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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Feb 05. 2023

07. 누구나 슬럼프(slump)는
찾아온다

변화는 무모한 저지름 속에서 싹트고 꽃이 핀다

글 쓰기를 2개월 이상을 쉬었다. 

“아! 나에게도 슬럼프(slump)가 찾아왔구나”

살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일상이 지루하고 하는 일, 그 역시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쫓기는 듯한 글쓰기에서도 벗어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이유였다.

자기 합리화의 변명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라고 하면서, 

슬럼프 야”, 그냥 이대로 있지”, 안 해도 괜찮아”라고 스스로 위안도 해보곤 하였다.

그 시간 동안 손 놓고 정체되고 포기하는 순간이 가져다준 편안함은 잠시였다.

또다시 새로운 불안감이 점차 커지는 걸 보면서 “아! 이런 위안은 잠깐이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

 

슬럼프(slump)”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진 상태가 비교적 길게 계속되어 침체된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 극복방법도 미국의 유명 심리해결 전문가인 쉴라 메레이(Sheila Murray) 박사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7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해결방법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반드시 맞다고 보진 않는다.

다만 그중에서 “멈추어라”, “초심으로 돌아가라”,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마라”, “자신감을 회복하라” 

이 4가지를 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해결의 휴식시간이 필요하고, 

결국 그 시간만 큼이 흘러야 슬럼프는 멈추고 해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이전에 올린 글들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읽어주기도 하고, 주변에서 격려의 말도 들으며,

이제 흐트러지는 일상을 보면서 이제야 다시금 글을 쓴다. 

그리고 이제껏 한쪽 곁에 밀쳐 놓아둔 새로운 목표와 잠시 덮었던 일정도 가다듬어 본다.


슬럼프를 탈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은 

얼마 전 친한 후배가 오랜만에 통화에서 전한 소식은 한 달 동안 걷기로 국토일주를 했다고 한다. 

지난 늦은 가을 무렵, 식사자리에서 본 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대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는 것 같았지만 삶을 이끌고 갈 에너지는 고갈된 

상태로 보였다.

그 당시에 나눈 대화에는 주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아직은 먼 것 같은 은퇴를 당장 할 것처럼 뱉어 내고 있었다.

그는 휴가를 내고, 한 달 내내 새로운 풍광과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며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동안 발이면 무릎이며 손목까지도 성한 곳이 없고, 상처투성이 몸이지만 마음만은 젊어졌고 새로워졌다는 말을 한다.

모든 게 시들 해져 가고 끝까지 완주하기에도 삶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고갈되어 가는 심경이 이런 

일정을 저질렀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익숙함을 떨치고 새로운 변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런 시들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무모한 도전이자 충동적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무모한 저지름으로 자기 다움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어떤 형태로든 저지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음속 밑바닥 깊은 변화는 우발적(?) 저지름 속에서 발아되고 꽃이 필지도 모른다.

새로운 저지름에 대한 도전이 가장 자기 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그게 삶의 행복했던 이유임이 분명하다. 


그런 이야기 속에 지금의 나 역시도 같은 처지이기에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복잡한 생각에 한참이나 멍하고 있었다. 

사실 세상에 어디에도 만만한 삶이 있겠는가 만은, 

그래서 산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비린내 나는 처절함이 있다.

삶이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 빛나고 윤기가 흐른다” 

너나 할 것 없이 나이가 들고, 중년에 접어 들어갈 때가 되면 삶의 윤기를 잃어가는 시기가 된다. 특히 중년의 시기에는 더 그렇다.

편안한 안정과 안락함을 선물로 받는 대신에 처절함을 상실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또 너무 오랫동안 익숙함 그 어딘가 오래 눌러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하던 일과 익숙한 삶에 고정되어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동안 쭉 해 왔던 대로 하고 살았던 방식대로 살아서 인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변화를 거부한다. 

삶은 결코 위로받는 게 아니다. 

혹 그 누구의 위로라고 해도 잠시, 잠깐일 뿐이다.  

결국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스스로 위로한다고 해서 잊어버리려 노력해도 그 결과의 끝은 항상 공허 해진다.

어차피 삶은 위로받을 수 없는 온전히 자기 몫이다. 

결국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그 신호는 무언가 저지르는 용기이다.

그게 진짜로 살아있다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산다는 것은 결코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분명히 아닐 것이다. 

때론 어디론 가 떠나고, 그 저지름이 삶의 응어리진 찌꺼기를 떠나 보기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중년의 나이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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