바닥이 몇 번씩 다 벗어지고 전신이 쑤시고 아픈 것을 일 년 이상 견디며 매 수업시간 중간 휴식시간마다 연습했고, 집에서는 역기를 만들어서 벤치 프레쓰를 했는데, 고2 때 체격이 커지는 것을 느꼈고, 고3 올라가 봄이 되면서 체육시간에 웃통 벗고 나갔더니 모두 내 체격 보고 놀라더라.
국민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왔지. 우리 집은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어. 피난 못 가신 외할머니께서 수시로 오셔서 관리해주셨을 거야. 나의 외할머니는 당신의 다른 자손보다도 나의 엄마를 공주처럼 떠받치셨어.
나는 청운 국민학교 33회 졸업생이다. 지금은 100년도 넘었어.
인왕산을 뒤로 두고 청와대, 경복, 경기상고가 가까이 있었어. 나중엔 대통령 자녀들도 다녔다고 하더라.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땐 매일 아침 조회를 섰어. 국민체조도 꼭 하고.
어느 땐가 조회 때 훈시*중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린 남자아이가 저만한 여자애를 업고 가길래 “왜, 그렇게 커다란 애를 무겁게 업고 가니?” 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내 동생인데 뭐가 무거워요”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어린 내가 어떤 의미로 그 얘기를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그 기억이 잊히지 않아.
*훈시-조회 때 교장선생님 말씀.
가을이면 운동회도 했어. 흰색 반바지에 머리엔 청 띠, 백 띠를 두르고. 국민학교 4학년 때에 처음으로 크레파스가 생겨서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그때까지는 크레용 (전부다 일제였지, 국산이 없었음)으로 그림을 그렸지. 습자 시간이 있어서 습자지에 붓글씨도 배웠던 기억이 있고.
5학년 때는 여자 담임이었고 6학년 때는 남선생님이었다는 것이 기억나는데, 중학교 입학 후 선생님 집에 인사하러 찾아가기도 했지. 5학년쯤인가 소풍을 갔는데 한강 인도교 전까지 전차 타고 와서(거기가 전차 종점이었어) 한강을 건너 사육신묘까지 가는 소풍이었지. 그때까지도 한강 인도교는 복구가 안돼서 임시로 출렁거리는 가교를 타고 건너갔는데 어찌나 무서웠는지 발아래로 강물이 넘실 데는 게 다 보였어. 어찌 그런 위험한 소풍을 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지금 대학입시시험 (수능)처럼 국가시험을 쳤는데 아주 치열했지. 가정교사를 두고 과외를 하는 집들도 있었다.
그 당시 여자 중학교중에서는 1위가 경기, 2위가 이화, 3위가 진명/숙명. 나는 언니들이 다닌 학교로 지원하였지.
그때 수험번호가 36번이었는데 감독 선생님이 너는 번호가 “갑오*”라서 붙을 거다 라고 했어. 그분은 나중에 보니 영어 선생님이었고 그 딸도 우리 동급생이었지.
*갑오- 9로 곱할 수 있는 숫자. 예부터 9, 는 행운의 숫자로 여겼다고 함.
중학교 입학시험 때 음악시험은 노래 부르기였는데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무~울~" 지금도 생각나네. 얼마나 떨렸는지. 이때까지 살면서 가장 떨렸던 기억 중에 하나야.
청운 국민학교에서 우리 중학교가 가깝기도 했지만 지원자가 40명쯤 됐는데 스물몇 명이 붙었어. 나중 얘기지만 대학에 가니까 이 친구가 국민학교 동창인지 중학교 동창인지 헷갈렸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국민학교 동창들도 대학에 오니까 많이 만났지.
참, 중학교 땐 남산에 송충이 잡으러 단체로 갔었다. 6.26를 겪으면서 산에 나무들을 다 땔감으로 써서, 산들이 다 벌거숭이가 되었어. 그래서 사방공사도 많이 했는데. 남산엔 소나무가 많아서 그때는 약품이 없었는지 송충이가 우굴거렸어. 학생들을 동원해서 나뭇가지를 젓가락으로 만들고 깡통 하나씩 들고 송충이를 잡았어야 했는데, 나는 무서워서 하나도 못 잡았어.
그때는 또 집집마다 쥐가 많아서 쥐를 잡아 쥐꼬리를 갖고 오라기도 했지 (무섭고 징그럽워).
내가 중학교 때 동작동 국군묘지가 처음 생겼어. 우리 학교에선 전교생이 매일 당번 2 명식을 정해서 국군묘지에 꽃을 꽂고 왔어. 그때 동작동 가는 길은 진흙탕 길이고 참 험난했지. 교장, 선생님, 학생들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방학중일 때도 기념일에는 꼭 등교해서 기념식을 했어. 겨울엔 너무 추워서 집에 갈 땐 울면서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나는 학창 시절 끈기가 없고 노력도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다.
중학교 들어가서 피아노반에 들어가서 바이엘부터 배우는데 (방과 후에) 잘 늘지도 않고 몇 달 배우다가 창밖에 정구부들이 신나게 치는 걸 보고 정구부로 옮겼단다. 운동신경이 없으니 이것도 얼마 하다 그만두고 말고 (지금 생각하면 한심해). 취미반을 옮길 때마다 엄마의 치맛바람이 좀 도움이 됐지.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땐 첼로도 배울 뻔했는데 그때 그걸 전공했으면 날렸을까? 고등학교 때는 미술 선생님(남) 이 샹송, “가을 잎”을 불어로 가르쳐줘서 불렀던 것도 기억이 난다.
미술반에 들어서 야외로 스케치 여행도 가고 그랬는데, 그림도 그릴 줄 모르면서 노는 재미로 갔지. 그런데 이선생님이 자기 어머니 장례 치르고 며칠 있다 자기도 돌아가셔서 우리 모두 슬퍼했지.
고등학교 운동회 땐 아주 화려했지. 주변에 남학생들도 많이 구경 왔었고. 우리는 3 자매와 큰외삼촌 딸 3, 둘째 외삼촌 딸 둘이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으니까 (그러나 같은 시기에 함께 다닌 사람은 둘째 언니뿐), 나의 외할머니는 교장 선생님이 “대모님” 할 정도였었다. 운동회 땐 언제나 시청 앞 중국집에서 중국 만두인 “뽀스”를 사 오셨지. 우리 모두 좋아했으니까.
나보다 3살 위인 둘째 언니의 고3 졸업식 때는 우는 학생들도 많았었는데, 나의 고3 졸업식 때는 우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