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왜? 꽃이 피고 지는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야 왜?
꽃은 피었다가 지는가를 알게 되었다.
평생 주인이 아닌 ‘긴 조연’으로 산 인생을 돼돌리려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여름엔 부디 가까운 기억이 피어날 곳으로 떠나라!
여름은 어디에나 여름이라서, 그래서 좋다.
평생 여름을 사랑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여름엔 낯선 장소, 낯선 시간 속에서 더 행복해지려고 애써야 한다.
이제 다시 한번 욕심을 부려본다.
“늙어버린 노구를 끌고선 그 시절에 가졌던 행복 한 줌을 다시 훔쳐볼까!
여름은 내가 누리고 버틸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무이자 행복이다.
여름을 물들이는 푸른 기억을 다시 불러본다
고향인 동해 바닷가를 떠올리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보며 푸른 바다에 흘러 녹아내리는
상큼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햩아먹는 어린아이가 된다.
거기에 대학시절 잠시 머문 오대산 산사의 아름다운 길 따라 펼쳐진 여름 정원 숲이나,
소금강 계곡에서의 이젠 어디에 사는지도 잊은 친우들과의 텐트생활의 추억도,
해변가 공사 중인 건물 경비 아르바이트 시절 만난 아름답던 사람들과 달콤 쌉쌀한 희 비극이 교차한 날들도 새삼 떠오른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도 여름날들을 좋아한다.
거기에 여름날 한낯의 태양빛을 온몸으로 맞는 뜨거움도 좋고,
해변 달구어진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는 짜릿한 뜨거움도 좋고,
하루가 저무는 송림의 푸르름 있는 건장한 위엄을 갖춘 숲의 기상도 좋아한다.
저녁 무렵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붉은 태양이 갖는 노을도 정말 좋아하고,
한밤의 홀로 앉아한 잔을 기울며 듣는 서글픈 파도소리도 좋아한다.
언제부터 여름을 좋아한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여름에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도파민 분비가 활발해진다는 점이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른다. 잊었던 삶에의 의욕이 불타오른다.
여름의 행복 성분은 ‘들뜸이 준 행복감’인데, 거기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한겨울에 태어나 온몸이 시린 추위에 무의식적 불안을 겪는다.
그런 탓에 나는 겨울엔 계절성 우울에 시달리고, 비관론적 사색에 빠지고, 비활동성 기질을 갖고 성장해 왔다.
그래서인지 여름이 오면 돌연 내 존재의 저 심연에 숨은 기쁨과 명랑이 살아난다.
해가 끓는 정오, 아! 여름! 그리고
"이제 살았구나"라고 안도한다.
어려서는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따스한 햇빛이 온몸을 달구어주는 따스함에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기분과도 관련이 있다고만 여겼다.
내면과 무의식을 분석하며 침잠과 은둔에 여름에 이끌리는 취향의 불가피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여름 저녁이 지닌 지난 추억이 주는 삶의 행복한 기억들이다.
그 시기에는 세상이 내 것 같았고 공연히 낙관적인 기분이 깃든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낯설어지는 이상한 찰나도 있다.
그 여름의 싱싱한 푸름에 대해 이렇게 읊조린다.
“여름은 가장 먼 가장자리에서, 깊은 곳부터 푸르다.
그 푸름은 이미 젊음이 사라진 빛이자 색이다”.
평생 덧없고 하염없는 짓거리를 하며 그곳을 오랫동안 떠나 산 것을 지금은 후회한다.
“다시 동해바다로, 이 여름바다로 돌아가야지”
이제야 겨우 계절이 왜?
꽃은 피었다가 지는가를 알게 되었고,
그 이쁘던 슬하의 딸은 왜?
빨리 자라서 품을 떠나는가도 이젠 알게 되었고,
친구들은 왜?
떠나서 소식이 없는지도 알게 되었고,
세상에 나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한계도 왜?
그런지도 이젠 알게 되었고,
제대로 된 글을 쓸 재능이 왜? 없는지도 알게 되었다.
여름날의 뜨거움이나 겨울날의 차가움이 언제나 같이한다는 것도,
이렇게 살며 사랑하다가 저 세상너머로 사라지는 존재인 것을 겨우 깨닫는다.
이제야 왜? 꽃은 피었다가 지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기한 얼마 남지 않을 노구를 끌고선 그 시절에 가졌던 행복 한 줌을 다시 훔칠 테다”
라는 욕심을 부린다.
평생 주인이 아닌 ‘긴 조연’으로 산 인생을 돼 돌리려고 여름 바다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