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용돈
내가 중, 고등학교 때였던 1950년대는 전쟁 직후라 물자가 풍부하거나 여유 있는 생활 혹은 레저를 특히 즐길 수 있는 사회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늘 부족하다고는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가장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보다 10살 위인 큰형(1930년 생)의 경우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해방 전, 큰형이 중학교 때는 아직 일본 군대에 강제 징집될 나이는 아니어서, 위험은 모면했으나, 해방 후 급변하는 사회상에 적응하기 어려웠음이 분명했다. 육이오 때는 큰형이 길거리에서 인민군에 잡혀서 의용군에 끌려가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지내며, 나중에 도망쳐서 9.28 직전쯤 집으로 돌아와 숨어있다가, 수복 후 빡빡머리라는 것 때문에 길에서 국군한테 잡혀 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큰형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가 평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던 덕에 통역장교로 임관은 되었으나, 그래도 인민군의 따발총에 맞아 상이군이 되는 등 죽을 고비도 엄청나게 겪었고, 그 상황에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지도 못하고, 군대에서 육사 교수를 지냈으나 그것으로는 정상 교편을 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기도 했었다. 그래도 형은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한국에 돌아와 교수가 되셨다.
나는 학창 시절 용돈이라고 따로 받아본 적은 거의 없다. 우리 집만이 아니고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용돈이란 용도의 돈은 받지 않은 것으로 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 고등학교 때는 계동에서 효자동 전차 종점지까지나 학교까지, 지금 같으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거리겠지만), 학교 가는데 버스비 안 들고 점심은 싸 갖고 가서 먹고 하니 꼭 용돈이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한 학용품, 신발 등의 항목으로 받아썼고, 생각지 못했던 일로 돈이 필요하면 쌀 몇 되, 혹은 한말 갖고 나가 동네 싸전에 갖다 주면 지금 돈으로 한말에 지금 돈으로 3만 원 정도 되었을까 한 돈으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에 웬만한 필요 액수를 얻어 쓸 수 있었다.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기억이 몇 번 있기는 하다. 제천에 피난 가서 다녔던 국민학교 졸업식 후 얼마인지 기억 안 나는 액수의 용돈을 받았던 적이 있고, 고등학교 졸업식 후 아버지한테 갔을 때 (그때는 이미 중풍으로 몸을 못쓰신 지 3년째이셨다) 얼마간의 용돈 받았는데 이것도 금액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또, 대학 다닐 때 3학년쯤 되었을까? 여자 친구 데리고 을지로 2가에 갔는데, 그때는 그곳에서 숙박업을 하고 계셨던 아버지한테 들려서 인사시키니까 나올 때 얼마간의 용돈 받았는데 영화 보고 짜장면 먹을 정도의 액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대학교 때는 등록비, 책값 등은 아버지로부터 단 한 번의 차질 없이 꼬박꼬박 받아서 내고, 버스비나 학교 가서 먹는 점심값 정도는 큰형으로부터 받았으니까, 구태여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당시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라면 오직 가정교사였는데, 1주일에 몇 번, 하루 몇 시간씩 하는 시간제 혹은 그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입주제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내 친구 몇 명은 가정교사를 했었는데, 그래도 그들은 등록금 낼 때가 되면 여기저기 친척들한테 손 벌리고 다녔어야 했다. 또 고등학교 때부터 제일 가까이 지냈던 친구 하나는 홀어머니, 누나 셋과 살았는데, 그때만 해도 가정교사로 원하는 수요가 별로 없었는지, 등록금 마련에 매우 애먹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상대생들은 입주식 가정교사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경기 고등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집에 돈 많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꽤 있더라. 대학 때 제일 가까이 지냈던 친구 하나는 늘 주머니에 돈 지갑을 갖고 다녔는데 —그때는 일반적으로 학생이 지갑을 갖고 다니는 것은 없었던 시절—그 속에는 그 당시의 고액권 몇 장씩이 있었는데 같이 다니면서 그 친구 막걸리 많이 얻어 마셨다. 그때는 소주는 아주 질이 낮은 술이었고, 일반적으로 막걸리나 중국집 빼갈, 좀 멋 부리면, 위스키 시음장이라는 데서 국산 위스키를 마시는 것과 한식집에서는 청주가 주로 팔리는 시대였다.
용돈?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었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설날 세뱃돈 받은 것을 알뜰히 모았던 거는 생각이 나는데, 어디다 썼는지 기억이 전연 안 난다.
그때 “학원”이란 잡지책이 있었는데 그 책이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모아놨던 그 돈으로 샀던 것 같아. 그 책에는 김성환 씨 만화 “꺼꾸리군 장다리군”과 조흔파 씨의 얄개전도 연재됐지. 영화는 한참 뒤에 만들어 진거야. 영화는 1970년대 배경으로 만들어진 거 같더구먼, 원작은 1950년대에 나온 것이었지.
중고등 학교 때야 도시락을 먹으니까, 먹는데 따로 돈이 들일은 없었지. 고등학교 때는 내가 좀 까다로웠나 봐. 점심시간 즈음되면 집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노란 주전자에 뜨끈한 보리차와 "벤또"를 들고 교문 앞에 있으면, 내가 나가서 받아오고 그랬지. 그때는 그런 유별난 애들이 간간히 있었어. 아마도, 내가, 형제가 많아서 집안에서 소외받는 것 같은 기분을 이런 거로 때우지 않았나 싶나 싶어.
내가 학창 시절, 벌써 한국은행에 다니는 성인이었던 큰언니 와는 별로 공감, 공유하는 게 없었고, 나는 항상 둘째 언니와 항상 붙어 다녔다. 그 시절에 중, 고를 같이 다녔으니까. 둘째 언니 친구와도 다 같이 재미있게 보냈지. 우리 집이 학교와 가까워서 우리 집은 방과 후에는 내 친구, 언니 친구들이 항상 북적거렸어. 내 친구 하나는 지금도 가끔 말해 “너희 집에 그 감자볶음이 맛있었다”라고. 그때는 집에 오는 친구들은 다 밥 먹고 갔어. 반찬 재료도 별로 없을 땐데 뭐를 먹었는지 생각도 안 나네.
대학 1학년 때도 가끔은 도시락도 싸갔는데, 한참은 또 "빠다"에 구운 토스트를 싸 갖고 다닌 적도 있어.
대학 들어가서야 매달 차비는 받았는데, 돈은 매일 필요했지만 그런 거 가지고 불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필요한 거는 말씀드리면 사주셨지.
대학 졸업식날, 아침 일찍 미장원 가던 생각이 나네. 대학 졸업식날 학교 갈 차비로 미장원엘 가서 차비가 없었던 것이 기억나. 그때는 졸업가운 속에 짧은 치마 한복을 입었는데, 그때도 큰언니 한복을 얻어 입고 갔어. 사은회 때는 모두들 화려한 한복을 입고 왔지. 난, 그때도 큰언니 한복을 입고 가서 좀 유행에 쳐진 옷이어서 좀 창피하고 속상했어. 그래도 불만은 안 했지. 그때는 그런 거로 투정 부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