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1. 밑바닥 인생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다

한국 20대의 자화상, <버닝> : 종수를 그려내다

by 정준민

버닝은 호러 영화?


<버닝>을 대부분 무서운 영화, 호러영화라고 생각한다. 납득이 간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을 차용하기도 했고, 섬뜩한 한국 전통 악기들의 앙상블은 그 긴 러닝타임 안에 빼곡히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창동 본인도 미스터리 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실제로 호러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엄마는 영화를 보며 내내 떨었다고.


하지만 버닝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을 차용했지만 그 장르적 관습을 벗어던진 영화이며, 실은 희망을 던지는 영화이다. 버닝이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한 번 증명해 보겠다.


1. 종수의 실존적 이중성


버닝에 나오는 세 캐릭터 종수, 벤, 해미는 모두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존재. 특히 이 중에서도 주인공 격인 종수는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을 쓰는 것. 그러나 초반부에 드러나듯 종수에게 세상이란, 또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수수께끼와 같다. 결국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조차 찾지 못하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 그의 욕망에는 단순히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존재로서 종수는 ‘실존적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실존적 이중성이란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상류층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신분 상승을 욕망하는 것을 뜻한다. 종수가 이런 실존적 이중성을 지닌 존재라는 미장센적 증거가 굉장히 많다. 그중 대표 격은 남산타워의 거울을 통해 북향인 해미의 집으로 들어오는 찰나의 햇빛. 종수는 그 햇빛이 하루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해미의 말을 듣고 곧바로 해미와 정사를 나누는 와중에 그 빛을 발견하게 된다. 또 해미를 생각하며 자위를 할 때에도 항상 남산타워를 보면서.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냐고? 첫째, 신분상승의 욕망을 불타게 하는 그림자이다. 버닝에서는 수많은 메타포가 사용되는데, 남산타워도 물론 메타포이다. 남산타워의 메타포는 첫째로 상류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종수는 벤으로 대표되는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는데, 상류층이 될 수 없는 현실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는 그래서 그런 욕망을 해미를 통해, 자위를 통해 해소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다. 존재의 의미는 해미의 말처럼 한없이 아름답게 빛나는 노을이 일순간 사라지는 것에서 드러나듯 찰나적이다. 따라서 남산타워의 햇빛이 찰나적으로 해미의 방 안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는 종수의 모습과 그런 햇빛을 보기 위해 남산타워를 보며 자위를 하는 종수의 모습은 모두 이런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표현한다.


2. 아버지로 대표되는 시대의 분노를 이어받다


실존적 이중성을 지닌 종수는, 따라서 뭔가 의미 있는 것으로 성공하고 싶다. 그러나 그게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쉬운 일인가? 흙수저인 종수의 환경에서? 그렇다면 그 환경은 어디로부터 기인했는가? 바로 아버지. 아버지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오신 분이다. 중동에서 피땀눈물로 벌어 온 돈으로 강남에 집 한 채 사라는 주변의 권유를 듣지 않고 축산업을 하다가 말아 드신 분. 만약에 그 돈으로 강남에 집을 샀다면, 아마 벤의 집안처럼 떵떵거리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벤의 집은 강남 반포에 위치해 있고, 벤과 마주하는 카페의 이름이 “벤”인 것을 보면?? 또 벤의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가나 아트 홀에서 나온 전시가 용산 철거민들의 시위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한 우연일까? 나아가 아버지가 굳이 축산업을 하면서 소를 키웠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FTA로 망한 축산업자들이 당연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아마도 이창동은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 힘든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구조의 문제를 제기한 것. 어쨌든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아버지는 항상 분노에 가득 차게 되고, 어느 순간 그 분노를 기껏 파주시 말단 공무원에게 터트리게 됐다. 물론 최후의 분노는 금고에 고이 모셔둔 ‘칼’로 표현된다. 그 칼은 지금까지 상징들의 연결을 봤을 때 결국 대한민국의 시대적 분노를 상징한다고 봐야 할 것. 그 칼이 종국에 벤에게 꽂히는 것으로 보아, 종수의 분노는 결국 벤이란 개인에게 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버닝에서 파국의 근본적 원인을 벤으로 봐야 할까? 실은 구조의 문제가 아닌가?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벤과 같이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상류층들은 언제나 양산될 것이고, 실존적 이중성을 가진 채 상류층에 대한 허상으로 빚더미에 올라 탄 해미와 같은 하류층 또한 언제나 양산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종수의 칼끝은, 종수의 분노는 그 구조가 아닌 벤이란 개인에게 향한다. 자신과 같은 밑바닥 인생을 비닐하우스라 칭하며, 해미를 불태우는 권태로운 사이코패스에게. 사실 이런 종수의 모습은 현 대한민국 청춘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모르면서, 아니 알면서, 혹은 무시하면서 구조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삶과 연결된 몇몇 극악무도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퍼붓는 정도. 그래서 슬퍼진다. 그 몇몇 개인에게 분노를 표출한다고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


그런데 나는 분명 버닝이 한 조각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이런 절망을 던지는 게 희망을 건져 올린 것은 아닐 텐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에 숨겨진 몇몇 상징들을 더 파헤쳐 보겠다.


