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버닝>을 보지 않은 여성분들이 꽤나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창동이 그려 낸 속물적이고 수동적인 해미의 모습을 자주 그 이유로 들었다. 왜 하필 여성을, 그렇게 다뤄야만 하는가? 납득이 된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로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하나 동시에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헛된 꿈에 의해 벤을 택하는 속물적 선택을 한다. 게다가 우물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을 종수가 ‘구원’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이창동이 그렇게 해미를 그려낸 것에 대해 나름의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창동이 <버닝>이란 영화에서 그려내려 한 것은 본받을 만한 위대한 인물이 아니다. 종수와 해미 모두 실존적 이중성을 지닌 채 대한민국이란 우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이창동이 그리려 한 인물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에서 고통받는 어느 누군가의 모습이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가 한 말로 해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이창동이 ‘만들어낸 리얼리즘 시’이니까.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 종수와는 다른, 해미의 실존적 이중성
해미도 종수와 마찬가지로 실존적 이중성을 지닌 존재. 북향인 원룸에서 남산타워로부터 반사되어 들어오는 찰나의 햇빛을 바라보며 두 가지 꿈을 꾼다. 첫째, 상류층이 되고 싶다. 아니 상류층보다는 향락적이고 화려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그래서 곱창전골을 먹고 나서 종수가 모는 고물 트럭이 아닌, 벤이 모는 포르셰에 타는 것을 선택한다. 이런 측면 때문에 해미는 된장녀로 그려졌다고 여겨진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된장녀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지닌 또 다른 모습 둘째,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로서 찰나적인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밑바닥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이렇게 종수와 마찬가지로 실존적 이중성을 지닌 해미지만, 종수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몽상가적’ 기질이다. 카드빚에 시달리는 그녀지만, 모은 돈으로 그녀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 케냐로 떠난다. “벤이 왜 너랑 사귀는 것 같냐”는 종수의 물음에도 별다른 의혹을 품지 않는다. 그런 그녀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의 나비와 같은 존재이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화려해 보이는 대한민국 상류층의 환락은 해미에게 청무우 밭처럼 보였겠지만,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될 바다이다. 그런 곳에서 해미의 어린 날개는 물결에 절어 버린다. 성형이니, 치장이니.. 카드빚에 한 번 절어버린 그녀는 그러나 여전히 현실감각을 얻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벤이란 바다에 다시 내려앉는다. 해미의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청무우밭과 바다를 구별할 줄 모르는 나비에 지나지 않은 걸까?
2. 몽상가 해미, 구원의 이중성
몽상가답게 해미는 자신을 우물에서 구원해 줄 존재로 종수를 제멋대로 간택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미는 매우 수동적 존재로 여겨진다.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런데 당연히도 실존적 이중성을 가진 존재로서 해미에게는 수동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해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시도한다. 그것은 카드빚에 시달리면서도 돈을 모아 케냐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구도가적 노력이다.
또한 구원의 존재로 선택한 종수를 능동적으로 꼬시는 것. 특히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는 단순히 과거에 종수가 자신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한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사랑과 증오는 같은 감정이라는 말이 있다. 굳이 못생겼다고 말하는 맥락이 어쩌면 그때부터 자신을 예쁘다고, 아니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냐는 것. 결국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는 종수를 구원의 존재로 선택했기에, 과거부터 종수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어야 한다고 ‘믿어야만’하는 해미의 심리가 드러나는 멘트. 마치 귤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며 먹으면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나아가 그녀 스스로에게 종수가 자신을 구원해 줄 ‘키’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종수를 자신을 구원해 줄 존재로 만들었기에,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종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능동적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이것은 미약하지만 연대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해미 방에서의 섹스는 밑바닥 인생끼리의 연대를 위한 악수와도 같다. 섹스를 하며 종수가 보는, 남산타워에서 반사되어 들어오는 찰나의 햇빛은 그런 존재의 의미를 종수가 해미와 ‘함께’ 찾아가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들의 연대는 박살이 났을까?
