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기억이 나를 속인 날

러닝을 시작한 이유(4)

by 박희진

힘들 때 사람은 과거를 꺼낸다. 나도 그랬다. 본인은 특공대를 20년전에 전역했고(04군번) 오전, 오후 4키로씩이 있다. 그 뛰던 기억, 하루 8키로 구보, “나는 원래 강했다”는 문장. 그 문장이 어떤 날은 버티는 힘이 되지만, 어떤 날은 현재의 나를 깎아내리는 칼이 되기도 한다.

그날이 딱 그랬다.


나는 지금의 스트레스를 너무 가볍게 봤다. “이 정도야 다들 받지.” “나 정도면 버티지.” 말로는 그렇게 했는데, 몸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300미터.


그 짧은 거리에서 숨이 튀어나오고, 속이 울렁거리고, 안전기둥을 붙잡고 헛구역질까지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내가 스쳐 지나갔다. “왜 이렇게 됐지?”라는 질문이 먼저 올라왔다.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때의 피로는 몸의 피로였고, 지금의 피로는 삶의 피로였다. 그때는 훈련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수업, 학생, 가족, 병원, 돈, 육아… 다 들고 뛰고 있었다. 그걸 들고 뛰는데 300미터가 길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그날 이후로 나는 결론을 바꿨다. “내가 약해졌다”가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게 많아졌다.” 이 문장 하나가 자책을 크게 줄였다. 비교도 줄었고, 호흡이 조금 더 들어왔다.


그리고 러닝을 ‘증명’이 아니라 ‘정리’로 두기로 했다. 오늘의 몸으로, 오늘의 속도로만 뛰자. 300미터에서 멈추는 날이 있어도 괜찮다. 오늘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이미 내 몫이다.


안전기둥은 그날 이후 단순한 철기둥이 아니었다. 허세를 꺾어주고, 자책을 막아주는 지점. 내가 다시 시작하게 되는 기준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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