3.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의 의미, 구원을 불식시키는 어머니


영화에서 전화가 울리고, 그 전화를 다급하게 받으러 가는 종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말하지 않는 알 수 없는 상대방에게 종수는 참다못해 이렇게 말한다. “아니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죠. 예?”


‘도대체 누가 전화한 걸까? 왜 그렇게 전화 신을 많이 넣은 걸까?’ 이게 영화를 재관람하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 영화는 이창동이 ‘만들어낸 리얼리즘 시’라고 생각했기에 무조건적으로 이렇게 많이 전화 신을 넣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선 엄마가 등장 한 이유를 먼저 밝혀냈다. 영화에서 아빠가 형을 선고받고, 엄마가 등장한 후에 종수는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왜? 그것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엄마라는 존재를 만남으로써 마지막으로 비빌 정신적 언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다고 느꼈을 때(이 순간이 또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정리된 시점이 된다), 종수는 소설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를 구원, 아니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려 한 것. 이 생각을 하게 되자 실타래가 풀리듯 전화 신을 그토록 많이 보여준 이유가 풀렸다. 전화는 항상 종수가 존재의 이유를 위협받을 때마다 걸려온다. 그래서 종수는 그 전화를 받으러 헐레벌떡 달려간다. ‘자신을 버린 엄마가 혹시나 성공해서 그 존재 이유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기 때문. 그런 희망을 갖고 참다못해 아무 말도 않는 누군가에게 뭔가 말을 좀 해 보라고 독촉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화기 너머에서 드디어, 엄마가 말을 한다. 만나자고. 그렇게 설렘을 품고 간 자리. 하지만 그곳에서 종수가 목도한 엄마의 모습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지도 않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비루한 모습. 엄마가 어떻게 500만 해달라는 말을 할 때 종수는 뭔가 내면의 불만을 토해내려다 집어삼킨 후. “알겠어요. 제가 해 드릴게요.” 이 말에는 강력한 분노와 체념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구원해 줄 존재라고 무의식 중에 믿고 있던 엄마란 정신적 비빌 언덕이 사라지게 되면서 종수는 스스로를 태우거나, 혹은 구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 시점은 벤에 대한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 때와 맞물린다. 그렇다면 종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앞에서 말했듯 소설을 쓰게 된다.


4. 실존적 한 발짝, 소설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 하다


종수가 벤의 하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교회에서의 모습이 등장한다. 뜬금없이 아~멘. 왜? 이창동은 이전 영화들에서도 ‘종교적 구원은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예를 들어 밀양에서는 '유괴 살해범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런 식. 교회 씬이 나오는 것은 '벤과 같은 사이코 패스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란 의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종수와 같은 존재는 종교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란 의문을 던지고 나아가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신은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들을 구원하려 하는가?'란 의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버닝의 답은 NO이기도 하고 YES이기도 하다. 무슨 개소리냐고?


우선 종수는 타인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 엄마라는 마지막 비빌 언덕도 사라지는 것이 그 증거. 그런 그에게 동시에 강력한 시련이 이미 찾아와 있다. 사랑하는 사람 해미가 벤에게 죽은 것. 따라서 엄마와의 대화에서 체념 후, 종수가 ‘우물’에 대해 물어본 것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이 영화에서 우물의 상징을 이야기하자면 해미 내면의 고독을 의미하기도 하고, 해미가 갇힌 대한민국이란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버려진 존재로서 해미가 갖고 있는 고독은 대한민국이란 사회에 갇힌 상태인데, 이를 구원해 주는 존재로 해미는 종수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자신의 언덕이 사라졌음에도 우물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자신이 구원받을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다. 엄마의 대답. “우물이 있었지.” 우물이 있었다는 말에 종수는 자신이 해미를 구했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를 통해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엄마마저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드디어 스스로 해미, 아니 자신을 구원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쓴다. 혼자 있을 때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신분 상승을 꿈꾸며 항상 자위를 하던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쓴다. 그것은 깊은 분노로 자기 자신을 태워버리지 않기 위한 자위이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실존적 발걸음이다. 당장에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기 안의 분노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소설을 통해 승화시킴으로써 아버지와 달리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는 종수의 실존적 한 발짝. 이 소설을 통해 그는 존재의 이유와 동시에 등단이라는 상류층으로의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실존적 이중성을 가진 자기 존재를 그대로 세상에 내던지는 것.


그렇게 종수는 현실에서 벤을 살해하고 나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벤을 살해하고 시대에 대한 분노를 태우며(버닝) 세상과 인간,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한 발짝을. 이는 이창동식 희망이다. 삶의 밑바닥에서도 기어코 희망을 던지는, 그러나 그 희망의 내용은 제시하지 않는 이창동식 희망. 그 삶의 내용은 결국 종수가, 나아가 갑갑한 대한민국의 청춘인 우리가 써내려 갈 페이지. 그리고 그 페이지는 우리뿐만 아니라 당연히 이 영화의 감독 이창동에게도 ‘미스터리’. 이제야 이창동이 이 영화를 미스터리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도, 우리도 앞으로 그려질 종수의 삶을, 우리의 삶을 도통 알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자기 위로하며 한없이 미스터리 한 삶이란 것을 살아내곤 있으니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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