3. 파주, 종수와 해미의 엇갈린 실존적 이중성
영화사에 영원히 남게 될 파주에서의 해미의 춤과 석양 롱테이크 씬. 그곳에서 해미는 대마초를 피우고, 불타오르는 석양을 보며 삶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그레이트 헝거로서 춤을 춘다. 그것은 온전히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내던지는 실존적 춤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웃옷을 벗어던진다. 온 힘을 다해 그녀는 삶의 의미를 찾으며 춤을 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석양은 저물어 버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찰나적인 존재의 의미가 주는 허무가 온몸을 물들인다. 자신의 존재도 그렇게 사라질 것만 같은 허무가 그녀를 짓누르자, 그녀는 터질 듯한 슬픔을 느낀다. 그렇게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런 그녀의 슬픔을 암시하듯, 카메라는 천천히 이미 저물어 버린 밤하늘을 보여준다. 저물어 버린 석양. 저물어 버린 찰나의 존재.지쳐버린 해미는 잠에 빠져든다. 이 신을 보다가 정말 기립박수를 칠 뻔했다. 20대가 느끼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갈증과, 어떤 노력도 그 갈증을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허무가 미장센으로 완벽하게 표현됐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그녀의 몸짓과 저물어 가는 석양의 메타포가 절묘하게 합쳐지는. 그리고 그녀란 흰나비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그런데 온몸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던 그녀의 모습을 종수는 상류층에 대한 환상과 그로 인한 열등감으로 바라본다. 벤에 대한 질투가 그의 실존적 이중성 중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건드린 것.(하류층 남성의 이중성도) 그래서 나무가 많이 컸다고 말하며, 자신도 많이 성장했음을 인정해 달라고 말하는 해미에게.
“남자 앞에서 왜 그렇게 함부로 옷을 벗어? 그런 건 창녀나 하는 짓이야.”
한 순간에 그녀의 존재를 무너뜨리는 멘트를. 자신의 춤을,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해미의 믿음과 기대가 그렇게 송두리째 무너진다. 그렇게 해미와 종수의 미약한 연대는 그들의 과거가 숨 쉬는 파주에서 무너지고 만다.
4. 불쏘시개가 된 슈뢰딩거의 해미
카드빚 때문에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해미의 분신인 버려진 고양이 보일이. 굳이 고양이를 해미의 분신으로 설정한 이유는?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드러나듯 해미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죽었지만, 벤의 또 다른 여자 친구로 상징되는 또 다른 해미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으니.
게다가 해미를 통해 종수는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를 알아 가기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 해미는 종수에게 존재하지 않지만, 영원히 존재한다. 종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종수 안 응축된 시대의 분노를 불태우는 불쏘시개가 된 것. 나아가 종수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종수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믿게’ 만드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파주 씬 이후로 등장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존재하며 종수의 버닝을 위한 불쏘시개가 되는 것. 불타오르며 저무는 석양처럼 자신의 존재를 뜨겁게 태워내며 그 자신은 사라지지만.
5. 남은 일은..?
그녀는 그렇게 희생됐다. 허나 그것은 해미의 문제인가? 화려한 상류층의 삶을 꿈꾸며 대한민국이란 바닷물에 절어버리는 흰나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만큼 대한민국이란 우물은 너무도 깊다. <광장>을 쓴 최인훈은 주인공 이명준이 자살에 이른 결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이창동이라면 해미에 대해 최인훈과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해서 적어본다.
“위대한 사람이라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힘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주인공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리고 이 주인공과 시대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힘이 없다. 그래서 그가 한 자리 얘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다. 되레 그렇지 못한 탓으로, 많건 적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표징으로서 이 소설 속에 나타난 것이다.
남은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만약 내가 해미의 환경에서 해미로 태어났다면, 과연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똑같이 거짓으로 구원을 만들어냈을 것이고, 헛된 꿈을 꿨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그래서 버닝이 주는 이 숙제를 풀어보고 싶다. 허나 혼자선 도저히 불가능하다. 해서 이 숙제를 함께, 함께 풀어갈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버닝>을 통해 이창동이 던진 이 미스터리를 함께 해결하며 삶이란 것을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