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생활에 대한 기억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아버지를 따라 충주에서 제천, 원주를 돌아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얼마 학교에 다니다가, 겨울 방학을 맞았다.
그 당시, 백두산까지 북진했던 아군과 유엔군은 겨울이 시작될 때 중공군의 참전으로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피하던 날, 그것이 소위 1.4 후퇴라는 것이다.
우리 집은 1월 4일보다 좀 이르게 12월에 피난길에 올라, 한강 다리가 끊어지기 전에 서울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갔는데, 이것은 한국 사람 거의다가 경험한 “겨울 피란"이었다.
그 당시 큰형은 군대에 가 있었고, 엄마, 두 누나, 작은 형, 나 그렇게 아버지의 인솔 아래 마부가 끄는 말마차 한대에 피난 짐을 싣고 한 일주일 동안 걸어서 충남 공주군 유구면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걷다가 엄마하고 막내였던 나는 마차 짐 위에 올라타고 가게 되었다. 피난짐에는 엄마가 사용하는 요강도 갖고 갔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유구면에 도착해서는, 남의 집 절반을 빌려서 몇 달 살다가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또 소마차 한대를 빌려 내려가게 되었다. 그 와중 두 누나는 헤어져서 부산까지 가서 나중에 어떤 의복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하고, 엄마, 작은형과 나는 유구면에서 한 30리쯤 떨어진 진짜 산골 마을인 선학리로 들어가서 몇 달 동안 지냈다. 이렇게 이산가족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두 누나만 멀리 떠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고등학생이었던 두 누나는 인민군이 들어오면 위험하다고 너희들 만이라도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했던 것 같다.
선학리에서, 낮에는 작은형 하고 산에 가서 땔감 나무해서 밥 짓고, 온돌방도 따뜻하게 하는데 썼는데, 멀리 산에 가는 수고를 줄이려고 동네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베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땔감 나무가 아니고 밤나무였는데 우리가 그걸 알리가 없었지만, 동네 어른이 막 소리 지르며 달려와서 도망갔지만 조그만 산골 동네에서 금방 잡혀서 혼이 좀 났었던 기억이 난다.
선학리 간지 한 달도 못된 사이에, 원주에서 살고 있던 큰아버지네 식구, 큰어머니, 그분들의 큰아들의 처 (큰아들은 경찰이어서 별도로 남하했었을 것이다)와 그 아들들까지 아버지가 전부 이 선학리로 데려오셨다. 그 집 아들 하나는 작은형과 동갑이고 동생은 나하고 동갑이었는데 그 아래로 남자애 하나 하고 여자애 하나가 있었는데, 촌수로는 우리의 조카들이었다.
큰아버지는 동네 마실방에서 잠자고, 우리 세 식구, 큰어머니, 큰형수, 아이 4명이 모두 우리가 살던 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사랑방이 사이즈가 꽤 컸었는지, 함께 생활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있지 않았던 기억이다. 큰아버지는 우리 눈에는 꽤 늙은 분으로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직 환갑 전이 아니었을까 한다. 머리는 하얗게 세셨지만 밥도 늘 고봉으로 잘 드시고 나무도 한 지게 크게 짊어지셨는데, 그분 따라 나무하러 다니니까 어떤 것을 장작으로 해야 하는지 알겠더라.
그 산골 마을에서, 눈이 채 녹지 않은 산속 실개천에 가서 가재 잡던 생각이 아직도 선하다.
그 큰집 하고는 나중 차차 소식이 끊어져서, 지금은 어찌들 지내는지 전혀 소식이 감감이다. 그 큰아들과는 우리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났고, 그 아이들 (조카들)과는 친구 같거나 친척 같은 생각이 안 들어서인가?
우리가 대학 졸업 후에 아버지 산소에 들렸다가, 큰형, 작은형, 나 이렇게 셋이서 그 조카들이 사는 집에 몇 번 들렀는데 그 후 슬며시 그 방문도 없어졌다.
그동안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전선이 북으로 올라간 다음 다시 엄마, 형, 나는 유구면으로 돌아오고 거기서 나는 유구 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되고 작은형은 유구 중학으로 들어갔다.
전쟁이 계속되는 중 다시 서울이 복구되었으나 우리는 서울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큰형이 통역장교로 수원 비행장 미군부대에 근무 중이어서 엄마와 두 누나는 수원으로 가서 살게 되었고, 작은형과 나는 공주군 유구면을 떠나며 엄마하고 헤어져서 아버지 따라 작은집이 있던 제천으로 가서 둘째형은 제천 중학에 편입하고, 나는 의림 국민학교 6학년에 들어가서 곧 졸업을 했다. 서울에서 다니던 재동 국민학교에는 학교 교복이 있었는데, 집에 있을 때 말고는 늘 그 교복 입고 교모를 쓰고 다녔다. 제천 의림 국민학교 다닐 때도 그 교모 쓰고 갔더니 우리 반에서 좀 큰 놈들이 그 모자 쓴 것 아니꼬운지 싸움을 걸어왔었다.
