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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Dec 10. 2023

삶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를 찾는 것인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 이제 더 이상 줄게 없다는 것인가?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삶의 의미는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것’이라 믿었다. 

그만큼 찾기 쉽지 않고, 도달하기도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랬기에 이제까지 ‘삶의 의미 찾기'라는 어설픈 과제에만 몰두한 채 청춘시절을 보냈고 

그 이후 시기에도 긴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 고민도 지금은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게 등잔 밑이 어둡듯이 아주 '쉽고도 단순한 것’ 아닐까 한다. 

살아온 시간이란 세월이 그 의미를 제대로 해결해 준 것 같다.

그건 '타인에게 무엇을 얼마큼 무엇을 줄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바로 무엇이 바로 그 의미인 듯하다.
삶에서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주변사람과 관계나 친밀도이다. 

 

나 역시도 오래전 제도권의 상당한 직위에서 물러나고서 사람과의 관계는 허상이라는 진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많던 주변사람과 가까웠던 친구들도 떠나고, 이젠 어쩌다 만나는 한, 두 명만이 남아 있다.

그들은 내 처지를 잘 알고, 대가 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따스하기까지 하다.


 학교라는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과 입학식이나 종강파티에서도 돈 내는 교수님은 환영하지만 

돈 안 내는 교수님은 부담스러워한다. 

모두가 모이는 전체 모임이 아니면 잘 불러 주지도 않는다.

교수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폐쇄된 구조의 영향도 있겠지만 식사 값, 술값도 금액에 상관없이 거리 김 없이 지불할 때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얼마 전, 대기업 대표이던 친지가 갑작스러운 일로 사퇴의 변을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 단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그토록 친하게 다가왔던 수많은 사람들과 연락이 끊기는 것을 본다.

간도 내줄 것 같았던 사람들, 명절이면 그 많던 선물꾸러미를 던져주던 사람들도 떠나가는 걸 본다는 건 

역시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머무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더 이상 "타인에게 줄 것이 없다는 자체가 삶의 의미 상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대부분 삶을 고민을 한다고 하면,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을 먼저 걱정하게 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이나 직업도 결국에는 가족이나 타인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타인에게 감동과 웃음, 위안을 주고,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개 '일이나 직업의 정의'에 가깝다.

 이 역시도 선인이나 삶의 고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타인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명성, 추앙, 그리고 지위와 명예를 얻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사랑받거나 인정받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타인'으로부터 무언가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게 그만한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 보상으로 돌려받는 것이다. 

타인에게 기쁨이나 숭고함, 만족감 같은 감정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곧 우리가 바라는 걸 얻는 일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사실 내 안을 파고들어 가기보다는 내 바깥에 있는 타인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늙어가는 동안, 한정된 시간 동안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아주 가까운 친지에서부터 먼 타인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닐까?

사실 인생의 의미라는 것이 바로 타인에서 시작해서 타인으로 그리고 자신에게 귀결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삶에서 질문을 끊임없이 뒤집어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할 필요를 자주 느낀다. 

바로 "'내'가 아닌 '타인'에게"로 말이다. 

이를테면,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 

내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도 그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줄 것'이 있으면 된다. 

지식이나 지혜를 나누든, 장학금이나 기부금을 나누든, 내가 만든 사업체가 여전히 누군가의 생활 기반이 

되어주든, 노년에 이르러서도 타인에게 줄 것을 쌓아가고 지켜낼 수 있다면, 

바로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가장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번민하는 순간부터, 

사실 '궁극적인 해결방법은 '타인'으로부터 온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건강한 마음과 신체로 가족을 지키고 돌봐 줄 수 있는 것도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좋은 글을 쓰는 건 타인들과 감정과 기억의 경험을 나누고 공명하는 일이다. 

물론 명성과 돈이 따라온다면 더욱 좋겠지만.

좋은 사업을 하는 건 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타인들에게 좋은 시간과 순간들을 선물하는 일이다. 

"좋은 삶의 본질은 결국 주는 것"에 있는 것에 달려있는 듯하다. 

명예, 인정, 존경을 주는 것 역시 타인이라면, 

결국 타인에게 줄 것 없을 때 혹시 인생의 의미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줄 게 많은 사람, 아낌없이 줄 줄 아는 사람, 

어쩌면 제대로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인생의 끝자락에서 주변에 기부도 하고, 인연이 있던 사람들에게 쌓았던 부를 나누기도 하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적지만 신세 진 사람들에게 선의의 선물도 보내게 되는 마음이 드는가 보다.

가까운 명절에는 그동안 곁을 지켜준 이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겠다는 마음이다.

 

얼마 전, 먼 친척인 어르신의 남긴 한 마디를 전해 들었다. 

그분은 은퇴 후, 더 이상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냈다고 한다. 

남긴 말속에서 더 이상 나를 찾는 사람도 없고, 

"나의 역할도 없어서, 나로서는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다”라고 한다.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이 자리에 서 보면, 

어쩌면 타인에게 집중하는 것이 결국 가장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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