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과 여름 피난
내가 국민학교 5학년에 올라갔을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나는 중앙청에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 또래 동무하나 하고 중앙청 앞에 걸어가서 담장 틈으로 인민군 쉬고 있는 것 봤는데, 특별한 감흥이나 별 감정 없이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며칠 후 학교에 다시 나오라 해서 갔는데 김일성 노래하고 북한기 그리는 것을 배웠는데 기억이 나는 것은 되게 재미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한 1주일 다니고 더 나오라는 말이 없어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었다. 해방 후 1년 즉 1946년 내가 우리 나이 7살이 되었을 때 원주 봉산 국민학교 (현 원주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또 서울의 국민학교에서도 우리는 사상 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다. 이북, 이남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은 알고 있는데, 이남에서의 삶이 이북에서의 생활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공산당과 민주주의가 (하긴 이북도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글이 있었지만) 어떤 심각한 대치상태인지는 인식이 없었다. 우리는 태극기 그리는 정확한 방법도 배우지 않았고, 이승만 대통령 노래도 없었지만, 이북은 제일 먼저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것이, 김일성 노래, 자기네 국기 그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짧은 공산치하에서 알게 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얼마 후, 아버지가 작은누나, 작은형, 나를 데리고 피난을 갔는데 왜 우리만 데리고 갔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1950년 6.25 남침이 있고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란 (피난) 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을 텐데, 아마 장성한 큰형과 큰누나는 길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무서워서였음 일 것이다. 아버지가 우리 셋만 시골로 데리고 갔는데, 그것이 바로 여름 피란을 간 것이었다.
충주 근처 옷 바위라는 강가 시골마을로 가서 어떻게 아는 집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 동네 아버지 소유 농지의 마름집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 동네에서는 비교적 제일 큰 집에 뒷 채를 빌려서 지냈다. 그 집 부인네들은 삼시세끼 가마솥에 밥을 지어 주었는데 큰 솥에 보리밥을 지으면서 한 움큼 흰쌀을 가운데 놓고 익히면 밥 위 한가운데만 흰쌀밥이 있어 제일 먼저 아버지 밥을 뜨고 다음 우리 형제 밥을 뜨면 우리 밥은 딴 사람 들것 보다 쌀이 더 들어 있었다. 우리 말고도 딴 식구들이 있었는지 그 집 아이들 포함 10 식구도 넘었던 것 같았다.
전쟁 발발 후 서울수복 전의 100일 만의 여름 피난으로 몇 달 되지는 않지만 그 강에서 물놀이하고 밤에 대문 밖 마당에 멍석 깔고 누워서 별 쳐다보고 동네 어른들이 하는 옛날 얘기 듣고 한 것이 아직도 늘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거기서 비록 개헤엄이지만 수영을 익혔다.
아침 먹고 강에 가서 실컷 놀다 들어와 점심 먹고 점심 후 또 강에 가서 놀다 들어오면 저녁 먹고, 어두워지면 문밖 마당에 멍석 깔고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에 그득한 것이 별이요, 은하수인데 하늘에는 밤에 별이 뜬다는 사실을 내 평생 처음 느꼈던 생각이 났다. 빨리 서울 가서 다시 학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서울이 점령당한 지 딱 100일 만에 유엔군의 도움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어 얼마 지난 뒤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래서 여러 다른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한 “여름 피난”을 갔었던 것이다. 서울 수복 후 아버지 따라 충주에서 제천, 원주를 돌아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왔는데 우리 동네 재동 근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다른 동네는 폭격, 포격으로 많이 망가졌다고 들었다.
6.25. 나던 해인 1950년은 내가 한국 나이로 7살 때였어.
그때는 신학기가 일본식으로 4월이었는데, 내가 국민학교 입학하고 3달 있다가 6.25 전쟁이 나서 그해 여름엔 학교에서 공산당 노래 ("빨갱이 노래")를 배웠지. 1950년 6.25전 서울에서 국민학교로 입학은 했지만, 그해는 전쟁으로 거의 공부를 못해서 그 이듬해 1951년 피난지에서 다시 입학, 밀양. 부산, 여수, 대구, 다시 부산으로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전학을 해야 했지.
6.25 때는 별안간 닥친 침범이라 서울 사람 대부분이 피난 못 가고 공산치하에서 어른들은 고생했으나 아이들은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지. 우리 집도 여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었는데, 아버지는 군인이셔서 전쟁터에 나가 계셨고.
인왕산에다 막 총 쏘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것을 듣고 어른들이 아이들 귀를 솜으로 막아주곤 했지.
9.28 수복 후 (미군 맥아더 인천 상륙 후), 4개월간 생사를 모르던 아버지가 별안간 대문에 들어오셔서 우리 모두 아버지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어릴 쩍 기억은 여기서부터, 그러니까 7살부터인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