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해방 전에 태어나다

해방 전후, 6.25. 전쟁 전까지의 기억

by BeyonJ



나는 1940년 강원도 원주군 원주읍 (현재의 원주시) 중앙동 145번지에서 형이 두 명, 누나 두 명이 있는 집의 5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동네 이름처럼 원주시의 중앙 지역에 있는 동네였던 것 같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본적지가 중앙동인 것 같은데 아마 가까운 옆의 옆집 정도였다고 들었다. 큰 형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방학 때 최규하 씨가 귀향 올 때 — 아마 경성 사범 학생일 때- 사각 모쓰고 교복 입고 동네 걸어 다닐 때 쫓아다니며 구경했다는 말을 들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19년생, 큰형은 1930년생).


나의 아버지는 원주시에서 2십 리쯤 떨어진 만종리에서 태어나 한학 하다가 집을 나가 자립하면서 어렵게 타향살이를 하면서 지내다가, 막내인 내가 태어날 때쯤에는 생활기반이 많이 좋아졌을 때였는지 당시 집으로는 그 규모도 괜찮았던 같았던 것 같다. 우리 집에는 목욕탕도 있어서 옆집에 사는 일본 사람 가족은 우리 집 목욕탕을 이틀에 한 번씩 빌려서 사용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해방 전의 일은, 나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고, 기억이 어렴풋 날 때는 10살 위인 큰형은 서울 용산중학교에 재학 중이셨으므로, 나는 주로 큰누나 작은누나 그리고 둘째형 하고 자랐었는데, 내가 제일 어리니까 셋이서 나를 놀려 먹느라고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면서 놀리던 생각이 난다.


내가 네, 다섯 살 때쯤 이미 원주에서 우리 집이 가장 부농이 되었다고 한다. 사방 널려있던 농지 중 시내서 가장 가까운 논밭 지대인 개운동에 넓게 자리를 잡아 우리 집을 지었는데 당시에는 그 동네는 주택들이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집은 안채를 ㄴ자로 지었고 가운데 큰 안 마당이 있고 마당 건너 ㄱ 자로 사랑채 행 난 채가 붙어있고 사랑채에는 쌀 몇백 가마는 충분히 쌓을 수 있는 규모의 창고와 그 옆에는 목욕탕 화장실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사랑채에는 안채의 반대편의 마당이 또 있었다.


그때 이미 “개와 집 (기와집)”으로 지을 수 있었는데 아버지 생각에는 어차피 매년 농사를 지으니까 지붕 이을 짚은 항상 나오는 거며, 매년 새로 지붕을 이어 올리면 더 좋게 보일 것 같아 기와 대신 초가지붕을 올렸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다.


예전부터 전라도 부농 중에는 만석꾼이 있다 했지만 중부지방에는 년 추수 만석 하는 집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원주에서 5천 석하는 가문은 달리 없었지 않나 싶다. 5천 석을 했는데 그때가 일제 말기쯤 되니까 거의 모두 공출 (세금)으로 뺏기게 되어 다 팔아버리고 2천 석만 남겼다는 사실을 나중에 아버지께 들었다.


그래도 원주에 몇 개면, 충주, 제천까지 우리 아버지 소유 노지가 산재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해방 후 땅을 거의 모두 빼앗겨서 농작 민들에게 배분되어 우리 땅이 거의 남는 게 없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개운동 일대의 땅, 논, 밭, 우리 집 둘레 동네의 땅들은 남아 있었는데, 일부는 군 비행장으로 수용되었고, 5000평 정도의 땅은 원주중학교 설립에 사용토록 증여되었었는데, 아버지는 내심 학교를 설립하여 학원 이사장을 하고 싶어 하셨고, 학교 설립의 법적 절차를 위해 미리 정한 교장선생한테 인가신청을 맡겼는데, 이 사람이 그 학교를 사립으로 안 하고 공립으로 인가를 받아 아버지가 화가 나서 끝까지 학교 땅을 명의 이전해주지 않아, 지금부터 한 20년 전까지도 그 땅은 우리 땅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도 어째 저째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학교로 기부 채납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집은 잔심부름하는 10대 여자아이, 가정부 (식모), 또 행랑채에 사는 젊은 부부네가 집안일을 하고, 동네 여편네, 방물장수, 잘 살지 못하는 먼 친척들 등등 항상 우리네 집에서 일도 해주고 때 되면 밥 먹고 하는 뜨내기들이 있었다. 물론 반찬은 대단치 않았으나 밥이나 김치, 된장 국정도는 늘 풍성하게 제공되었다고 한다.


일본 치하 말기에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은 모르고 지냈었다. 다만, 당시는 지금 같은 여러 가지 간식, 과자, 사탕, 케이크, 등의 호화 식품은 없었던 일반적 형편이었는데, 단 참외 등 등의 제철과일이 날 때는 지금 것들처럼 맛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풍성했었다.


큰형은 원주 국민학교 때 성적이 좋아서 당시 담임선생인 일본 선생님이 이 아이는 반드시 서울

용산 중학으로 보내야 한다고 추천하여 용산중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 용산중은 일본인 학교로 한 반에 한국 학생은 단 한 명씩만 받았다 한다. 해방 전에는 그렇게 용산중에 다니던 큰형을, 해방 후 경기중학으로 전학시키려고 아버지가 데리고 경기중학에 데려갔는데 그때 경기 중학생들이 교실에서 내다보면서 용산중 교복을 입은 큰형을 보면서 친일파는 우리 학교 못 온다고 전부 반대하고 나섰다고 했다.