그 후 제천 중학교에 입학해서 2학년 1 학기까지 다니게 되었는데, 나보다 작은형은 먼저 환도해서 서울 집으로 돌아가 있었고 나 혼자 떨어서 작은집에서 살았다. 나도 엄마 있는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 혼자 많이 울었었다. 왜 나는 작은형 하고 함께 서울로 환도를 못했는지 그 이유를 나에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들어갈 중학교가 없어서였던 것 같다. 작은형은 6.25 터질 때 이미 경기중학교를 입학했었기 때문에, 경기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중학교 시험제도는 전국 국가고시를 보아 그 성적으로 중학교 선택하여 입학원서를 내는 것인데 제천에서는 일반 중학교는 제천 중학 밖에는 딴 곳이 없으니까 나는 자연히 제천 중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부산, 대전같이 큰 도시는 피난학교라는 임시학교가 있었고, 국가고시 성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지망하여 입학을 해서 피난지에서 이미 자기가 원하던 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런 피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나중에 환도해서도 그 학교에 자동 입학했었다. 그렇지만, 나처럼 제천 중학에 입학한 학생은 나중 서울에 환도해서 자기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하여 입학을 지원해야 했었다.
육이오 발발 그다음 해인 1951년, 1.4 후퇴 때에 우리 가족은 경상남도 영산으로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지.
피난길이 아주 추운 기억이 나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국군이셔서 우리 가족은 군 트럭을 타고 피난 가는 특혜를 누렸어.
서울에 남게 되시는 나의 외할머니가 부모님한테 나는 두고 피난 가라고 해서, 내가 막 울면서 매달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할머니는 딸 넷을 혼자 데리고 피난 가는 따님이 걱정스러워 그랬던 것 같아.
엄마와 우리 자매 4명 외에도, 당시 17살이었던 막내 이모가 같이 피난길에 동참하게 되었지.
피난길에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탄 트럭이 눈에 미끄러져서 남의 농가로 쓰러진 것과 또 미군들이 트럭 위로 껌이나 초콜릿도 던져주었던 것 등이 있어.
경상도 영산이란 곳에 부잣집 아랫방에 (그 집 아들이 아버지 군속이었다고 함) 세 들어가서 비교적 고생은 안 한 듯한데. 그 집 마당에 우물이 있어서 물 긷는 장난도 하고, 아침이면 둘째 언니랑 두부 사러가는 심부름도 하고, 연못에 매달아놓은 그네를 타기도 하곤 했다.
그때 길거리에서 쓰러져가는 인민군도 보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1951년에 피난지에서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지. 그래서 원래는 7살 때 입학했으나 8살 입학생이 되었어. 그렇게 그해 1951년에는 그곳에서 여름을 났어.
1953 여름 이후, 3학년 2학기에 환도해서 다시 서울의 국민학교에 오기까지 5번의 학교를 다녔어.
대구에서도 1학년을 다녔는데, 그때 막내이면서 하나뿐인 아들인 막냇동생이 태어났어.
그리고 그곳에서 나 바로 아래였던 막내 여동생이 발병해서 모두 부산으로 이사해서 피난 중인 이대부속병원에서 뇌막염 진단을 받고 불쌍하게 5살 나이로 죽었지.
죽기 얼마 전에 둘째 언니랑 병원에 동생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생생해.
죽으면 수의를 흰옷으로 입히지만 엄마가 너무나 애통해서 집에 갖고 있던 “모본단”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모본단은 수자직으로 정밀하고 윤이 나게 제직 된 비단이라고 함) 이란 중국 비단으로 재봉틀로 만들어서 입혔어.
재봉틀을 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생생해. 진지 잡숫다가도 우시고 그랬어.
부산에서 여수를 갈 때는 커다란 배를 타고 갔는데 다들 뱃멀미를 하고 토하는데 나만 말짱하게 뱃멀미를 안 했다고 가족들이 두고두고 얘기를 했지.
여수에서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아주 예뻐해 주던 기억이 나고, “싱싱한 게”를 많이 먹었어.
우리 가족과 같이 피난 갔던 막내 이모는 게 찌개를 하도 많이 먹어서 입속이 막 헐고 그랬어.
여기서 다시 부산으로 이사해서 광복동 근처인 서대신동 “서울 피난 국민학교” 그때의 서울에서 피난 온 학교들의 명칭은 다 그랬어, 무슨 무슨 피난학교. 마지막 피난지인 서대신동은 어렸던 나에게도 약간 부촌 동네였다는 듯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피난시절은 어른들은 아주 괴로운 시절이었겠지만, 아이였던 나에게는 별로 괴로운 기억이 없었지. 배고팠던 기억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