그래선지 원주로 내려와서 당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원주 농업학교에 전학 와서 중학교를 졸업하셨다. 그래서 나는 큰 형과 같이 산 기억이 해방 이후에만 있다.


아버지는 집을 비우실 때가 많으셨고,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 (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외에는 분위기는 대체로 명랑하고 좋았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는 내가 장성할 때까지 계속되어, 대학시절을 포함 내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즐겁고 로맨틱한 가족들이라고 평해 주었는데 아마도 두 누나들 때문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말했듯이, 1940년에 태어나서 1945년 해방될 때 까지는 내가 너무 어려서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한국 국민이 일제 치하에서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지, 또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해야 한다는 교육도 받은 적이 없어선지, 우리가 조선 (혹은 대한제국) 사람이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착취하고, 남자는 군대 혹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여자는 정신대에 가면 돈 벌 수 있다고 감언이설로 꼬셔갔다는 사실은 그 당시 내가 알 수 있는 한계 밖의 일이었다.


단지 나중에 내 어머니로부터 일본 순사(경찰)들이 얼마나 한국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했는지, 일반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순사들을 무서워했는지 옛날 얘기처럼 들은 적이 있다.


개운동 집에서 1946년 (해방 후 1년) 한국 나이 7살에 원주 국민학교 — 당시 이름은 봉산 소학교이었던 것으로 기억함- 입학하고 2학년까지 다녔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이미 큰형은 세브란스 (의대) 다닐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원주에서는 국민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으니까 별로 특별한 추억은 없고, 단지, 6살 때 학교 다니기 전 약 1년 동안 서당에 다니게 해서 다니긴 다녔는데 도무지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르 황 — — 외우기는 했지만 그 뜻은 전혀 몰랐다. 하늘은 天이고 땅은 地라는 것을 모르고 서당에 다니다가 해방 후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 다닌다고 뭐라 할까 봐 서당 앞을 지나 등하교할 때 훈장한테 들킬까 봐 몰래 돌아다녔던 생각이 "쪼끔" 난다.


국민학교 1학년 땐가 2학년 때, 큰누나가 윤석중 동시집을 사주어 읽었는데 그중 몇 개는 읽으면서 어찌나 눈물이 났는지 모르는 구절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다.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은 서울로 이사 올 때 작은형 하고 나에게 새 옷을 사서 입혔는데, 그 당시 처음 나온 소털로 만든 천으로 옷을 지어 입혔는데, 그 옷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한국 전쟁의 상황 때문이었는지, 처음으로 소털의 새로운 용도를 실험했는지 염색은 되지 않아서 누런 소 색상 그대로였는데 입었을 때 몹시 목 닿는 곳이 깔끄럽고 불편스럽고 해서, 다시는 그 옷은 입지 않고 그냥 없어졌다. 아마도 서울로 처음 이사 올 때라는 큰 행사 때문에 그게 늘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서대문구 천연동에 방 세 개짜리 아주 예쁘게 생긴 기와집으로 이사 와서 미동 국민학교로 전입하고 (둘째형은 5학년 나는 3학년으로),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배화 여자 중학교로 전학했다.


3학년 초에 미동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교가를 거의 외울 때쯤 4학년이 되면서 재동으로 이사 오면서 재동 국민학교로 전학했지. 재동 집은 ㅁ 자 집이었는데 우리 식구에게는 좀 작은 편이 었는지 계동으로 이사했는데, 완전 ㅁ자 집에, 방은 총 7개고 부엌 뒤로 안 변소가 있었다. 대문간 방하고 뒷문가 방은 각각 간단한 부엌 시설이 붙어 있어서 어찌어찌 알게 된 두 가족들에게 들어와 살게 했는데, 셋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우리 집에는 그 외 먼 친지들이 항상 2-3명씩 손님으로 와있었다.




나는 1944 년 갑신생으로 서울 궁정동에서 태어났지. 위로는 언니가 둘 있는 셋째 딸로 태어나서 항상 부모님의 관심을 많이 못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어. 태어나서 7살까지, 그러니까 6.25 전쟁 전까지는 거의 외갓집에서 지냈었는데 외할머니가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셨어. 우리 부모님 집은 궁정동이었으나, 외갓집은 청운동으로 우리 집과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로 나는 거의 청운동 집에서 살았다.


당시 나는 아기였으니, 나중에 알게 된 내용이지만, 해방 (1945) 되기 1년 전이라 우리나라는 아마 많이 피폐한 상황이었을 것이야. 해방 후, 아버지가 국군 장교로 임관하셨기에, 우리 집은 먹고살기 힘들지는 않았던 듯하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 (나의 어머니)를 아주 많이 아끼고 사랑한 분이셨다. 세종대왕의 아드님 양평대군의 자손이라고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지. 아버지는 배재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셨고,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는 그 옛날에 판사를 지내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또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셔서, 후에 독립 유공자로 등록되셔서, 후에 큰아버지의 자손들이 나라의 혜택도 받았다고 들었어.


나의 어머니는 그 시대 양반 가문으로 알려진 민 씨 가문의 큰딸로 태어나서, 그 시대에는 드물게 여자로서 고등 교육을 받으신 분이야. 경기여고 출신이시지. 나의 외삼촌들도 다들 그 시대의 명문이었던 경기 중, 고등학교를 나오셨고. 엄마와 이모한테 외할아버지의 교육열이 대단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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